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의 넋이 살아 숨 쉬는 계정숲
경산시에서 자인면까지 가는 가로수 길, 오월이면 이팝나무 꽃잎들이 하얗게 눈송이처럼 휘날리는 길 따라 가다보면 그넷줄 길게 늘여져 있는 자인면 계정숲이 보인다. 초등학교 시절 추석날 동네 느티나무에 맨 그네에서 빨강 갑사치마를 입고 친구와 쌍그네를 타다 떨어진 기억을 떠올리며 한 장군 말 묘가 있는 삼정지(새못)를 끼고 남으로 내려오면 바로 앞엔 오목천이 흐르는 동네가 나온다. 주전자를 들고 냇물 건너 술 심부름 가던 하대를지나 상대 게르마늄 온천이 있다. 당시 경산 자인능금을 최고로 여겼는데 지금은 대부분 복숭아밭으로 바뀌었다.
계정숲은 초등학교 때 소풍을 자주 갔던 곳이지만 자인초등학교 육성회 이사이셨던 아버지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이다. 한 장군 무덤 옆 비석과 재실에 아버지 존함 정우화가 새겨져 있어 늘 살아계시는 듯 하다. 당시에도 면의원 선거가 치열해서 고함과 웅성거리는 소리에 밤에 자다가 깨어 뭔가 불안하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대구문학 아카데미 시창작반 제자들과 계정숲에서 불고기를 구워 먹던 그 때도 이팝나무 흐드러지던 오월이었고, 박정남 시인과 종일 단오제 굿판을 구경하기도 했던 몇 년 전 추억이 새삼스럽다.
계정숲엔 오월이 이팝나무 위에서 파도를 일으키고 그 하얀 물거품들 밀려왔다가 부서지며 술렁이는 저 물결 너머 닿아야할 미지의 땅 그리던 어린 시절의 내 가슴은 아직 콩닥거리고 있다.
2. 까막새 과수원집 셋째 딸
자인면사무소 뒤로 조금 둘러 가면 제석사가 있다. 신라 귀족불교를 대중화한 영원한 자유인 원효대사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원효대사를 회임한 어머니가 밤숲을 지나다가 진통이 있어 밤나무 사이에 치마를 둘러치고 아이를 받았다고 한다. 그 밤숲에 지은 절이 제석사라고 한다. 『삼국유사』에 적어둔 원효대사 탄생지가 바로 여기인지는 모르지만 그 옆으로 조금 걸어가면 자인초등학교가 있다. 계남1리에서 자인초등학교까지 가려면 40여 분은 걸렸다. 학교로 가다가 너무 추워서 논둑에 불 피우던 일, 홍수가 나서 삼정굴 다리 건너다가 떠내려갈 뻔 했던 일, 6,25한국전쟁 지난지 얼마되지 않아 도중에 포탄 터지는 소리와 어디서 비행기 떨어지는 소리, 새못에 누가 자살했다느니 그래서 혼을 건지는 굿을 하는 소리로 무척 불안한 시대였다.
그 당시 마을에서도 외딴 곳인 까막새라는 빨간 양철 지붕 집에서 자랐다. 돌이켜보면 그 과수원은 우리의 작은 성 같은 곳이었다. 대문 입구에는 찔레꽃과 살구나무가 있는 과수원 안으로 언덕이 있고, 그 중간엔 찔레꽃이 피는 원두막이 있었다. 비오는 날은 사과가 투둑, 툭, 떨어지는 소리가들렸다. 여름날에는 수박밭에서 주먹으로 내리쳐서 수박을 깨어먹고, 냇가에서 피리낚시를 하곤 했다.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펄펄 눈 내리는 날, 언덕에서 시집 『수수껍질』을 낸 큰언니(정경자)와 둘째 언니는 짝사랑한다는 남학생의 편지를 읽곤했다. 나는 한숨이나 푹푹 쉬었고, 달 밝은 밤이면 네 자매가 마구간이나 부엌을 돌아다니며 지신 밟는 흉내를 내었다. 겨울엔 계란에 쌀을 넣어 밭에서 밥을 지어 먹거나, 얼음 위에서 지게를 타고 ‘푸른 다뉴브 강의 왈츠’를 흥얼거리기도 하였다. 잔디 태우려 불을 지르다가 눈썹을 태워먹기도 했다.. 과수원 안에 물을 대기 위한 수영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지팡이와 중절모에 망토를 걸친 미남의 멋쟁이셨다. 무엇보다 더덕향이 좋아하시던 친정어머니는 대구시내 있는 효자 외동아들집에도 안 가시고 혼자 「우미인가」를 외우며 고향집을 지키셨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은 다 이승을 뜨셨고, 봄이면 모란과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기와집 마당에는 아버지가 가꾸시던 향나무를 지금은 연로하신 오빠가 깔끔하게 손질하고 계신다.
3. 내 태초의 첫 남자와 낙동강
‟여자는 향기도 가시도 함께 지녀야 한다.”며 찔레꽃 울타리 둘러놓고 헝클어지지 않도록 내 생을 참빗질해 주시던 내 생의 첫 남자’, 사냥총을 멘 아버지 따라나선 아침 산책길, 나는 들꽃 꽃잎에 앉은 이슬을 보며 생각이 참 많았던 소녀였다. 6,25전쟁통에 과수원 주위에 피난민이 모여 들었던 그렇게 어려운 시기였지만 봄이면 화전놀이가 잦았다.
농사철 풍물놀이에 우리 가락이 귀에 익었고 아버지가 사과 팔러 서울 갔다 오실 땐 쓰리꾼 때문에 돈을 온 몸에 둘둘 감고 내려오셨다. 일본으로 사과를 수출도 하셨는데 셋째 딸인 내 이름인 정인숙을 붙여 보내곤 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셨고, 젊은 시절 쌀 팔아 바이올린을 사들고 들어오시다가 할아버지께 혼쭐이 나기도 한 낭만주의자셨다.
나는 훗날 시인이 되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시 「첫 남자」로 풀어보기도 했지만, 밀주인 동동주를 담아 과수원 풀밭에 숨겨두었다가 자인초등학교 선생님들을 집으로 모셔다 대접하기도 하였다. 종종 서커스 단원이 와서 공연을 하면 그 중 줄타기하는 소녀의 눈망울이 아주 컸는데 그 소녀와 닮았다고 “네가 아니냐”고 묻던 선생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백 한 살로 고인이 되신 어머닌 아흔 여섯인데도 글을 쓰고 싶어 하셔서 내가 받아 적은 시가 「낙동강」 연작시이다.
“너거 아부지는 마실에 숨어있고 혼자 아아들 셋 데리고 고 외딴 과수원에서 자는 한 밤중, 총칼 든 빨갱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총구 들이밀며 돈을 요구했지. 그들은 아주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까운 동네 아는 사람이었어. 나중엔 총구 내리며 돈을 요구했지. 얼마 전 홍수에 떠내려간 세간 살 돈인데 이것뿐이라며 그 당시 큰돈이었는데 오백 원 내 놓으니 모두 고맙다며 돌아가더군. 그 이튿날 옆집에 그들이 나타났을 때 주인이 엉덩이 밑에 돈 깔고 앉아 주지 않았더니 불을 질러버렸지. 하는 수 없이 과수원을 버리고 마실로 이사했는데 그 집지킴이 구렁이들이 따라 들어온 걸 삽으로 대가리 몽창 몽창 다 잘라 불에 태워버리더니 그 집이 폭삭 망해버리더라. 난 나중 경찰한테 당당하게 말했어. 돈을 주지 않으면 내가 내 자식이 죽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후유! 까딱 잘못하면 빨갱이 도왔다고 총살당할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운이 좋았지 좋았어.”
근 한 세기를 살아오신 한 여인이 강물처럼 출렁출렁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는 그 말씀 속엔 그 시대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사라호 태풍엔 삼촌이 떠내려가시고 잦은 홍수로 잠자다가 머슴 등에 업혀 피란 가던 일, 귀리들이 바람의 귀에 속삭이느라 서걱거리는 저녁 무렵, 초록 풀 뜯어 먹는 소와 건너편 노을빛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 곳이 조금 변형은 되었지만 그런대로 유지되어 있다는 것이 무척 고마운 일이다. 자갈 갱분엔 가을이면 온통 코스모스 피어 있었는데 냇물 건너편 언덕엔 선머슴애 하나가 종일 앉아 우리 과수원쪽을 바라보면서 누굴 기다리고 있었을까?
4. 신처용가의 근원지
다섯 번째 시집 『유배시편』이 나오기까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내용 중 「처용가」를 패러디한 대구 경상도 방언으로 쓴 첫 시집 연작시 『신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의 모티브도 여기 과수원에서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경북 월성군 양북면, 대왕바위 가까운 곳에 사시는 고모부님 두 분이 자인 과수원으로 자주 놀러 오셨는데 그 분들은 고모님이 불쌍할 정도로 최고의 한량이었다. 바람처럼 한 번씩 오시면 사랑채가 온통 들썩거렸다. 양춤을 춘다고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노래하며 온갖 고향 소식을 들고 오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무척 즐거워하셨다.
<가라히 네히라꼬예?/생사람 잡지 마이소예./달이 휘영청 청승떨고 있지예./밤이 ‘어서! 어서!’ 다구치미 깊어가지예./임카 마시려던 동동주 홀짝홀짝/술삥이 혼자 다 비았지예/용광로 부글부글 끓는데 임이 안오시지예./긴 밤 지쳐 살풋 든 잠,/찔레꽃 꺾어 든 귀공자를 잠시 반긴 거 뿌인데예./웬 생트집예?/셔블 밝은 달 아래서/밤 깊도록 기집 끼고 노닥거린 취기,/의처증 된기라예?/사철 봄바람인 싸나아는 간음 아이고,/외로움에 속 골빙 든 여편네/꿈 한번 살짝 꾼 기 죈가예? 예?>
—「웬 생트집?」 처용아내 1 전문
이제 세 분의 무덤도 처용의 고향 대왕암 가까운 산골짝이어서 자주 만나고 계실까? 그런 추억을 토대로 처용아내의 입장이 되어 대구 경상도 방언으로 쓴 「웬 생트집」, 「휴화산이라예」 등 연작시가 낭송으로, 시극으로 공연이 되고 있다. 김재홍의 『시어사전』에 정숙의 많은 경상도 사투리 시어들이, 그리고 김재홍의 『현대시 100년 한국 명시 감상』에 첫 시집 『신처용가』 중 「웬 생트집」이 게재되어 많이 애용되고 있으니 경산 출신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와 알 수 없는 깊은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시집 나온 지 26년이 지난 지금 새삼 사투리를 모국어라며 보존하려는 목소리 커지고 있어 나로서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5. 먼 곳이란 뜬구름 나무 가지를 자르면서
내게도 먼 곳이 있었던가? 결혼하면 여자는 먼 곳을 다 지워야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시집을 사는 사람이 어찌 접시꽃처럼 시선을 담장 너머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늪에 푸욱 빠져서 얼굴도 몸도 동네 아줌마들과 같이 두리뭉실해지도록 다 버려야한다.
위 아니라 아래만 바라보고 살아 멋진 맏며느리가 되어야 한다는 그것이 나의 먼 곳이고 꿈이었다. 시할머니부터 거의 열한 식구의 가정부도 내보내고 스스로 가정부가 되어 몸빼이에 딸따리 신고 허덕이던 시절 내게 먼 곳을 보여준 이들은 결혼 십년 뒤 들어온 두 동서들이었다. 대학을 나오고 중학교 교사까지 지나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맏며느리로서 더 착실하게 살려고 다짐만 했으니 딸에게 기대 많이 하셨던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진 딸이 큰 눈만 껌벅이는 것을 아시기에 진작 말씀하셨는데 ‟요새는 여자도 누구처럼 좀 거세게 보여야 한다.”고 그래서 아버지, 「첫 남자」란 시에서 <여자는 향기도 가시도 지녀야 한다>란 싯구를 쓰기도 했다.
늦게 깨달은 막막함 속에서 퍼뜩 떠오른 것은 책 속에 먼 곳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았었는지 어릴 때 늘 사상계나 책을 뒤적이며 지내는 내게 아버지가 하신 말씀 ‟딸아, 넌 소설가가 되어라” 그 말씀이 부담이 되어 대학에서 김춘수 교수님과 학보사에서의 원고청탁 등 그런 기회를 일부러 피해 다녔었으니…….
마흔이 넘어 늦게사 그 한 마디가 등불이 되고 내 인생의 길잡이로 먼 곳이 되어 사십대 중반에 늦깎이 시인이 되었다. 오지랖이 넓어, 처용아내를 살린다며 처용가를 패러디한 「신처용가」 연작시를 쓰면서 감히 자신이 처용아내라고 내세우며 시극과 낭송을 하고 다녔으니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구십 년대 말 이미 세상은 여성의 세상이 되었고 IMF로 남자들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남성들을 위로하는 「향피리」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향피리」 연작시는 《현대시학》에 신작 소시집으로 발표되었다.
<여름 소나기, 깊은 밤 연민의 몸부림으로/제 몸을 물어뜯으며 대숲 흔들고 있어요/깨어나셔요, 이제 깨어나셔요/대숲 흔들리면 온 하늘 흔들리지요/오늘도 그대는 마디마디 지른 칸을 밟고/비상할 슬픈 꿈만 꾸고 있나요/오셔요, 어서 오셔요/이 몸 온전한 떨림의 향피리 하나 되어/좁은 그대 가슴 속, 온 누리 울리고 싶어
빈 방 지키는 싸늘한 떨켜 보듬고/땅을 밟으며 다시 뿌리를 뻗어 보시어요>
—「대숲에서(향피리 4)」 전문
돌아보면 결혼 뒤 앞날에 대해 아무 대책 없이 살았던 것이다. 고정관념의 늪에 빠져 살던 내가 자신을 돌아보며 모든 사물에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시집이란 그 늪에 더 깊이 빠져 참을성으로 맏며느리의 길과 시인으로서의 길을 닦아나가겠다는 시 「우포늪에서」를 발표했다. 전국 시인들과 첫 여행지 우포늪에서 낙동강이 왜, 늪이 되었는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우포늪」에서 부분
그 늪의 영혼 속엔 왜 징소리가 들어 있었을까? 샤머니즘적인 징한 그 소리 속엔 얼마나 깊은, 먼 곳이 있었던지 나도 모르게 끌려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육이오동란 등 그 와중에서 가족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주 참봉의 요롱소리와 징 소리 듣고 자랐기 때문인가?
<딸아, 네 몸도 마음도 다 징이니라//한 번 울 때마다 둔탁한 쉰 소리지만 그 날갯죽지엔잠든 귀신도 깨울 수 있는 울림의 흰 그늘이 서려 있단다>
—「흰 소의 울음징채를 찾아」 부분
따지고 보면 모든 사물과 사람이 다 징이고 징채가 아니겠는가? 나 자신이 징이거나 징채가 되어 누군가의 사유를 위해 징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부모는 자녀들에게 오늘도 징채를 휘두르고 있지 않을까?
어느 듯 시할머니와 어른들께서 돌아가시고 갑자기 남편은 공황장애로 눕고 자녀들은 성장했고, 이 가정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징을 치는 곳에서 기도도 하며 책임감과 함께 자연스레 세상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내게 먼 곳은 가정을 편하도록 지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하려면 욕구와 유혹으로 부터 견뎌야하고 인내, 참을성이 가장 가치 있는 덕목으로 보였다. 구태의연하긴 하지만 요즘 세상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인내라는 말이 더 필요한 말인 것 같다. 여기서 필자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신기한 것은 2007년부터 누구의 도움 없이 무작정 시작한 호작질, 채색 한국화로 승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승무는 어머니의 춤, 모무母舞 또는 처용무로 어쨌든 귀신세계의 징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식구들이 두려워해서 종종 놀란다는 사실이다. 가장 화려하고 밝게 하려고 고운 연못을 그렸는데 왜 무당집 벽화 같은 느낌이 나는지, 결국 내 시의 먼 곳은 징한 징소리인가?
<딸아, 아무리 몸부림쳐도 꽃이 피지 않는다/봄날이 오지 않는다 투덜투덜/꽹과리 장구 깨지는 소리 따라다니지 말아라/한 생이 자벌레 키 자가웃도 못되는데/그렇게 헤프게 울거나 웃어 보내면 쓰겠느냐>
—「풋울음 잡다」 부분
6. 풋울음 아닌 재울음을 찾아서
‘풋울음 잡다’라는 뜻은 징을 만들 때 징소리를 은은하게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재울음으로 거듭나도록 담금질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요즘 코로나 19의 창궐로 자가 격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대화도 놀이도 혼자 해야 하는 시간이 많으므로 성격이 충동적이어서는 살아남기가 어렵다. 오직 참을성으로 혼자 노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어른들이 늘 입에 달고 살던 “참아라, 참아야하느니라.” 그 잔소리가 진정 필요한 시기가 아니겠는가? 혼자 놀다보니 자꾸 옛날 일들을 소환해서 놀기도 한다.
<거친 숨소리/사층 발코니의 무더위 견디느라/쟈스민은 정신없이 펌프질하고 있다/물을 끌어올리려면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삽 십 년 시집살이가 냉큼 뛰어 들어간다/삼덕동 백서른 평 마당 씻느라/엉덩이 실룩이는 처용아내/이불호청 두드려대는 다듬이 방망이가/사랑의 매라며 변명한다/마당에 고인 물에 깃털 다듬는 참새들/모든 추억들 불러 모아도 소식이 없다/곧 콸콸 쏟아질 널 기다리며/코로나 19, 자가 격리 하 세월의/무료를 부어 다시 펌프질한다/마스크도 버리고 참새처럼 재잘대는/그 날을 위해>
—「펌프질하다」(대구 빙하기 22) 전문
시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쓴 시는 숨겨진 나의 속마음이 익어 태어난 자식 같아서 어떻게든 예쁜 옷을 입히고 가르쳐서 독자들에게 알려지고 인정을 받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래서 첫 시집 『신처용가』 같은 경우는 특히 대구 경상도 사투리로 되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 낭송을 하고 시극도 하여 이십 년 넘게 ‛봄밤이라예, 휴화산이라예’, ‘처용아내 정숙’ 등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도록 살아 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감개무량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다른 시들도 쓸 때 여러 번 낭독하면서 이왕이면 낭송하기 좋도록 시를 쓰기도 한다. 물론 힙합을 하는 팝핀 현준의 의자춤에서 눈물 흘리며 쓴 「인생 1」처럼 아포리즘 같은 짧은 시도 많지만
<의자 하나 끌고 가려다/의자에 끌려 다닌다//어린 엉덩이조차 제대로 걸칠 수 없는/작은 의자//평생 마음 편히 앉아보지 못한 채/끌려가는//한 생애>
—「인생 1」 전문
그냥 공허한 시간을 메꾸기 위해 승무를 변형해서 처용무를 그리고 있다. 사실 처용아내의 또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춤인데 고 문인수 시인이 처용무라고 고집을 부리신다. 천 아트(패브릭 아트)도 복지관 강의에서 시와 천 아트 강의를 같이 하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되어 심심풀이로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무신, 손수건, 옷, 모자 어디 틈만 있으면 호작질하고 있다. 어찌 보면 필자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시안》에 발표했던 「숯」이란 시는 필자도 모르게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수록되기도 했으니, 그리고 또 그 부분의 만화가 전국 체인점(삼초 삽삼겹살) 식당마다 걸려 처음으로 저작료를 받는 시가 되었다.
삼십년 시집살이 한 사람이라 잠시라도 가만히 있는 것이 불안하다. 시집 살았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지만 어느 시인이 거침없이 “시집이 부자니까 시집을 살았지.”하는 말에 아연실색하기도 했다. 몇 년 전까지 유일한 탈출구였던 피겨스케이트를 그만 두었으니 암 투병을 핑계로 꽃구경 다니며 사진 촬영하는 것이 또 즐겁다. 암환자가 너무 씩씩하니까 보험금 받으려고 나이롱환자라는 소문까지 날 정도지만 실제로 항암주사 열네 번에 방사선 치료 스물다섯 번이라 요양병원에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았다. 올 해가 오년 째이니 마지막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편 할리 없다. 그리고 올해 초파일이 바보 같은 필자를 도와주려 애쓰던 남편마저 세상을 하직했으니 늘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불안하고 조급하다. 그래서 호작질하듯 시를 쓰고 무작정 그려야 한다.
7. 한 차원 더 높은 세계, 도배장이를 위해
한 이십년 넘게 시를 가르치면서 얻은 결론은 시는 체험을 여러 가지 형태로 묘사하면서 뭔가 깨달음을 주어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시들은 체험을 재생적 상상력으로 묘사하여 안정되긴 하지만 시적인 긴장미나 신선감이 없고 어떤 시들은 너무 과다한 상상력으로 감각적이고 서구적인 묘사에만 치중해서 공감이나 감동 없이 마무리 되는 시들이 많다. 이런 시점에서 필자는 신선한 연상상상력과 창조적 상상력으로 누구와도 닮지 않은 정숙만의 시를 쓰고 싶다. 그래서 늘 직관력 훈련과 이미지, 그리고 사유의 폭을 넓히려 노력하고 있다. 깨달음이나 감동을 주려면 사유가 깊어야 한다.
《대구문화» 피플에서 남지민 기자와의 인터뷰 글 내용에서 참 자세하게 정숙을 표현하고 있어 한 부분을 올려본다.
시媤집살이가 시집詩集을 낳다. 그의 표현대로 ‘이를 갈고 삽질을 깊게 하며 삼천포로 빠지면서’ 시에 매달리게 된 것은 결혼 후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큰 집을 혼자 닦고 쓸며 삼시세끼 밥을 차렸고, 한 달에 한 번 꼴로 4대 조상 제사를 지내며 15년을 보내고 난 후였다.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이웃과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 손에 이끌려 대구문학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시어른을 봉양하면서 눈치 봐가며 틈틈이 배우러 다닌 글쓰기는 꿀맛에 비할 수 없는 달콤함과 자유, 희열을 느꼈다. 경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국어교사로 근무했던 그가 펜을 놓고 살았던 세월은 휴화산의 시기였다. 잠자던 글 화산은 그 시간만큼 농익은 활화산이 되어 끓어 넘쳤다.
한 세상 산다는 것은 무수히 짓밟히고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일인데 그 수많은 아픔과 슬픔, 좌절과 시련 속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홀로 몸부림치며 스스로 자학하다가 어떤 이는 자살로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폭의 수묵화처럼 용서하고 자책하면서 그 고통을 끌어안고 시로 승화시켜 새로운 세상 얻으려 꿈꾸는 이들이 바로 시인이기도 하다. 물론 그 노력 끝에도 절망과 좌절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꿈이란 끈 하나 잡고 살아가는 일 그 자체가 시인들에겐 큰 선물이고 상이 아닌가?
그러나 운명적으로 신 내림 굿 받은 시인은 괴롭다. 모든 미물들까지 제 한 풀어달라고 손을 내미니까 마음은 약해 한번 잡은 손 떨쳐버릴 수 없고 아예 그들의 아픈 얘기를 화두삼아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한다. 그 시어가 너덜너덜 헤질 때까지 풋울음 잡기 위해 징을 치며 파헤치며 물어뜯는 습성을 버릴 수 없어 작품 전체가 거의 연작시이다. 시란 변덕이 심해서 그런지 ‘시는 사람이다’ 말 끝나기도 전 벌써 ‘아니다 시는 짐승이다’라는 생각에 물리게 된다. 그런 곰 같은 미련으로 신처용가라는 연작시를 소설 쓰는 기분으로 쓰고 그것을 극본으로 시극을 연출하고, 공연하기도 하는 것이다. 연꽃이란 사물 하나만으로 시집 한 권을 엮을 수 있도록 그 진흙탕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는 미련 곰탱이는 어릴 때부터 제 별명이니 억울하지도 않다. 꾀가 없어 수족이 괴롭긴 하지만 요즘은 그림물감에 빠져가며 그렇게 쉬엄쉬엄 산을 오르고 있는 중. 참된 징 잡이가 되어 빨리 산 정상에 올라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면 꽃도 바로 보이고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그 때부터 긴장이 무너져 살맛이 조금 사라지지 않을까?
실없는 걱정까지 하면서 그 어설픈 신기神氣 든 징수의 눈은 매서운 눈매로 무엇 하나 놓치지 않도록 관찰해야하며 시비를 걸어 뭔가 발견하고 깨달아야한다는 사명감으로 골목을 지키고 서 있다. 솔직히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연인, 있어요』 시집을 일곱 권이나 펴냈어도 아직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 사유의 깊이가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정신적 기둥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 그 심화된 내면이 남에게 천대받지 않게 모시 두루마기 자존심 구겨지지 않도록 빠닥빠닥 풀 먹여 밤새 다듬이질하고 바람의 방향 따라 순응하기보다 매 순간 반역을 꿈꾸다 남의 눈총에 지쳐 쓰러질지라도 물결 거슬러 올라가는 길 찾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노파심은 내 시의 해학과 반발심이 오히려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인지라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진지하게 생명 근원의 길 찾아가려한다.
들꽃 속 천근만근의 허무와 고독 그 깨달음의 깊이를 찾아내도록 직관력의 삽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내 시도 그림도 시간을 붙잡기 위한 호작질이지만 처용무가 누굴 위해 기도하는지 처용아내의 내연남은 누구인지 그들의 외간 현장을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요즘은 시집 내기가 힘이 든다. 상을 받겠다고 한껏 신경 쓰는 후배들에게 눈치 보여서 새로 나온 시집을 감추고 싶기도 하고 쓰레기가 될 것 같아 여러 시인들에게 시집 발송조차 잘 하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세상이, 사람이 참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좋다. 거의 친절하고 너무 고마운 분들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네를 타고 하늘로 발길질 하다가 내려올 땐 소리 내어 웃는다. 웃음도 상대방을 위한 보시라며 환한 웃음으로 벽을 칠하는 도배장이가 된다.
□ 해설
생의 전략으로서의 시 쓰기
- 정숙 시집, 『연인, 있어요』
이구락
2020년 새해 벽두에 정숙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연인, 있어요』가 나왔다. 초판 발행일이 1월 20일이다. 『건달바』(현대불교문인협회 대구경북지회) 편집진이 금년도 발행시집 목록에서 빠뜨릴 정도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시기다. 이처럼 연말이나 연초 같은 해바뀜의 어수선한 시기는 문학 서적 출판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뒤늦게 필자에게 서평 의뢰가 왔고, 정 시인도 뒤늦게 부랴부랴 책을 부쳐왔다. 필자 또한 연말 여러 일거리가 엉켜 뭉그적거리다 원고마감 1주일 남기고 본격적으로 읽어나갔다. 뜻밖에 기대 이상으로 잘 읽혀, 올해 읽은 시집으로는 ‘베스트 10’으로 꼽고 싶다. 울퉁불퉁 결이 고르지 못한 시편들이 이번 시집에서는 많이 정제되고 있고, 시인으로서 절정기를 맞이한 원숙미까지 여러 시편에서 느낄 수 있어 시 읽기의 즐거움을 오래 누릴 수 있어 한없이 즐거웠다.
1. 생의 전략으로서의 시 쓰기
시집을 끝까지 읽고 난 첫 느낌은 시에 대한 시인의 맹목적인 몰입과 시인으로서의 무한한 자긍심이 이토록 강렬할 줄 몰랐다는 점이다. 이런 정서는 주로 등단 초기 한 10년 정도의 젊은 시인에게서 느껴지는 풋풋한 감정인데, 고희를 넘기고도 시인은 이 설레는 감정이 조금도 빛을 잃지 않고 있어 무척 신기하고도 부러웠다.
비교적 늦깎이로 등단하였지만, 등단 28년 만에 신작시집 7권, 시선집 2권, 영상시집, 전자시집 등을 발간하고, 시운동으로는 수많은 시극 연출 및 공연과 여러 곳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시 강의, 그리고 문학단체의 회장직을 맡는 등 활동반경이 넓고도 다채롭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그의 부단한 시 쓰기와 시운동은 가히 폭발적이다. 이러한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라는 의문이 문득 든다. 나름 짐작건대 이는 늦은 등단에 대한 분풀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을 뿌리치고 시인이 되어 문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휴화산처럼 조용히 속으로만 들끓던 끼가 활화산이 되어 분출되면서 폭발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용히 한 여성으로서 현모양처의 삶을 살던 정숙이라는 여인이 어느 날 생의 전략으로서 시 쓰기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추진력과 열정은 시에 대한 그의 몰입과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일 것이다. 한 번도 슬럼프를 겪지 않은 부단한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래의 시편들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ⅰ) 사랑하는 이들 사이 애증과 / 꽃과 꽃가시 사이 / 해맑은 웃음과 눈물 사이 / 모든 틈새에 벽지를 발라 위장해야 한다며 / 없는 벽, 쌓기도 하는 난 허술하고도 / 시시한 시, 도배장이 (「도배장이」 부분)
ⅱ) 시인은 / 날개 없이도 날아오를 수 있다는 걸 / 사유라는 날개는 하늘 끝까지 / 아니 그 뒤안길까지 / 하루 몇 번씩이라도 날아갈 수 있다는 걸 / 알면서 또 애써 날개를 펼쳐보는 것이다 (「날치」 부분)
ⅲ) 시인이란, 반구대 바람내장 안 누드로 숨어 있는 선사시대의 향유고래 축제와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과 사랑의 아우성까지 귀담아 잘 읽어내야 한다. (「울산 반구대 암각을 읽다」 부분)
ⅳ) 이슬 같은 여자, 푼수 같은 여자 / 애교 많은 여자, 가슴 큰 여자, 못 말리는 여자, / 솔직하면서 인색하지 않은 여자 / 눈물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여자, /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늘 행복해하는 여자 / 쪼다 같은 여자, 그래서 귀여운 여자 (「밀서와 검은 비닐 봉다리」 부분)
ⅴ) 옛 향촌거리 녹향에서 처용아내 강의를 하고 / 시낭송을 가르친다니! / 시간은 냉정히 떠나가면서도 내게 기회를 주었다 // ... / 찻집 고우에서 / 북 콘서트를 응원하는 함석지붕 봄비소리 / 창 넘어 경상공원의 / 왕벚 꽃송이들 짙은 분홍빛 가운으로 / 봄밤을 기다리고 있다 (「향촌연화 2」 부분)
자신을 “시시한 시, 도배장이”로 명명하는 시인은 “내 날개짓은 /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 그냥 혼자 악다구니였다는 것을 / 그 힘으로 잠시 튀어 올랐을 뿐이라고 / 빛이라는 덫에 딱 걸리기 좋은 / 바보!”(「날치」)라고 인식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사유라는 날개를 하늘 끝까지 / 아니 그 뒤안길까지 /하루 몇 번씩이라도 날아갈 수 있다는” 시인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 또 “시인이란, 반구대 바람내장 안 누드로 숨어 있는 선사시대의 향유고래 축제와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과 사랑의 아우성까지 귀담아 잘 읽어내야 한다”고 다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인용시 ⅴ)는 ‘향촌동’이라는 지역의 문화공간을 배경으로 ‘처용아내’(자신에 대한 지칭으로 자주 써온 말)에 대한 강의와 시낭송 그리고 북 콘서트를 하는 소회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또 인용시 ⅳ)에서는 형식적으로는 ‘정수기, 그 여자 시인’에 대한 부러움과 연민을 얘기하고 있지만, 필자에게는 “정수기, 그 여자 시인”이 바로 정숙 시인 자신으로 읽히고 있다. 인용 부분 바로 다음 구절이 “지상에서 가장 죄 없는 여자일까[?]”라는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 눈에는 정숙 시인이야말로 결례를 무릅쓰고 일컬으면 ‘이슬’ ‘푼수’ ‘애교’ ‘가슴 큰’ ‘못 말리는’ ‘솔직하면서도 인색하지 않은’ ‘눈물’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불행한’ 그러나 ‘늘 행복해하는’ ‘쪼다’ ‘귀여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자기감정을 꾸미지 않고, 내숭 떨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는 여장부 같은 이런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라 더욱 보기 좋다. 인용시 1을 좀더 꼼꼼이 읽어보자. “거대한 산”이란 어느 평론가가 보낸 “비밀글(밀서)”은 <정수기, 그 여자 시인>이란 시였으며, 3연에서 마지막 행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세상을 몰라 너무 바보 같다는 밀서의 내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정수기’라는 말도 정숙 시인을 ‘정숙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구어체 애칭일 것이라고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는 시류에 따르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자책하면서, “시든 모란송이처럼 부시리 웃고만 있”는 스스로를 솔직히 드러내고 있는 시니컬한 자기 풍자시이리라.
문득 괴테가 파우스트의 입을 빌려 말한,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올림포스를 안정시켜 신들을 살게 하겠는가?”라는 말이 떠오른다.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사명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정숙은 그걸 또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는 행복한 시인이다.
2. ‘연인 있어요!’와 ‘연인 있어요?’ 사이
열정적인 붉은 표지와 표지보다 더 강렬한 제목이 주는 충격이 너무나 자극적이다. 먼저 이 정도로 붉은색은 어떻게 선택되는지 궁금하여(물론 시인이 아니라 출판사가 선정했겠지만) 구글 검색으로 확인해보니, rose(#E2252B)가 가장 붉고 옆에는 candy(D21502)가 아래에는 red(#D0312D)가 있다. 그러니까 시집 표지색은 현실에서는 재현이 거의 불가능한 로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지기까지 하고, 눈의 피로도 또한 가장 높다. 다음으로는 시집을 열어 ‘차례’에서 표제시가 있는 36면으로 직행했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전문을 통독했다. 첫 느낌이 시원하게 잘 읽힌다는 점과 역시 정숙 시인답게, 솔직하고 절절해 소리 내어 다시 한번 읊조려 보게 만든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이요
선물인 그
천사들이 털갈이하는 겨울
깃털들이 얼어 하얗게 나부끼며 내려올 때
단풍잎이 시나브로 지며
시간의 잔해들을 수북이 쌓을 때
이른 봄 청매화 그림자에 밟혀 심연이 흔들리는
그 순간마다 창 아래서 숨죽인 휘파람으로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한다
많은 이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선율로
자두나무 애간장까지 끓이다가, 창을 넘어 들어와
서로의 체온으로 시린 몸을 녹이기도 했으니
숙명이란 탯줄로 꽁꽁 묶인 사이
은밀한 색 밝히려면 귀한 접시를 깨뜨리고
지엄한 닻줄 다 끊어버려야 한다
찬란한 그늘이면서 고질적인
내 색의 골짜기에 숨겨둔 내연남, 그는
담쟁이가 미루나무 등걸에 살며시 발을 걸치는 때
느티나무가 달빛으로 옷 갈아입는 시간
또는 초승달이 서해로 안기는 그 순간에도
시시로 찾아와 달콤하거나 쓰리거나
뭔가 속삭여주길 나는 애태운다
그 품엔 늘 투창이 이를 갈고 있지만
- 「연인, 있어요」 전문
서걱거리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이 끌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이내 ‘연인, 있어요?’인 줄 알았더니, ‘연인, 있어요!’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삶의 고비마다 찾아오는 ‘?’가 생의 깨달음의 순간인 ‘!’가 되는 사이, 정숙의 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싱싱하게 꽃을 피운다. 자신에 대한 무한긍정인 동시에 만천하에 공개하는 자기 자랑이다. 이 당당함이야말로 정숙 시의 큰 특징이고, 앞뒤 재지 않는 이 당당함은 독자에게는 정숙 시가 주는 카타르시스로 자리 잡는다.
화자의 연인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이요 / 선물”이면서, 또한 “찬란한 그늘이면서 고질병인 / 내 색의 골짜기에 숨겨둔 내연남”이다. 그래서 그는 “그 품엔 늘 투창이 이를 갈고 있”는 위험한 존재이지만 생의 어느 순간에서도 “시시로 찾아와 달콤하거나 쓰리거나 / 뭔가 속삭여주길 나는 애태운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삶은 절대로 나태하거나 지루할 수 없다. 아니 늘 긴장되고 밀도 높은 만족감을 수반하리라. “창 아래서 숨죽인 휘파람으로 /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하”는 연인이 있는 화자의 삶은 이토록 당당하고 행복하다.
<글루미 선데이>를 인터넷에서 찾아 애잔한 피아노 선율로 들어본다. 악마의 유혹 또는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저주받은 곡이라는 해설을 읽으며, 그럴수록 더욱 빠져드는 치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시인으로서, 한 여자로서 정숙이라는 시인의 삶을 관류해온 이 당당한 ‘사랑’이야말로 정숙 시의 정수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계속 <글루미 선데이>를 들었다. 오래된 LP판처럼 이 시 또한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오래 주위를 맴돈다.
“어느 소설가는 자기가 돼지처럼 느껴질 때 / 시를 읽는다고 했다 / 난 돼지가 되기 싫어 시를 쓴다 / 미적지근한 내 안을 더듬어 본다 / 어디를, 무얼 찔러야 하는지 샅샅이 뒤진다 / 더듬다보니 명색이 예술가라며 / 먼 허공 옆구리만 주무르고 있는 그림이 잡힌다”(「까르페디엠」 부분)
이러한 각성을 거쳐 이 시집에서 절창으로 꼽고 싶은 「윤필암에서」에 이른다.
암자 마당에서 하얀 옷고름 입에 물고
그윽한 눈망울엔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수양매화
누굴 기다렸는가?
햇살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온몸 축축 늘어뜨리면서
먼 산 사방불 찾아 올라가니
부처님은 차가운 몸만 남겨두시고, 어디서
매향에 취한 솔바람을
쫓아내듯 날려 보내고 계시는구나!
- 「윤필암에서」 전문
그렇다. 이러한 각성과 깨달음은 거저 찾아오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의 경륜과 삶의 어려운 고비를 헤쳐 나온 경험 그리고 사물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견에서 비로소 찾아온다. 문경 산북면 사불산 대승사의 부속암자 윤필암은 비구니 선원이다. 경내 제일 위쪽에 불상이 없는 사불전이 단정히 앉아 윤필암 여러 당우를 지그시 내려다보기도 하고, 마주보이는 산봉우리 위 사불암(四佛岩)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그 사불전 가파른 돌계단 입구에 수양매 두 그루가 나란히 서서 봄이면 하얀 꽃을 소담하게 피워 꽃공양을 드리고 있다. 부처님께 올리는 6가지 공양물 중 으뜸이 꽃이며, 한 송이 꽃은 인고의 수행을 이겨내는 보살의 모습이기도 하다. 당연히 시인의 눈엔 단순한 매화나무가 아니라 무엇을 상징하는 모습이었으리라. 그래서 시인은 애써 땀 흘리며 맞은편 사불산 정상에 올라 사면석불을 친견한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에 마모가 심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모습에서 오히려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일반 신도들처럼 사불전에서 창밖으로 사면불을 쳐다보며 예배만 올렸더라면,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겪으며 눈길을 깊게 다듬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르지 못했을 이 깨달음이 참으로 귀하게 다가온다. “부처님은 차가운 몸만 남겨두시고, 어디서 // 매향에 취한 솔바람을 / 쫓아내듯 날려 보내고 계시는구나!”라는 이 시의 마무리는 독자에게도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시인이 수양매화와 사방불을 재해석해서 ‘부처님이 매향을 흩뿌리느라 출타한 것’이라고 짐짓 우리에게 일러주고 나니, 비로소 윤필암과 얼굴이 지워진 부처님이 있는 이 신비로운 불교적 공간은 새롭게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시인의 붓이 필력을 얻어 신바람을 내고 있다. 시인 정숙의 시 쓰기의 즐거움이 여기에 이르렀고, 독자들도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주는 시 읽기의 즐거움에 흠뻑 젖어들 수 있어 행복하다.
3. 사탕 맛 빛깔 또는 눈시울 빛의 석양
이제 시인으로서 정숙류의 개성적인 어법이 느껴지는 대목을 짚어본다. “~한 것을 이제 알겠다”는 말투가 빈번히 눈에 띄는 점이다. 이 구문적 특징이 자칫 상투어구로 굳어질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한 시인으로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석양이 붉을 수밖에 없는 이유, 이제 알겠다
강산이 한 일곱 번 바뀌고 나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하루가 한평생인 해도 지친 것이다
얼마나 지쳤으면 술 몇 모금 닿지 않아도
취해서 말없이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 「석양이 붉은 이유」 부분
“석양이 붉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놀랍게도 “하루가 한평생인 해도 지친 것”이기 때문이요, “얼마나 지쳤으면 술 몇 모금 닿지 않아도 / 취해서 말없이 사라지고 싶은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을까. 자연과 인간의 삶을 꿰뚫는 이 놀라운 깨달음은 당연히 오랜 고난을 겪으면서 사려 깊게 축적해온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더 직접적인 이유는 인간인 화자도 자연도 더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지쳤기 때문이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뀌고 나니” 비로소 이걸 깨달을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이전까지의 삶의 쓰라린 경험들은 남들도 다 하는 것이라서, 아니면 뼈아프게 느낄 여유조차 없는 신산한 여자로서의 삶에 너무 휘둘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미학적 깨달음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시인으로서 정숙이라는 한 여인은 “강산이 한 일곱 번 바뀌고 나니” 찾아든 이 깨달음이 이토록 소중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또 임종을 앞둔 암 환자가 느꼈을 마음을 시인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떠나는 이의 입에 물려주는 / 마지막 사탕 맛 빛깔 아닐까 / 마약으로, 가는 길 황홀해지기를 원하는 / 가족의 마지막 배려 뒤 / 휘휘한 고독, 그 눈시울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을 붉게 잔치 벌이면서 꽹과리 치면서 / 저 붉게 타오르는 석양”은 “백세까지 정신 맑게 산” 어머니의 등가물이 되어, 죽음이 마지막 생의 축제로 승화되는 극적 장면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슬픔을 오래 견딘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이 깨달음은 가물가물 익어, ‘사탕 맛 빛깔’과 ‘휘휘한 고독, 그 눈시울 빛’이라는 황홀하고 오묘한, 생의 마지막 깨달음의 빛깔이 되어, 독자에게도 황홀한 경험으로 남는다. 시인 정숙이 창조해낸 ‘사탕 맛 빛깔’과 ‘눈시울 빛’만으로도 우리는 『연인, 있어요』를 오래 기억해야 한다.
파전, 배추 전을 차례로 부치면서
조상님께 투덜거리듯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쯧, 혀를 찬다
쪽파들은 콧대를 세우며 일어선다
몸이 뜨거울수록 지, 지, 지
날 욕하는지 더욱 소란스럽다
밀가루 한 국자 끼얹는다
더 새파래지는 자존심 꾹, 누른다
그 순간 탁, 무릎을 친다
밀가루와 파 그리고 불과 기름이 어울리는 것처럼
서먹한 동서 간 서로 뜨겁게 스며들면서
정이 깊어지라고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던가
결혼 근 사십 년 지나 이제
맛깔스런 우리네 한 생을 느긋하게 바라본다
- 「전을 부치는 이유」 전문
제목까지 닮아있는 이 시를 「석양이 붉은 이유」 옆에 나란히 놓아본다. 건강한 생활이 길어 올린 이 시는 별로 덧붙일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읽히며 감동을 준다. “탁, 무릎을 친다”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던가” 등 시가 될 것 같지 않은 구절까지도 잘 녹아들고 있다.
연장선상에서 3부의 꽃을 다룬 시편들에서도 사물의 형상화와 선 굵은 주제의 설득력이 한껏 무르익은 솜씨로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갈대(「풍장」, 꽃무릇(「비포장도로에서」, 연꽃(「연꽃」), 달구비슬꽃(「닭 벼슬 꽃 수다」), 자라풀(「자라풀」), 봉선화(「봉선화 꽃탑」), 홍매(「흑매 1」, 수양매화(「윤필암에서」) 등을 통해 사물에 대한 남다른 관찰력과 개성적 안목의 걸출함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4. 맺으면서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예술적 창조는 미메시스의 형태이다. 즉 '이데아의 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이 창조한 형태이며, 인간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지각하는 구체적인 사물들은 이 이상적인 형태가 그림자와 같이 어렴풋이 재현된 것이다.(다음백과) 그리고 깨달음은 무엇을 구하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이라는 덕일 스님의 법문(『발로 생각하지 말고 머리로 걷지 마라』, 작은숲, 2012)이 문득 떠오른다. 절정기의 한 여류시인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시편들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재현물’이며, ‘진정한 자기’의 꽃피움이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 『연인, 있어요』는 정숙 시인이 구가하는 행복한 화양연화의 시절을 담고 있다.
놀라워라!
넌 오늘도 내 생의 하늘을 밀어 올리고
허공을 번쩍 들어
세상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하는구나
- 「눈꺼풀」 전문
한여름 대낮에
관능경을 펼치고 있는
저, 환희불
- 「연꽃 6」 전문
갈대는 가을이 되면 누구에게, 왜 유언하는가
껍질뿐인 한 생애였다며
해껏 지치고 젖은 마음의 흰 뼈
늦가을 까치놀에 바싹거리도록 말려달라고
바람은 갈대들의 서걱거리는 소리로
새들도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소네트를 완성하여
강가에 내건다
이처럼 삶은 깨끗하게 말려 비우는 거라며
- 「풍장」 전문
조각가가 돌을 다듬어 생명을 불어넣듯 삶의 깨달음을 ‘시’라는 장르에 새겨넣는 이러한 골똘한 절차탁마 중에 우연히 또는 불쑥 튀어나온 절창들을 축하의 의미로 마지막에 배치하며 이 글을 끝낸다. (♣)
약력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대구시인협회장 역임/ 대구시문화상, 대구시협상/ 시집 『서쪽 마을의 불빛』, 『그 해 가을』, 『꽃댕강나무』, 시선집 『와선』, 문집 『길 위의 시간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