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    업데이트: 12-05-13 22:59

CBS 수요 에세이

서랍정리
강문숙 | 조회 944

<22>

서랍정리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마다 자신만이 갖는 특유의 습관 같은 것이 있지요. 어느 의사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트로트 가요를 듣거나 아주 큰소리로 거친 말투를 쓰며 긴장을 이완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문인들의 습관도 가지각색입니다. 밤에 원고를 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낮에 꼭 써야할 원고가 있으면 실내에 있는 모든 커튼을 내리고 쓴다던가, 또 컴퓨터 키보드 기피증 때문에 꼭 흰 종이에 볼펜으로 꼭꼭 눌러 써야만 글이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독자에게서 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글을 쓸 때는 어떤 음악을 틀어놓고 쓰느냐 하는 것이지요. 흔히들 시를 쓸 때는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서 쓴다고 상상하더군요. 그야말로 이건 영화의 한 장면이거나 한 장의 그림입니다.

저는 소리의 방해가 제일 괴롭습니다. 음악은 물론, 전화벨 소리도 최대한 낮추고 이중으로 된 격자창문도 꼭꼭 닫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물어오는 아이들에게는 짜증을 내기가 일쑤지요. 처음엔 이해를 못하던 식구들도 제가 작업하는 날이면 고맙게도, 뒤꿈치를 들고 다녀주는 정도는 이제 기본이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저는 서랍정리를 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전개해야 하는 글이 자꾸 곁가지로 새기도 하며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진하게 우려낸 보리차 한 잔을 후후, 불어 마시며 서랍 정리를 하지요.

엊그제는 옷장 서랍 정리를 했습니다. 티셔츠를 색깔 맞춰서 가지런히 개켜놓고, 두툼한 옷들을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며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 <미련>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유행도 지났을 뿐더러 낡아서 색이 바랜 쉐타, 그냥 버리기 아까워 이번 한 번만 입어야지...하던 것이 또 올해도 갈 모양입니다.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 올이 꼬여있는 머플러는 또 어떻구요. 이렇게 셔츠 한 장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인간의 욕심을 어찌 버리겠습니까.

 

또 옷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요. 처음 샀을 때의 설레었던 기억, 그리고 작은 기념의 뜻이 담긴 것이며, 너도 이제 이렇게 낡았구나, 늘어진 소매를 보며 애틋한 마음까지 추스르다 보면 어느새 창 밖이 어둑해집니다, 그런 후에 원고지 앞에 앉으면 내가 시를 쓰는 이유가 조금은 분명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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