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천경자(1924-2015), ‘생태(生態)’
아트코리아 | 조회 289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채색, 51.5×87㎝,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천경자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다. 고흥보통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고, 졸업 후 18세 때인 1941년 동경의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했다. 화가나 미술교사가 되려는 여성들을 위한 이 학교에서 배운 조선여성도 여럿 있었다. 나혜석이 1913년 입학해 서양화를 배웠고 일본화 전공으로 천경자의 2년 선배인 정온녀, 1년 선배 박래현이 있다. 천경자는 유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로 입선했고, 이듬해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老婦)'로 연이어 입선하며 일찍이 재능을 알렸다.

광복 후 23세 때인 1946년 모교인 전남여고 미술교사가 되었고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화가의 길을 갔다. 천경자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는 한국전쟁 중에도 화가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녀가 1952년 부산 국제구락부 개인전에 걸었던 '생태(生態)' 때문이었다. 이 뱀 그림은 산수나 인물 위주인 한국화 화단에 뱀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선보이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화제성으로 인해 많은 관객이 모여들어 마감시간이 되어도 전시장 문을 닫기 어려울 정도였다.[close]배경이 없는 막연한 공간에 35마리 뱀이 우글거리는 그림이다. 예로부터 새와 동물을 그리는 영모(翎毛), 꽃과 새를 그리는 화조(花鳥), 풀과 벌레를 그리는 초충(草蟲), 가축과 짐승을 그리는 축수(畜獸) 등의 분야가 있지만 뱀을 주인공으로 한 감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이 꺼리는 뱀을 소재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평범하지 않다. 천경자는 왜 초록색 독사를 그렸을까? 그녀의 수필을 보면 독사를 예쁜 허리띠인 줄 알고 집었다가 물려 죽은 어렸을 때 친구, 아버지와 여동생의 죽음이라는 혈육을 잃은 고통, 실패한 첫 결혼과 애증이 교차하는 사랑하는 뱀띠 남자 등 불행한 개인사가 이 그림의 배경에 있다.

천경자는 "뱀을 그린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 징그러운 존재를 한 마리 한 마리 직시하며 그려 낸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맞서 이를 극복하려는 저항이었다. '생태'는 20대의 젊은 여성화가인 그녀가 인생을 정면 돌파하는 용기와 힘을 가졌음을 자신의 무기인 그림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천경자의 작가적 기질을 잘 증명한다. 여기에는 이 작품이 불러일으킬 세간의 구설을 감당할 배짱도 포함된다.

'생태'라는 제목은 어떤 생명체도 자신의 태어남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으며, 부여받은 조건들 안에서 타고난 모습대로 살아갈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제는 존재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천경자 자화상의 주제 또한 그녀가 가장 잘 아는 대상인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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