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2    업데이트: 24-04-23 14:09

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숙종시대 화원, ‘팔준도첩’ 중 ‘응상백'(凝霜白)
아트코리아 | 조회 243
미술사 연구자


비단에 수묵담채, 42.5×34.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숙종이 도화서 화원에게 명하여 그리게 한 태조 이성계의 여덟 마리 말 그림인 '팔준도첩' 중 '응상백'이다. 서리가 엉긴 것처럼 흰 백마여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팔준은 푸른색, 검은색, 붉은색, 자주색, 황색, 흰색 등으로 털빛이 다양하고 얼룩말도 있다. 이름 옆의 화제는 "순백색(純白色) 오자(烏觜) 오안(烏眼) 오신(烏肾) 오제(烏蹄) 산어제주(産於濟州) 회군시어(回軍時御)"이다. 응상백은 갈기와 꼬리를 비롯해 털빛이 모두 희고 부리와 눈, 발굽이 검은 제주산 말이라고 했다. '회군' 할 때 탔다고 했는데 곧 압록강 위화도에서의 회군이다.

'팔준도첩'은 모두 풀밭을 배경으로 말을 화면에 꽉 차게 크게 그렸고 말 그림의 전통에 따라 대부분 옆모습이다. 화법은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이라고 해서 짙은 윤곽선으로 형태를 그리고 채색으로 형태를 채우는 기법인데 흰 호분 물감의 농도를 조절해 입체감을 주었다. 팔준도의 말들은 비범하고 건강한 자태를 자랑하지만 전쟁터를 누비던 용맹한 군마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우아한 모습이다. 그것은 태조의 공업을 칭송하려는 목적에 맞게 명마의 이상적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는 점과 주문자인 숙종의 취향에 맞추어진 화원 화풍의 산물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close]그런 중에도 이 '응상백'은 준마의 위용과 더욱 거리가 있다. 고개를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인 것은 회군의 고뇌를 투영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위화도 회군은 이미 천하를 차지한 명나라와 군사적 대결을 벌이려는 조정의 무모한 정책에 반발해 이성계 등 요동 정벌의 임무를 명령받은 지휘관들이 정변을 일으킨 사태이다. 이들이 결단한 회군으로부터 국가의 구조가 바뀌는 거대한 변화가 비롯되었지만 고려의 신하로서 '불충'의 고뇌가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덟 마리 준마의 신화는 기원전 10세기쯤 인물인 중국 주나라 목왕이 주인공인 전기이자 역사이며 신화적 여행기인 '목천자전'에 나온다. 중국 서쪽의 지역에 호기심이 많았던 목왕은 천산(天山)을 찾아 황하의 물길을 따라가 황하의 신 하백을 만났고, 곤륜산의 여신 서왕모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요지연도는 서왕모의 요지(瑤池)에서 주 목왕이 참석한 연회를 그리는 그림이다. 이런 여행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이른바 '목왕팔준'이다. 목왕의 팔준은 낭만적인 서유(西遊)를 가능하게 했고, 태조는 팔준과 함께 개국의 위업을 이루어냈다. 세종과 숙종이 팔준도를 그리게 한 것은 태조 할아버지의 창업(創業)을 칭송하며 그보다 어렵다는 수성(守成)을 위한 성찰의 자료로 삼기 위한 그림, 곧 감계화(鑑戒畵)였다. '팔준도첩'의 주제는 말이 아니라 태조의 창업과 숙종의 수성이기 때문이다.

미술사 연구자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