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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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5    업데이트: 19-05-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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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 대구 골목에서 꽃피운 예술의 숨소리를 찾아서 - 시도 뉴스레터
정하해 | 조회 1,041

여행스케치 > 대구 골목에서 꽃피운 예술의 숨소리를 찾아서

글 정하해 (시인)




예술은 흔히 창조라고들 한다. 그 창조를 하기에는 시대적인 정서와 그 시대를 끌고 가는 이야기가 있다. 산과 그리고 붓끝으로 획을 그은 듯 흘러가는 이름 난 강물 등의 곳곳의 지역을 대표하는 명품구경거리가 우리나라에는 숱하게 많다. 그러나 그 시대의 생활상인 삶이 그대로 녹아 삭아가는 근대적인 그때의 문화와 역사가 살아있는 골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구, 경북에는 명승지와 고찰들이 너무도 많지만 이미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몇 번씩은 가 보았던 그런 곳이기도 하여서 나는, 대구의 중구관할에 속하는 근대로의 여행, 이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구의 중구는 옛날에는 융숭한 중앙통이었다. 서점과 문인예술인들이 드나들던 술집 그리고 식당가, 이런 것들이 다른 도시에서도 그랬듯, 그 당시에는 대구를 끌고 가는 낭만적인 상징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품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이러한 것들은 점점 죽어가는 구차한 골목과 비루한 건물들로 하여 발길은 멀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 시대를 끌었던 독특한 문화와 골목들의 상점, 그리고 고택들, 대구의 정체성을 말하던 것들을 사실상 버린다는 것의 안타까움으로 중구청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그 당시의 골목을 그대로 들어내는 문화를 발굴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그 결과 지금은 전국적인 명소가 되어 2012년에는 6만여 명이 다녀갈 정도가 되었다.

 

골목투어는 전부 5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다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것들이어서 여기서 나는 2코스인 근대문화골목을 중심으로 쓰고자 한다. 여기에는 한 시대를 살아갔던 인물과 역사적인 사건들이 우리의 해이해진 마음을 붙들어 매어 주는 것과 동시에 공감의 폭을 넓혀 함께 체험하는 시대의 유산으로 하여 각자의 마음에 스토리텔링이 되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 2코스의 시작은 동산(東山)이다. 동산은 위치상으로는 서산(西山)이지만 당시 달성토성은 대구의 중심이었고 거기서 볼 때는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동산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그 동산에 청라언덕이 있다. 박태준의 동무생각에 나오는 노랫말 중에 청라언덕이 여기다. 본래 청라는 푸를 靑에 담쟁이 蘿를 써서 “푸른 담쟁이넝쿨”이란 뜻이다.

대구가 고향인 박태준은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청라언덕 인근의 계성학교를 다녔으며 당시 계성학교의 아담스관과 언덕에 위치한 동산의료원 선교사 주택은 담쟁이넝쿨로 휘감겨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경관이 아름다워 대구의 몽마르트로 불리고 있으며, 동무생각은 청라언덕을 배경으로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모티브였다고 한다. 박태준은 그 청라언덕에서 인근의 신명여학교 유인경을 만나 짝사랑을 하게 되었고 훗날, 그 사연을 이은상에게 들려줌으로 해서 즉석에서 만든 노래가 동무생각이라고 하니, 얼마나 순애보적인 멋진 노래인가.

 

그리고 90계단길이라는 3·1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곳으로 걷는다. 1919년 대구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은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대구고보, 성경학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짖던 특징이 있다고 한다. 당시 언덕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했으며, 이 숲은 일본경찰을 피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 우거진 숲을 일본경찰 몰래 빠져 나온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지금의 시장인 대구서문시장 입구에서 만세 운동을 하였으며, 그것을 발화점으로 대구시민들에게 순식간에 소용돌이치는 불을 지폈다고 한다. 그때의 만세행렬은 지게꾼과 농민, 양복사, 잡화상, 구둣방, 머슴, 기생까지 동참했다고 한다. 1km가 넘는 만세행렬로 하여 일본경찰은 크게 당황하였으며 무차별적인 살육을 저질렀다고도 했다. 이것이 경북전역에 들불처럼 일어났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우리가 편하게 사는 조국이 누구의 덕인지,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은 계산성당 앞 큰 길을 건너 제일 교회 담장 옆에 90계단이 있으며 동산의료원 뒤편 신명학교에는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기르기 위해 신명 3·1일 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또한 계성학교 아담스관 앞에도 이날의 뜻을 기리는 3·1 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공부의 노예가 된 학생들뿐이지 않는가· 나라를 먼저 걱정하는 그런 일은 공부라는 거대한 지식의 노동에 전부를 저당 잡혀버린 학생이 그저 골목에 넘쳐날 뿐이다. 그리고 발길은 다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저 민족의 시인 이상화 고택을 향한다.

 

굳이 여기서 밝히지 않아도 이상화 시인의 약력과 정신적인 사상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그의 시대적인 아픔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왜놈들이 판치는 세상 시(詩)로 저항하다 간 민족의 시인, 이상화. 1926년 『개벽』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대구 수성들이 배경이라고 한다. 수성들은 골목투어가 있는 중구에서는 좀 떨어진 변두리이다. 그 당시 들판이었지만 신도시 개발로 하여 바로 대구의 상권이 가장 활발하고 요지인 수성못과 들안길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수성못에 그의 시비(詩碑)가 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금강송가” “역천” “이별”과 같은 저항시를 발표했다. 시인이자 사상의 비판가이던 그의 비평 도구는 바로 시였다.

 

중구 계산동 2가에 있는 이상화 고택은 시인이 말년에 머물렀던 집이다. 이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943년 4월 25일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렀기에 의미는 더 깊다. 이상화가 태어난 곳은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로 알려져 있다. 고택은 안채, 사랑채, 마당과 장독대로 이루어진 목조주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던 감나무는 그 자리, 지금도 서 있다.

 

이상화 고택이 온전히 보존된 것은 시민들의 힘이 컸었다. 2011년 당시 도로계획에 따라 허물이지는 것을 곧바로 이상화 고택의 보존을 위한 서명운동이 일어나 시민 50만 명이 서명운동에 동참해 성금 8,600만 원으로 조성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가 있다. 대구의 문학인들과 문화계 인사들 등으로 하여 상임대표가 발족이 되고, 유족과 문인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2008년 8월 12일에 시민들에게 개방을 하였다. 윤순영 중구청장에 의하여 이상화 고택은 근대골목 투어의 주요 거점인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지역 문화운동에 횃불을 당기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해마다 상화문학제가 전국적 행사로 시낭송과 더불어 열리며, 지역 문학인들의 자부심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여기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던 서상돈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상돈은 지물행상과 포목상을 운영해 상당한 돈을 모은 인물이다. 1903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된다. 시찰관은 정부의 검세관으로 세금을 미리 대납하고 나중에 세금을 거두는 역할이다. 그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력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채보상운동이 최초로 대구에서 일어난 일은 그의 직업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그들의 야욕을 채우는 일에 쓰고자 했고, 일제의 강압으로 거금을 빚지게 된 대한제국은 점점 갚을 능력이 없게 되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주권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났다. 서상돈은 국민이 담배를 끊어 국채 1,300만 원을 갚자는 제의를 하여, 처음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가 서상돈의 고택을 봐야 하는 일은 그에 대한 예의가 될 것 같아서 권장하는 것이다. 서상돈의 고택은 만석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박하고 청빈한 태가 묻어났다. 시대적인 괴리가 불현듯 생기는 순간이다. 나라가 먼저였던 그들의 삶과 내가 우선인 지금의 우리네 삶이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현실이 어쩌면 생활에 대한 겸손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이상화, 서상돈 의 고택 옆에는 근대문화 체험관인 ‘계산예가’가 조성되어 있다. 2012년 4월에 개관한 계산예가는 대구의 근대적인 관광상품인 “도심골목투어” 활성화를 위해 지어졌다. 특히 이상화, 서상돈 고택 등 다양한 도심의 근대역사문화시설과 관광객들이 한 눈에 볼 수 있는 영상관 등을 비롯해 한옥 전시실 및 편의시설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정보와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 영상관에서는 누구나 이상화, 서상돈 고택, 3·1 운동길, 청라언덕, 계산성당, 전국적인 한약소비를 주도했던 약령시 등 골목투어 중 만난 문학적 공간을 영상으로 다시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이 밖에도 한국문단의 주류인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과 근대 음악의 기틀을 놓아준 박태준, 현재명, 권태호, 근대미술가인 서동진, 근대미술의 거장 이인성, 월북화가 이쾌대 등 수 많은 예술가를 영상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조금 쉬었다면, 제2코스의 열 번째 해당하는 진골목으로 들어가 보자.

 

진골목의 진은, 경상도 말로 “길다” 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재의 골목은 100m 남짓하다. 진골목 초기는 달성서씨 부자들이 살았던 곳으로 대구의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 형제들이 모여 살았으며,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이렇게 진골목에 살았었다고 한다. 지금 그 터에는 종로숯불갈비, 진골목식당, 보리밥식당, 정소아과 등 그때의 실물을 고스란히 보존하므로 해서 붉은 벽돌담이 풍기는 분위기를 우리는 직접 느끼고, 스토리를 재구성해 보는 생각도 가지게 만든다.

 

그리고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을 보는 것으로 여행의 막바지에 다다른다. 작가 김원일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월북하여 대구로 건너왔다. 1967년 현대문학에 장편 “어둠의 축제”가 당선되어 등단하면서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1988년 계간 『문학과 사회』에 “마당 깊은 집”인 그의 자전적 소설을 발표하면서 어린 길남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상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의 내용인 대구의 종로와 진골목을 끼고, 주인이 사는 위채와 아래채 길남이네와 다섯 가구가 등 붙인 오밀조밀한 기와집, 그 “마당 깊은 집”은 대구 중구 남성로 35-3번지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곳은 동재국한약방과 세화주차장 사이에 있는 골목의 칼국시집만 있어, 소설 속의 길남이가 가족들과 살기 위해서는 어떤 행상으로도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서러운 이야기를 침묵한 골목에게 들어야 하는 마음 또한 숙연해져 온몸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었게 만든다. 또한 솜씨 좋은 어머니들은 길남 어머니처럼 기생 옷가지들을 만들어 집안을 먹여 살리는 가장도 했을 것이다.

이 골목 투어가 주는 느림의 여유, 그리고 나태한 지금의 정신을 호통치고 난 뒤의 다독거림, 나는 고맙게도 근대를 책임지고 살아간 저들과의 비록 늦은 소통이나마 소중한 유산을 체험했다는 것에 무한한 여운의 감동 그것을 품은 채 대구 근대로의 여행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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