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에 눈꽃사진 촬영하러 갔다가 갑작스런 교통사고에 놀란 일 며칠 되지 않았기에 그냥 하늘나라로 출장 갔다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그의 귀천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
국어교사 정년퇴임 후 혼자 사진 찍으며 여행 다니기를 즐긴 그였기에 무뚝뚝해서 재미상도 별로 없는 후배라고 단정 지었었지만, 지난 해 가을 몇몇 시인들과 밀양 쪽에서 낙동강 일몰을 보며 같이 식사한 일이 마지막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올 봄날 또 같이 여행하자고 약속 했었는데 혼자 그렇게 멀리 떠나 가버리다니! 교사로 충실하고 가장으로 본분 지키느라 참 충실히 살았던 후배시인이라 딱딱한 사람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아들 장가보내기 전 얼마나 초조했으면 바보 같은 필자한테 며느리 될 사람 소개시켜 달라고 했겠는가? 그 때 그 간절한 모습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제 시의 길도 찾았고 다행히 아들 스스로 짝을 찾았다고 자랑스러워하며 기뻐하더니...... 이제 진정한 자신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안타깝기만 하다.
1986년 [서쪽 마을의 불빛]을 첫 시집으로 활동한 고 이구락 시인은 경북대학교 문리과 대학 국어국문학과 69학번이고 필자는 66학번이다. 70년 봄에 졸업하고 바로 교사로 일했으니 만날 일도 없었지만 그 동기가 이동순 시인, 민경탁 시인이다. 이동순 시인은 일찍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이념이 강하여 별로 교류가 없었고 ‘친구야, 생과 사의 중앙선을 왜 그리 급히 넘어갔느냐’고 조시를 쓴 민경탁 시인의 말에 의하면 고 이구락 시인과 두 사람은 소설을 썼다고 한다. 1972년 학맥 제 2집에 소설 [이장기]를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정호승시인과 대륜중학교 동기이기도 하여 오행시집 출판기념회는 정호승 문학관에서 시 콘서트를 열기도 했었다.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의 시들이 좀 긴장감이 없고 산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네 번째 시집이 ‘오행시’라는 시집이라 정말 반가웠다. 우리나라 이십년 넘은 디카시의 역사를 보면 비록 시집에 사진은 없지만 한국시사에서 아주 새로운 장르란 말은 좀 그렇고, 이 시인은 첫 시도부터 20여 년 노력과 산고의 고통을 오행시에 바쳤다고 하니 혼자 자신만의 시의 길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뇌하고 조심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오행시는 다섯줄로, 시조보다는 조금 긴 듯하고, 간결하다. 그래서 시 한편마다 집중력과 긴장미가 있어 감동을 주고 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낸다. 다음 이구락 시인의 말과 산문으로 시인을 더 자세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오행시는 오랫동안 서랍 속에 쌓여 홀로 낡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세상으로 흘려보내 자유롭게 떠돌게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떠돌다 어느 언덕 가시덤불에 걸려 다시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홀로 반짝이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별처럼
그곳에 잠들어 좋은 거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시냇가의 돌멩이를 쓰다듬는 물처럼, 무심히 떠돌다 문득문득 멈춰 서서 오래 생각에 잠기는 바람처럼,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닿은 나의 노래여. 이제 가을 추수처럼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이면서, 비로소 장르 개념에 도전하려는 첫 시도의 무모함이여. 그저 땀 흘리는 이웃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짐짓 먼 데 바라보며 슬쩍 내어주는 한 뼘의 그늘이기를 꿈꾼다.
----시인의 산문
다음은 토현 이구락 시인의 오행시를 해설한 후배 손진은 시인의 글 부분도 올려본다.
이런 와중에 이구락이 오행시편을 들고 나왔다. 수록시만 80편,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구락의 5행시는 기존의 정형시와 구별되는 점이 있다.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점은 한 행의 길이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시상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밀고 당길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적인 개성과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긴장감과 여운을 주어 시의 역동성도 살린다. 이외에도 그의 5행시는 복잡하지 않은 구조, 자기 호흡을 실은 개성적인 문체, 흔들리지 않는 정연한 초점을 그 특징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시적 여백이 몇 가지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 이는 애매성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가지는 것으로 미지의 영역을 거느리는 향가의 미학을 닮았다. 또 시의 전개상으로는 기승전결의 원리를 원용한다는 점에서 한시와 맥이 닿아 있다. 다만 5행이라서 언어의 운신이 더 자유롭고 주제성을 강화하기도 더 편하다는 이점이 있다. 시인은 주로 다섯째 행만 고정시켜 놓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풀어놓아 ‘승’이나 ‘전’을 2행으로 하거나, 드물게는 ‘기’를 2행으로 늘여놓고 전개하는 시도를 한다.
― 손진은(시인)
오행시는 스님들이 깨달음의 본질과 존재의 근본을 간결하면서 강렬하게 표현하는 悟道頌 오도송 같은 느낌을 준다. 생전, 시인이 필자의 ‘연인, 있어요’ 시집 중 [윤필 암에서] 짧은 시를 절창이라고 추켜세우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기도 하다. 이구락 시인의 시 몇 편 찾아 읽으며 간절한 그의 구도적 정신을 되새겨보면서 그리움을 달래보기로 한다. 읽을수록 시편들이 감각적이고 세밀한 표현이라 스승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이론을 벗어나 이미지가 확실하고 선명하다는 점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겨울 산이 울면 눈이 내린다
겨울 산에 눈 내리면 밤이 길다
긴 겨울밤 눈에 갇혀 산사(山寺)는 열반에 들고
풍경 홀로 얼지 않고 밤새도록 염불 왼다
달빛이 눈 위에다 그걸 받아쓰고 있다
― 「달빛 경전」 전문
달팽이뒷간 매화나무
밤똥 누는 어린 아들 지키는 어머니 같은
하얗게 꽃핀 매화나무 한 그루
병산서원 달팽이뒷간 옆에 환하게 서 있다
아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가끔 나지막하게 말 걸 때마다
달빛 받아 아이 뺨처럼 하얗게 질린 낙화 몇 닢도
모자 옆에 와 나란히 눕는다
남은 달빛 쓸어 담아 만대루 누마루도 함께 하얘진다
초저녁 병산 그리매 아직도 강 다 건너지 못하고
꽃내*에 잠겨 밤새도록 바장이고,
서원 지붕들 위 수많은 기왓골 타고 철철 흘러내린 달빛도
모두 담장 밖 달팽이뒷간으로 모여든다
매향 대신 어머니 젖내 풍기며
병산서원 달팽이뒷간 지키는 저 백매를 위하여
밤마다 보름달이 떴으면 참 좋겠다
달 없는 그믐에는, 가까이 다가온 강물 소리
점점 또렷해질 때마다
정신을 벼리는 묵향으로 번졌으면 더욱 좋겠다
* 낙동강이 병산으로 흘러들어, 동류서출(東流西出)하며 하회(河回) 마을 앞 부용대를 돌아나갈 때까지를 ‘화천(花川)’ 또는 ‘꽃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가파른 언덕배기마다 우우우 몰려나와 아우성치던 매화
눈 덮인 지리산 흰 머리채 잡아당기더니
냅다 시린 강물에 패대기치며, 제 힘에 겨워 함께 뒹구는
이월의 마지막 날 대낮이렷다
부르르 몸 떨며, 어질어질 꽃멀미 하는, 저 섬진강
___<매화꽃멀미> 전문
불끄고 누우니 옆방에서 코 고는 소리 들려온다
오래 듣고 있다 문득, 옆방에는 지금 사람이 없다는 게 생
각났다
다시 들으니 풀벌레 소리다
찌르르르 찌르로르, 뀌뚤귀뚤, 찔리라리 찔리리리, 찌찌찌찌
풀벌레는 내 가슴에다 소리 탑 쌓고 있었다
__<난청, 소리의 탑> 전문
오랑캐꽃 톡! 불거져 나온 봄날 아침
산책길 쪼그려 앉아 가만히 들여다본다
오래 잊고 있었지만 지워지진 않았던,
한 점 흰 그늘로 남아 있는, 낡은 그리움 하나
아, 참 잘도 보인다
___<봄날의 아다지오> 전문
요즘 시인들이 사물을 낯설게 하고 이미지화하는데 집중하다보니 산만하고 사설이 길어지는 작품에 감동을 느낄 수 없어 뭔가 아쉽다는 얘길 많이 듣는 현실에, 도서출판 문예바다가 이구락 시인의 시선집『낮은 위쪽, 물같이』에서 시집 해설을 간단명료하면서 짧게 쓴 글이 시인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것 같아 시인의 말과 함께 올려본다.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구락 시인은 자연을 지향함으로써 삶의 목적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하는 감각주의자다. 시인은 일상에서 만나는 풍경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 풍경 속에는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세속적이지도 지나치게 이념적이지도 않은 현실적인 삶의 근원이 숨어 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낮은 곳을 향해 걷는 구도자의 모습이 겹쳐진다.
왜 시를 쓰는가.
아니, 왜 서정시만 쓰는가.
세상을 향해 발설하는, 미처 숨길 수 없었던 그리움과
살아가는 일의 부끄러움 때문이다.
혼자 부르는 사랑 노래이지만
이 땅의 가난한 마음을 잠시라도 데우는
곁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 「시인의 말」
2025, 3, 시 전문잡지 [시인]에 발표한 이 구 락 시인의 마지막 작품
[밤똥, 달빛이불] 중 [밤똥]을 올려본다. 나이 든 분들에겐 너무 친근한 장면들이어서 진정성이 보인다. 그동안 함축적인 짧은 시 쓰느라 졸였던 시심이 푸근하게 풀려 정겨워서 이구락 시인이 더 그리워진다. 이젠 불국토에서 시 활동을 더 열심히 할 것이라 기대해본다.
밤똥
변소는 왜 그렇게 멀었던지,
뽀얗게 서리내린 마당 가로질러
참고 참던 아픈 배 비우고
살금살금 안방문 몰래 열 때,
잠귀밝은 아버지 나지막한 목소리
사랑방에서 조용히 마루를 건너왔다
달구새끼도 아니고, 사람이 우애 자다가 똥 누러가노?
닭장에 가서 세 번 절하고 온나1
초저녁 과식한 고구마 냄새 풍기며
닭장 앞에서 꾸벅꾸벅 절할 때
휘영청 열나흘 달님 빙그레 웃으시며 내려다 보았다
사람이 너무 과묵하고 올곧아서 친구들과도 별로 교류가 없었고 혼자 수석을 찾으러 다니거나 사진촬영을 하느라 사교성이 없어 막상 동기들 간에도 섭섭한 점이 많았다고 그 동기가 전해주는 말이다. 시인 사회에서도 그래서 참 인정머리 없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어찌 보면 시인은 봉투 들고 전국 시 행사를 찾아다니거나 하지 않았고 여성시인과 스캔들도 없는 그야말로 외로운 구도자로서의 한 생이라 생각하니 새삼 존경스런 후배라 칭찬하고 싶다. 그 외 자세한 얘긴 의성 동향인 이태수 시인이 더 자세하게 알려줄 것 같다.
끝으로 고 이구락 시인의 정년퇴임 기념문집에 필자의 축시가 들어 있어 진짜 서툰 시이긴 하지만 반가워서 올려본다.
축시 2013년 9월
하늘 높이를 재는 시간
ㅡ정 숙
이구락 시인님!/ 새장에서 풀려나온/ 새,/처음은 고개 갸웃거리며/넓은 세상 살아갈 길 막막하지만/ 곧 창공을 박차고 날아오르며/자신이 얼마나 좁고/낮은 곳에 갇혀서/숨 막혔던지
깨닫게 되겠지요/ 늦은 자유, 맘껏 즐기며/아름다운 시와 사랑을 찾아/하늘 높이와 깊이를 재며/마음껏 훨훨 날아오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