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    업데이트: 12-05-13 22:49

시인협회수상자특집

청동우물 (외 4편)
강문숙 | 조회 887

<대표작>

청동우물 (외 4편)

- 강 문 숙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내와 지나간다.

댕기머리 아들이 천자문을 끼고 지나간다.

헛기침하며 교자 탄 나으리가 지나가고

농사꾼 방물장수 유기전의 사내들이 떠들며 지나간다.

쪽진 머리의 그의 아낙들 젖통을 흔들며 지나간 뒤

소와 말, 돼지와 홰를 치던 닭들이, 쥐새끼들이 지나갔으리.

 

천체박물관 전시실 안, 앙부일영(仰俯日影)* 청동의 육중한 원을 따라 하염없이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들이 있다. 웅웅거리며, 무수한 결을 따라 돌다가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푸르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란 때로, 소리가 되어 떠돌기도 하는 것인지, 저 깊은 시간의 우물 속을 들여다보노라니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사소한 기억까지도 담고 있는 청동 우물.

손바닥을 대어보니, 사라진 것들이 속속 돌아와 울음 섞인 노래를 풀어놓는다. 자꾸 슬픔 쪽으로 기울어지며, 무중력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나는 문득, 어디서 왔는지 한 점 서러운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본다.

비와 바람과 햇빛들이 일렁이는 심연에서, 이윽고 아득하고도 맑은 종소리 울려나온다. 어느 사원인들 저토록 깊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둥근달을 발효시키고 있던 청동우물 속이 환해진다.

  

 

 

*앙부일영(仰俯日影) - 세종 때의 해시계, 저자거리에 놓아두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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