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꿈꾸다, ‘황금빛 태양을 품은’
간결-절제의 꽃이 화려-우아의 자개 도자기 품에서 천진난만 웃고 있었다. 마치 아이를 포근히 껴안은 어머니처럼, 해맑은 꽃이 세상의 가장 따스한 구석에 안겨 깔깔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글자 ‘호’(好) 자처럼, 자개 도자기라는 모성[女]이 꽃이라는 여린 새로운 생명[子]을 편안히 품고 있었다. 이제까지 작가의 애틋한 무언의 이야기는 이랬다.
그런데 이제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새로운 변신일까. 황금빛 자개 도자기만 남고, 꽃은 떠났다. 아니 항아리도 떠나고 차츰 달만 남을 듯하다. 일렁이는 달빛 같은 자개의 흰 깃털도 황금색 피부로 둔갑했다. 대담 솔직한 작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애당초 꽃은 자개 도자기의 화신(化身)이었다. 작가가 품은, 지상에는 없는 추상-절대의 그리움을 잠시 구상-구체화한 것이었다. 이제 작가는 과감하게 꽃을, 다시 자개 도자기마저 지우고, 황금색을 입히려한다. 이래서 끝내 황금색 달만 남겨놓을 듯하다. 작가는 고백한다. 자개 항아리는 달의 화신이었고, 꽃은 달 속의 옥토끼였다고! 털빛이 하얀 토끼가 황금 달빛 속에 숨자, 달은 홀로 생명 활동을 시작했다. 이제 달은 태양마저 품어 스스로 태양이 되려 한다.
달의 변신, 지상의 모든 감정을 담다
달 항아리의 표면은 자개 도자기이지만 작가는 생멸과 감정을 부여한다. 태양은 고정되어 변모가 없다. 그러나 달은 반달, 눈썹달, 보름달처럼 생리가 있다. 달은 태양에 수반되어 은은히 빛을 반사한다.
달의 완성은 곧 몰락을 은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완성을 향해간다. 상촌 신흠이 ‘월도천휴여본질’(月到千虧餘本質)이라 했듯, 천 번 만 번 이지러지나 그 둥근 형식은 여전히 살아남아 항아리같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달은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는다. 태양에 수반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그려낸 항아리 달은 스스로 생동하는 태양처럼 빛난다. 달 항아리는 ‘항아리 달’로, 다시 ‘해를 품은 달’로 유동한다.
작가는 낱낱의 자개에다 일일이 생명을 부여한다. 거친 듯한 역동적 황금빛 숨결은 이리저리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어서 태고의 신화와 천상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차분하고 냉정한 이성과 조화의 지상세계로도 안내해준다. 모두 달의 ‘날숨=호, 들숨=흡’의 표현이다. 작가는 생명의 현실인 ‘숨’을 빛과 그늘이라는 질감으로 우아하게 ‘결’로서 붙들어낸다.
달, ‘나’라는 희망과 애달픔이라는 물음
보르헤스는 ‘달’이란 시에서 말했다. “날마다 길모퉁이 바로 돌아,/달이 하늘에 솟아 있었네.//나는 아네./달 혹은 <달>이라는 단어는/여럿이고 하나인 기묘한 존재….”
하늘의 달은 하나이나 사실 여럿이다. 월인천강(月印千江), 하나의 달이 이 강 저 강에 수 없이 비치듯이. 강 만이 아니다. 호수에도 바다에도, 그리고 나와 너의 마음속에도 언제나 떠 있다. 어쩌면 ‘달’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개념화 한 것이리라. 중요한 것은 작가의 ‘달 항아리’=‘항아리 달’ 속에서도 달은 뜨고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해를 품은 달’로 스스로 해가 되어 세상을 비추려는 희망의 서사인 것이다. 그러나 달이 해가 되는 순간 지상의 이야기는 천상으로 향한다. 늘 이곳이 아니라 저곳을 향하는 인간의 얄궂은 시선을 작가는 놓치지 않고 붙든다. 영원한 존재가 되고 싶은 꿈. 생멸하는 무상의 세계를 영원의 시간 속으로 되돌려 놓는 일에 작가는 매진한다.
끝내 작가의 달은 태양과 동의어가 된다. 황금빛 자락을 세상에 드리고픈 저 하늘의 달과 그리고 ‘달’이라는 개념(언어) 사이에서 서성이는 삶은 무엇일까?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