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    업데이트: 12-05-13 22:59

CBS 수요 에세이

어떤 여행
강문숙 | 조회 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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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

 

저는 지금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가난한 목사의 아내로 사는 언니와 함께 푸른 바다와 넓은 초원이 있는 곳으로 갈 예정입니다. 학창시절에 쓴 그녀의 소설은 친구들이 돌려가며 읽기도 했고, 유채꽃처럼 노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나서 시골교회를 잠시 술렁이게 만들기도 했었지요. 가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무언의 항거를 해서 부모님을 애태우게 했던 그녀는 고집도 여간 센 편이 아니랍니다. 그렇게 개성이 강하던 그녀가, 그 어렵다던 목회자의 아내 노릇을 무던히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 사모에겐 백 명의 교인이 백 명의 시어머니와 같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비밀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 그녀를 한번쯤은 평범한 여자로 돌려놓고 싶은 제 심정을 이해하시겠는지요.

 

저는 먼저 그녀에게, 무릎을 모으고 늘 다소곳하게 앉던 것에서 비스듬히 다리를 꼬며 건들거려도 좋다고 해야겠습니다. 음악은 찬송가가 아닌 추억의 팝송을 들으며 달리겠습니다. 흥에 겨운 그녀가 노래를 들으면서 고개를 까딱거리더라도 짐짓 모른 체 해야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가 아스라한 눈빛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면, 조심스레 첫사랑 이야기도 잠시 꺼내볼까 합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민망하지 않게 휴게소에 들러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시면서 지우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아참, 휴대폰의 전원을 끄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인 딸의 혼사 걱정과 형부의 위장약 챙기는 걸 잊었다는 염려는 듣지 않을 작정입니다. 안 그래도 사람이 적은데 새벽기도에 빠진 걸 면구스럽다고 하는 이야기도 못들은 체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미술대학에 다니는 막내를 데리고 나타나선 곧 있을 여름성경학교와 올해도 예배당 뜰에 물봉숭아꽃이 얼마나 피었는지를 자랑 할 겁니다. 주일 오후마다 사택에 모여 국수 말아먹느라 가난한 목사님네 냉장고가 텅텅 비어버린 이야기며, 올 여름에도 봉고에 집사님들 가득 태우고 소백산 기도원에 갈 거라고 조근조근 이야기할 게 분명합니다. 또 이거 한 번 들어보라며 핸드백에서 CCM테잎을 슬며시 내밀 게 뻔합니다. 또 있네요, 엄마가 자식에게 하는 말들은 곧 땅에 씨앗을 뿌리는 일이니,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일장 훈시도 빼놓을 수 없는 목록이군요. 그러면서 늘 그랬듯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는 말로 마무리하는 걸 잊지 않겠지요. 사실은 그 말을 믿고 제가 지금까지 겁 없이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의 이런 여행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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