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    업데이트: 12-05-13 22:59

CBS 수요 에세이

아버지의 손등
강문숙 | 조회 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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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등

 

 

언제부턴가, 눈에 드러나는 아름다움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의 숨은 진실성을 보려고 애쓰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나이 탓인지 모르겠지만, 반짝이며 드러나는 것보다는 안으로 감추고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나요? 태어난 모든 것은 쇠하게 되어 있는 게 자연의 이치지요. 이 가을날에 소멸되어 가는 것의 아름다움의 깊은 뜻을 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저 껍데기 소용없다, 누가 이렇게 말한다해도 이제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마당가에 수북히 쌓여 있는 딱딱한 콩깍지는 태워서 재가 될 쓰레기이기 이전에 아득한 생명의 집이었지요. 푸르게 껴안고 있던 그 여리디 여린 열매들을 비바람에도 흩어지지 않게 소중하게 보듬고 햇살 담아 키우다가, 때가 되면 스스로 말라버리는 껍데기는 미련을 버릴 줄 압니다. 제 몸 찢어 여는 그 순간 알맹이들은 한껏 탱탱하게 여문 알 콩으로 세상을 향해 날아가고 흉하게 일그러진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때 껍데기가 생각하는 것은, 푸른 생명이 담겨 있던 그 자리에 투명한 햇살이 통과할 때까지 모든 것을 비우고 온전히 내어주는 일이지요.

 

며칠 전이었습니다. 감나무 넓은 그늘 아래 놓인 평상에서 낮잠 주무시는 늙으신 아버님의 손등을 무심코 만져보았습니다. 나무껍질처럼 단단하고 질긴 살갖 위로 굵은 힘줄이 솟아 있더군요. 어찌 보면 고집스럽기도 하고, 세월을 향한 무언의 항변 같기도 한 힘줄은 자신의 삶을 동여매고 있는 동아줄 같기도 했습니다. 아니, 우리 자식들을 지켜준 울타리였겠지요. 가슴이 뭉클해지며 그 손등이 진정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청춘의 시절 건너오지 않은 백발이 없지요. 껍데기 속에서 나오지 않은 알맹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소멸을 온몸으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응집과 팽창의 시간을 지나 당신의 열매들인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지금은 다만 초연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계시는 겁니다. 아버지의 쭈글쭈글한 손등에는 세상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온 길들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잠꼬대처럼 희미하게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괜찮다, 나는 괜찮다’ 이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때 만진 것은 또 다른 껍데기로 살아갈 모든 알맹이, 나 자신의 흔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저렇게 아름다운 껍데기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문득 숙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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