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    업데이트: 12-05-13 22:59

CBS 수요 에세이

초록색 유리병 속으로
강문숙 | 조회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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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유리병 속으로

 

 

본격적인 휴가철입니다. 산과 바다에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넘쳐나고, 동해안이나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하루에 백 만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는 뉴스가 해드라인으로 뜨고 있습니다. 오늘은 또 빨갛게 달아오른 수은주가 얼마나 높이 솟구칠 것인가 은근히 두렵기도 하지요.

요즘은 피서방법도 다양해졌습니다. 해외로 못나간다고 그냥 주저앉을 필요는 없지요. 각종 체험 여행, 자연휴양림, 내공으로 더위를 다스리는 명상 프로그램, 산상 수련회 등 정말 우릴 부르는 곳이 너무 많아 고민일 겁니다.

 

저희도 예외는 아니였죠. 이런저런 궁리 끝에 딸애와 함께 외가가 있는 경북 북부 지역 산촌을 돌기로 했습니다. 유명한 관광지나 명승지도 더위를 피하기엔 이젠 별로 적합하지 않음을 아는 나이들이 되었기에, 그냥 좋은 공기나 쐬자고 했지요.

오랜만에 가보는 시골집이라 낯설어하던 딸애가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골목 입구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는 알전구를 보자 아주 반가워합니다. 큰 나무 밑에 아무도 모르게 묻어두던 빛 바랜 편지를 보는 것처럼 감회 어린 표정입니다. 물이 너무 차서 ‘수정’ 같다고도 하고, 이른 아침 초록 들판에 이슬방울이 맺힌 걸 보고 ‘물방울들이 초록색 유리병 속으로 들어간다’ 며 감탄을 거듭합니다.

메일을 확인하려 해도 PC방이 없고, 휴대폰이 끊겼다 이어졌다하며 죽령재를 넘어도 마냥 즐거운가 봅니다. 무스를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이마 위로 자꾸 흘러내려 연신 거둬올리는 손길이 바쁘면서도 소백산 계곡물에 피라미들을 좇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살다보면 세계 어느 곳이나 다 고향이라는 코스모폴리탄들에겐 촌스럽게 들릴지 몰라도 ‘고향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하고 생각 해봅니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서대구톨게이트에 길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 지친 표정이 역력합니다. 초록들판에 우아하게 서 있던 황새들이 논우렁을 잡아먹느라 벼를 쓰러뜨려서 농부들에겐 한참 골칫거리라는 라디오뉴스가 흘러나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TV채널을 돌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은 울립니다. 다시 현실의 쳇바퀴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복잡한 도시생활에 지쳐 있을 때 문득, 창문을 열고 별을 바라보며 환해지듯이, 아이들은 그 여름의 시골 추억을 떠올리면서, 잠시라도 마음이 여름들판처럼 푸르러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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