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장 흥미 있는 과목이 영어였다. 마치 빨래집게같이 생긴 자가 에이(A)였고 사다리 같은 자가 에이치(H)였다. 알파벳을 쓰고 읽고 대문자 소문자를 배워 나갔다. 어려운 과정에 올라갈수록 대학생에게 배웠다. 국사나 국어는 혼자서도 달달 외우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마을 최초로 비료 포대에 있는 영어나 밀가루 포대에 있는 영어를 읽고 해설하는 사람이 되었다.
방학이 되면 읍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친구와 함께 공부를 하였다. 친구는 나의 실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학교에 편입해도 장학생이 될 거라고 극찬을 하였다. 마을 사랑방에서도 나는 꽤나 인기가 있었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듣는 것보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과 영화배우들의 이야기, 삼국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강의록으로 중고등 과정을 이수할 무렵 대학생은 검정고시를 보라고 권하였다. 나는 반대를 하였다. 죽을 때까지 학문을 계속하고 책을 읽는다고 하였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실력의 문서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내면의 실력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 말에 더 이상 검정고시를 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구산서당 훈장 어른이 우리 집에 오셨다. "자네가 학문을 숭상한다는 소문을 들었네. 내 밑에 와서 한학을 공부하게나!" "감사합니다. 학채 낼 쌀이 없어서…!" 내가 머뭇거리자 훈장 어른은 무상으로 가르쳐준다고 하셨다. 밤에 서당에 불을 때 주고 무상으로 배우라고 하셨다. 가족들도 허락을 하여 한학을 배우게 되었다. 한학은 신학문보다 더 깊고 심오하여 끝이 없었다. 신학문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이면 되지만 한학은 수십 년 동안을 배워도 끝이 없는 학문이다. 고승들이 산사에서 수십 년, 평생을 공부하는 경우도 있다. 천자문처럼 처음에는 글자 자체를 배우지만 차차 명심보감 사자소학 대학 중용 맹자 논어 사서삼경 주역까지 끝이 없다. 서양 학문은 과학을 위주로 공부하지만, 한학은 철학 분야로 깊고도 심오하다.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는 한학을 통달하여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서당에 나가 불 당번을 하고 한학을 배웠다. 2년 동안 한학을 배우고 있으니 책들을 읽고 싶어 안달이 났다. 훈장 선생님께 절을 올리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서울 가서 돈을 벌어서 책을 많이 읽고 세상 견문을 넓히고 꿈을 이루겠다고 하직 인사를 올렸다.
어깨가 넓어지는 열아홉 살에 서울행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을 하였다. 넓은 서울시내를 배회하다 변두리에 숙식 제공이라고 써 붙인 조그만 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낮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쉬는 날에는 청계천 헌책방에 나가 책을 사다 날랐다. 온갖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배고픈 농부가 누렇게 익은 곡식을 보는 것 같았다. 흥미진진한 소설책을 비롯하여 백과사전 명언집 위인전을 돌아가면서 읽고 또 읽었다.
신체검사를 받고 입영 영장이 나왔다. 훈련받는 기간과 졸병 때 책을 읽지 못하여 가장 고통스러웠다. 다행히 나는 육군공병학교에 배치가 되었다. 학교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공병학교는 불도저를 비롯하여 크레인 구 레이더를 비롯하여 발전기 등 각종 중장비들이 다 있었다. 70일간 엔진학과 실습을 배웠다. 강의시간에 교관님이 조그만 책을 가지고 강의를 하였다. 나는 손을 들고 제안을 하였다. 큰 궤도를 만들어 교육하면 피교육생도 좋고 교육관도 교육에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을 하였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글씨 잘 쓰는 병사 한 명과 그림 잘 그리는 병사가 뽑혔다. 나는 그림을 잘 그려 그날부터 궤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각종 중장비를 그리고 설명서를 써서 멀리서도 보고 쓰기 쉽게 만들었다. 교장 ○○○ 장군이 시찰하다 보시고 칭찬을 하셨다. 나와 글씨를 썼던 동기는 큰 상을 받았다. 금으로 도금된 만년필과 새 군화 한 켤레, 군복을 선물로 받고 특별휴가도 받았다.
제대를 하고 국방부에서 주최하는 호국문예에 이 내용을 써서 당선이 되었다. 좋은 소식이 이어졌다. 국방부에서 내 작품으로 홍보영화를 제작한다고 연락이 왔다. 허락 사인을 하고 고료도 듬뿍 받았다. 나와 아내까지도 영화에 주인공으로 소개되고 출연료까지 받았다. 책을 좋아하고 글쟁이가 되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 있어 아내는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꺼리는 편이었다.
나는 제대 후 중장비 기사를 하였다. 전국 공사 현장을 다니면서도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신동아나 월간지를 구독하였고 신문도 여러 가지를 구독하며 지식을 쌓았다. 중동 붐이 일어 사우디아라비아에 2년간 취업을 하였다. 운 좋게도 바닷가에서 항만 공사를 하였다. 더 좋은 것은 근로자들을 위한 조그마한 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2년간 그곳에 있는 책들을 모두 읽었다. 나의 별명은 걸어다니는 이야기꾼, 만물박사 두 가지나 되었다.
한 방을 8명이 사용하였는데 항상 우리 방은 근로자들로 붐볐다. 내가 노총각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었는데 귀국하여 결혼을 하였다. 이런 일이 소문이 나자 연애편지를 부탁하려는 총각들이 알코올 없는 맥주를 사들고 찾아와 매달렸다. 또 삼국지 이야기나 뱀 장사 개그를 보여달라고 모였다. 추석 때 근로자 노래자랑에서 내가 사회를 보며 뱀 장사 흉내를 내 수천 명 근로자들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도로포장이었다. 적자만 보던 포장공사를 내가 제안을 하여 흑자로 전환시켰다. 1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 소장님이 연장 근무를 사정하여 1년을 더 일하다 귀국하였다. 나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꼼꼼하게 기록을 하였다. 귀국 후 노동부에서 주최하는 근로자 수기에 당선이 되었다. MBC-TV에서 단막극으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하였다.
◆역경 끝에 열매가 열리다
나비는 애벌레로 7년을 지내야 비로소 나비가 된다고 한다. 열네 살 나무꾼 소년의 꿈이 열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간지 D일보 기자가 찾아왔다. 나에 대하여 어디에서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의 독학과 독서에 매달려 살아온 이야기들을 취재해갔다. 다음 날 D일보에 독서왕이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며칠 후 K신문에서 취재를 나왔다. 뒤이어 ○○여성 월간지에서 취재를 나오고 마침내 공영방송 KBS-TV에서 방송 출연을 제안받았다. 아나운서 황인용 씨가 진행하는 '이것이 인생이다!' 프로에 독서왕으로 출연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장작 장사를 하여 책을 사고 지금까지 수만 권(?)의 책을 읽어 만물박사 칭호를 받은 사람이라며 아역배우를 출연시켜 배경 설명을 하고 토크쇼로 40분간 방영이 되었다. 500여 통의 연애편지로 사장의 누이동생과 결혼한 이야기. 개그맨을 능가하는 유머러스한 내 언변에 방청석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방송이 나가고 우리 집 전화기는 끝없이 울렸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친인척, 지인들의 격려 전화였다. 기업체에서 자수성가한 회장님들이 비서를 보내와 초대를 하였다. 호텔에서 회장님들과 식사를 하며 금일봉도 받았다. 사원교육도 청탁받고 여기저기 컨설팅업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고향 처가에서 비로소 알아주어 기뻤다. 장인어른이 직접 전화를 걸어 칭찬을 해주신 것이다. "앗따 우리 홍 서방이 대단허네. 시방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네그려!"
그 후로도 '나의 사랑 나의 가족' '도전 구두쇠왕' '임성훈입니다' '일요초대석' 방송 프로에 출연을 하였다. 그때마다 고향 마을과 처가 동네 마을회관 마이크로 방송을 하여 기를 살려주었다. 나는 마침내 '보람컨설팅'이라는 산업강사 회사에 부원장으로 취업을 하였다. 주로 기업체. 군부대. 대학원, 청소년단체에 초대를 받아 강의를 나갔다. 보릿고개 시절 장작 장사를 하며 힘들었던 이야기와 좌절하여 자살을 시도했던 이야기를 할 때면 나도 울고 청중들도 눈물을 닦았다. 아이디어를 제안하여 공병학교 교육에 도움을 주고 수십억원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켰던 이야기를 할 때는 박수가 쏟아졌다.
<9월 12일 자는 2017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최우수상작인 홍원주 씨의 '나무꾼 강사가 되다④'가 게재됩니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전국 언론사 최초로 매일신문이 제정해 운영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문학상 공모전입니다. 당선작 발표일(매년 7월 7일) 기준, 만 65세 이상이며, 미등단 및 등단 10년 이하인 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공모 부문은 논픽션(200자 원고지 100매 이상), 시(7편 이상), 수필(5편 이상) 등 3부문이며, 작품 주제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2018년도 매일시니어문학상은 2018년 5월 초순 모집공고를 내고, 6월 초순 마감하며, 7월 7일 매일신문 창간기념호에 당선작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매일신문은 시니어문학상을 통해 선배 세대의 지난했던 삶을 기리는 한편, 문학작품을 통해 선후배 세대가 공감과 감동의 폭을 넓혀 함께 더 나은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가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