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    업데이트: 24-01-04 21:17

유배시편

정 숙의 유배시편 중 배달민족 낡은 생의 미싱을 수리하다 꽁치통조림
관리자 | 조회 338
배달민족
---유배 시편 28[김배달]

달려라!
너, 김 배달
오늘도 오천년 배달민족의 바톤을 들고 달려야 한다

물려받은 씨앗 잘 갈무리하여
주춧돌인 두 아들에 살림밑천인 딸도 두었고
별 볼일 없는 간판의 회사지만
명문이라 우기며
아래 위 서류전달도 어지간히 해댔지만
이제 겨우 세상맛을 알만한 나이인데
밀려나
세월 오토바이를 탄다
부릉! 부르릉!
온 몸 솜털이 곤두서서 춤을 춘다

이 나이에 배달민족의 근성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잠시 죽었던 한 남자 다시 일어선다
그 고사목에 새 잎이 돋아난다

열아흐레 달빛 옷걸이
-유배 시편 15 [지구의 어깨]
1.
저 가녀린 어깨에 얼마나 큰 무게 실려 있었던가
초가을 별빛 줍느라 잠은 밤새 돌아오지 않는다
흰 바람벽에 멱살 잡힌 옷걸이 하나
싸늘하게 눈동자 깜박이는 달밤을 입어 더 핼쓱하다
한 쪽 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지구의 어깨
낮엔 왜 보지 못했던 것일까
너덜너덜 껍질마저 벗겨진 채 깡통으로 찌그러져 있다

날마다 허영의 공깃돌 한 주먹씩 쥐었다가 흩어버리는 나의 낚시 바늘들
그 바늘이 물고 있는 그의 시간이, 돈다발이 그 살의 뼈 벗기며 끌고 다녔었지 한 때 내 배꼽열쇠가 그의 비밀금고 빗장을 열고 들어가거나 압력솥의
추 끓어오르다가, 뾰족 손톱이 그의 어깨 피 흐르도록 할퀴어대기도 했었지

2.

그 소리 요란하기만한 난바다 산 같은 파도 헤치며 몇 사람의 밥통 지키느라 짓눌렸을 저 가장의 무너져 내리는 어깨, 소설 몇 권치 삶의 태백산맥 짊어지고 불면으로 깊어가는 밤을 헤아리며 벽 못에 물려있다

뿌리 없는 내 허망의 귀틀집에 감금당한 저, 뼈 속까지 구멍 난 남자 이제 살집 두툼한 내 어깨에 찢어진 그의 날갯죽지 뼈대가 기대어야 할 때인가 저, 열아흐레 달빛은 은근히 그것을 내게 강요하고 있는데


통조림, 그 한편의 시

-유배지 시편 14[꽁치]

작은 깡통에 유배당한 저, 꽁치
제 지느러미로 가시 칼날 다시
곧추세운다

쉽사리 잡히지 않으려 하늘 그림자에
피 말리며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잡혔다

지금 간절한 풍경이다
땡, 땡 하늘을 깨우다가
쨍그랑 유리잔을 깬다

절명의 한 순간 퍼뜩! 깨닫는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누구에게 먹이가 되는
길 찾는 일인 것을

이제 제 몸뚱아리 허공에 다 내주었다
저 한편의 시
맨가슴으로 읽으면 될 것이다


낡은 생의 미싱을 수리하다
-유배시편1 [지하도에서]

살얼음이 칼바람을 물고 달려드는 밤
서울역 지하도에 웅크린 사람들
세상사 뭐든지 꿰매고 깁던 버릇  버리지 못해
긴장된 순간들을 모아 시간 조각보 박음질하네
가슴 속 미싱 바퀴를 돌리고 있네
침침한 바늘귀에 실을 꿰어
지쳐버린 손가락 마디 호고 감치네
끝내 바늘귀를 찾지 못하고
헛바퀴만 몇 바퀴 드르륵 돌리다가
무연히 드러눕는 사람들
찬 바닥 신문지 몇 장 깔고 누워
허공으로 둥둥 떠올라 지상의 가족들을 내려다보네
미안하다, 사랑한다, 틀바늘은
간간이 헛소리 하는 제 주인의 꿈 깨우지만
드르렁, 컹, 컹 코고는 우레 소리만
지하도의 밤을 울리며 지나가네
속절없이 무너진 가슴 속 지키며
세상을 돌리는 재봉틀
헛바퀴 돌리는 소리
그 신음 속 밤의 폐부를 가르는 바람소리
어느 누가 촘촘히 박음질해 이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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