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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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5    업데이트: 19-05-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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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때로는 친구처럼 2014-02-05 영남일보
정하해 | 조회 802


 

시장 모퉁이 난전이었다. 시장 안의 번듯한 가게와 달리 거기 앉아 채소와 과일 등을 그녀는 팔았다. 고사리와 도라지 등 제수 장만에 필요한 것을 팔고 있어, 나는 기일이 오면 늘 거기서 장을 봤다. 체질이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 외에는 마트를 잘 가지 않는 관계로 전통시장을 자주 찾는 편인데, 그녀는 당일 팔 채소를 도매시장에서 떼와 다 팔면 다음 날 또 싱싱한 채소를 가져다 놓아, 언제나 좋은 채소가 있었다.

난전에서 물건을 살 때 나는 절대 뒤적이지 않으며 깎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녀는 덤을 많이 준다. 그것이 고마워서 겨울에는 펄펄 끓는 어묵을 한 대접씩 사주기도 하고 김밥도 건네줬다. 처음에 그녀는 엄청 놀라워하면서 다시 또 팔던 감자와 풋고추를 담아 주려고 했다. 그런 관계가 멀리 이사를 와서도 이어지고 있다. 어쩌다 그 부근에서 모임이 있는 날은 꼭 그녀에게서 채소를 사고 대신 어묵을 사준다. 그러기를 햇수로 벌써 18년째가 된다.

하지만 지금껏 그녀의 나이를 모른다. 짐작하건대 한 팔십은 되었을 것 같다. 굽은 허리 하며 어눌한 몸짓 하며 어디 사는지 자녀는 몇인지 나는 모른다. 어느 해는 몇 달이나 보이지 않다가 다시 난전에 앉았을 때 물어보면, 다쳐서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나뭇잎처럼 노랗게 늙어가는 그녀가 대단해 보이기까지 하다.

누구나 그런 자리에 앉아 세상을 올려다보면 때로는 짜증도 나고, 때로는 퉁명스러워질 때가 있을 텐데, 그녀는 한결같이 웃는 표정이다. 가만히 보면 누구에게나 넉넉하게 채소를 주는데 더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저것 아래위 다 뒤섞어 놓는 사람들, 그런 실랑이를 묵묵히 견디는 그녀도 이제 많이 늙어 정말 꼬부랑 할머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관계가 있다. 격이 맞는 사람만 원하는 관계가 있고, 또한 엇비슷한 연배를 원하는 관계도 있다. 하지만 살다보면 이렇게 맺어지는 인연의 존엄도 있다. 그네들은 삶을 항상 돌아보게 하고, 나를 건사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하찮게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이일지라도 가만히 좀 더 다가가 보면 내게는 없는 넉넉한 무엇이 보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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