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움’과 ‘지음’의 공시성
젊은 예술가 강석호는 구도자의 길을 가고 있는 장인이다. 화려한 미학적, 이론적 포장에 기대어 작업 대신 말을 앞세우지도, 타고난 손재주와 얄팍한 잔꾀만 믿고 고민과 성찰 없이 작품들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늘 신중하고 심각하다. 그렇다고 이성적 절제를 강조하거나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칠 만큼 세세한 것들에까지 마음을 쓰며 자신의 손과 몸을 수고롭게 하는, 시류와 ‘트렌드’에 맞지 않는 작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우직한 예술가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어느 공방을 이끄는 ‘마에스트로’를 떠올리게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헌들을 뒤적이다 보면 ‘di sua mano’라는 표현이 적잖이 눈에 띄는데 “그 자신의 손으로 직접”이라는 뜻이다.
큰 규모의 제단화, 특히 엄청난 시간과 정성, 노동을 요구하는 프레스코화의 주문서에 포함되곤 하는 조항인데 작품의 주요 부분들만큼은 제작을 맡은 공방의 ‘마에스트로’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려야만 한다고 강조, 강제하는 것이다. 똑 같은 것을 그린다 하더라도 ‘마에스트로’의 내공과 예술혼이 담긴 붓질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믿음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다양한 기기와 매체의 개발로 예술의 양상이 판이하게 바뀌어 버린 오늘날에도 ‘di sua mano’로 상징되는 예술적 가치들을 중시하고 르네상스적 작업 윤리와 마인드를 고수하고 있는 이가 바로 강석호 작가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남의 손을 빌어 작업하고 있다. 스스로를 ‘상대적 절대자’로 규정짓고 산에서 채집해 온 흰개미들을 책과 함께 플라스틱 상자 안에 넣어 두고 그 작은 세상의 모습을 지켜보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di sua mano’라는 조항을 달아 흰개미들에게 [Trans-Society]라는 작업을 의뢰한 셈이니 파격이고 반전이다. 대체 어떤 의도에서 이런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걸까. 사회를 뜻하는 ‘society’에 ‘횡단’, ‘초월’, ‘변화’, ‘이전’ 등을 의미하는 접두사 ‘trans’를 연결시켜 만든 신조어 ‘trans-society’를 통해 드러내려는 것은 무얼까.
책은 그 자체로서 다중적인 trans-society이다. 인간의 지적 소산인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들과 그 단어들이 인쇄된 종이의 집합, 즉 지적, 언어적, 물리적 요소들로 이뤄진 society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을 실어 놓은 도록 역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빚어낸 또 다른 다중적 trans-society이다. 그런데 책, 또는 도록이라는 다중적 trans-society는 그것을 갉아먹으면서 길을 내고 집을 짓는 흰개미들에 의해 생물학적 society의 일부가 되는 동시에 본래의 의미와 기능, 존재의 가치가 변질되고 변화된, 이를 테면 새로운 ‘초월적’ trans-society가 된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든, 무엇을 예상했든 그대로 진행될 가능성은 희박한, 흰개미들의 본능적 삶의 의지가 개입될 수 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점 또한 초월적이다. 어쩌면라는 작업이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을 개연성까지 내다보고 작업을 구상한 작가의 아이디어 자체가 초월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흰개미들이 자의적으로 만들고 있는 자목적적, 초월적 trans-society가 이 ‘개념미술적 시도’를 통해 작가가 구현하고자 한 궁극의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결과물로서의 trans-society, 혹은 trans-society라는 개념 자체를 위한 시도였고 실험이었다면 작업을 마무리했어도 벌써 했을 것이다. ‘개념미술’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은 개념이 아니던가.
흰개미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고 거기에서 어떤 느낌을 받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개념을 반영하는 도식적 installation의 우연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Trans-Society]를 선보이는 두 번째 전시를 앞두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무언가를 더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무언가 더 보고 싶기 때문인 듯싶다. 목표한 ‘완성도’가 있을 리 없는, 아니 어쩌면 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영원한 non-finito 작업에 매달리고 작가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선문답 같은 답이 돌아왔다. 정성 들여 빚은 도자기를 가마 안에 넣고 좋은 작품이 되길 염원하는 도공의 마음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노라고. 개념미술적 언어로 해석할 수도 있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런 미학적, 개념적 틀 너머에 있는, 예술이란 초월적인 것이라는 곰팡내 나는 케케묵은 신념을 붙들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결과, 결과물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어떤 언명의 체계로도 규명하기 어렵고, 어떤 논리학적, 철학적 설명으로도 완전히 해석할 수 없는 창조와 예술에의 의지. 이것이 실재함을 흰개미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Trans-Society]라는 작업의 목표이자 실존적 의미가 아닐까.
책은 하나의 세상, 작은 문명이다. 그런 책을 먹어 들어가는 흰개미들의 행위는 문명파괴이다. 켜켜이 쌓인 삶의 흔적들로 이뤄진 역사를 지우는 vandalism이고 iconoclasm이다. 하지만 해체이고 파괴인 것만은 아니다. 자기들의 흔적을 남기며 자기들의 세상, 문명을 짓는 또 하나의 창조이다. 통시적 인과 관계의 고리를 끊고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지움’과 ‘지음’을 공시적으로 엮는 transformation이다. 이성적 해석과 논리적 판단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이기도 하고 이성적이지도 않고 감성적이지도 않은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절대적인 창작의지의 발현이고 그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리글(Alois Riegl)이 ‘예술의지(kunstwollen)’라는 개념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실재하지만 증명하기는 힘든 그 무엇에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작업에 담기를 그토록 염원했던 divine spark – 신의 피조물, 특히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神性)의 반짝임 – 으로 대변되는 그 무엇이 존재함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그 ‘반짝임’이고 kunstwollen이기에 미리 구상해 놓은 최종 결과물도 작업이 도달해야 할 완성도도 없다.
도자기에 빛을 내는 것은 불이다. 하지만 도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신의 선물, 즉 불을 다루는 도공의 의지이다. 얼만큼 기다리고 어느 순간 꺼내야 할지를 결정하는 도공의 자발적 의지가 비록 덜 구워진 도자기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완전한 작품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전시되는 일곱 점의 사진들은 [Trans-Society] 작업의 기록인 동시에 작가의 kunstwollen으로 완성한 완전한 non-finito 작품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Trans-Society #4-1]의 ‘영(永)’자가 눈에 띈다. 영원을 뜻하는 글자, 그것도 영원한 명필 왕희지가 쓴 글자가 얼만큼 지워져 있다. 끝없이 흐르는 시간이란 개념으로서의 영원이 지워진 셈이다. 대신 그 위에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정의한 영원, 즉 흐름이 없는 시간이라는 개념으로서의 영원이 지어진 것이다. 흰개미들이 이룬 ‘지움’과 ‘지음’의 공시성이야 말로 [Trans-Society]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개념이자 예술이란 초월적인 것이라는 작가의 신념이 유효함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는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선언에 대한 시각적, 예술적 항거이고 ‘강석호 식’ 반증이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여전히 초월적인 것이다. 그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이 [Trans-Society]를 통해 자명해졌다.
김영준(Art Critic)
젊은 예술가 강석호는 구도자의 길을 가고 있는 장인이다. 화려한 미학적, 이론적 포장에 기대어 작업 대신 말을 앞세우지도, 타고난 손재주와 얄팍한 잔꾀만 믿고 고민과 성찰 없이 작품들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늘 신중하고 심각하다. 그렇다고 이성적 절제를 강조하거나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칠 만큼 세세한 것들에까지 마음을 쓰며 자신의 손과 몸을 수고롭게 하는, 시류와 ‘트렌드’에 맞지 않는 작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우직한 예술가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어느 공방을 이끄는 ‘마에스트로’를 떠올리게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헌들을 뒤적이다 보면 ‘di sua mano’라는 표현이 적잖이 눈에 띄는데 “그 자신의 손으로 직접”이라는 뜻이다.
큰 규모의 제단화, 특히 엄청난 시간과 정성, 노동을 요구하는 프레스코화의 주문서에 포함되곤 하는 조항인데 작품의 주요 부분들만큼은 제작을 맡은 공방의 ‘마에스트로’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려야만 한다고 강조, 강제하는 것이다. 똑 같은 것을 그린다 하더라도 ‘마에스트로’의 내공과 예술혼이 담긴 붓질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믿음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다양한 기기와 매체의 개발로 예술의 양상이 판이하게 바뀌어 버린 오늘날에도 ‘di sua mano’로 상징되는 예술적 가치들을 중시하고 르네상스적 작업 윤리와 마인드를 고수하고 있는 이가 바로 강석호 작가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남의 손을 빌어 작업하고 있다. 스스로를 ‘상대적 절대자’로 규정짓고 산에서 채집해 온 흰개미들을 책과 함께 플라스틱 상자 안에 넣어 두고 그 작은 세상의 모습을 지켜보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di sua mano’라는 조항을 달아 흰개미들에게 [Trans-Society]라는 작업을 의뢰한 셈이니 파격이고 반전이다. 대체 어떤 의도에서 이런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걸까. 사회를 뜻하는 ‘society’에 ‘횡단’, ‘초월’, ‘변화’, ‘이전’ 등을 의미하는 접두사 ‘trans’를 연결시켜 만든 신조어 ‘trans-society’를 통해 드러내려는 것은 무얼까.
책은 그 자체로서 다중적인 trans-society이다. 인간의 지적 소산인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들과 그 단어들이 인쇄된 종이의 집합, 즉 지적, 언어적, 물리적 요소들로 이뤄진 society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을 실어 놓은 도록 역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빚어낸 또 다른 다중적 trans-society이다. 그런데 책, 또는 도록이라는 다중적 trans-society는 그것을 갉아먹으면서 길을 내고 집을 짓는 흰개미들에 의해 생물학적 society의 일부가 되는 동시에 본래의 의미와 기능, 존재의 가치가 변질되고 변화된, 이를 테면 새로운 ‘초월적’ trans-society가 된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든, 무엇을 예상했든 그대로 진행될 가능성은 희박한, 흰개미들의 본능적 삶의 의지가 개입될 수 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점 또한 초월적이다. 어쩌면
흰개미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고 거기에서 어떤 느낌을 받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개념을 반영하는 도식적 installation의 우연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Trans-Society]를 선보이는 두 번째 전시를 앞두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무언가를 더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무언가 더 보고 싶기 때문인 듯싶다. 목표한 ‘완성도’가 있을 리 없는, 아니 어쩌면 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영원한 non-finito 작업에 매달리고 작가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선문답 같은 답이 돌아왔다. 정성 들여 빚은 도자기를 가마 안에 넣고 좋은 작품이 되길 염원하는 도공의 마음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노라고. 개념미술적 언어로 해석할 수도 있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런 미학적, 개념적 틀 너머에 있는, 예술이란 초월적인 것이라는 곰팡내 나는 케케묵은 신념을 붙들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결과, 결과물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어떤 언명의 체계로도 규명하기 어렵고, 어떤 논리학적, 철학적 설명으로도 완전히 해석할 수 없는 창조와 예술에의 의지. 이것이 실재함을 흰개미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Trans-Society]라는 작업의 목표이자 실존적 의미가 아닐까.
책은 하나의 세상, 작은 문명이다. 그런 책을 먹어 들어가는 흰개미들의 행위는 문명파괴이다. 켜켜이 쌓인 삶의 흔적들로 이뤄진 역사를 지우는 vandalism이고 iconoclasm이다. 하지만 해체이고 파괴인 것만은 아니다. 자기들의 흔적을 남기며 자기들의 세상, 문명을 짓는 또 하나의 창조이다. 통시적 인과 관계의 고리를 끊고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지움’과 ‘지음’을 공시적으로 엮는 transformation이다. 이성적 해석과 논리적 판단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이기도 하고 이성적이지도 않고 감성적이지도 않은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절대적인 창작의지의 발현이고 그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리글(Alois Riegl)이 ‘예술의지(kunstwollen)’라는 개념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실재하지만 증명하기는 힘든 그 무엇에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작업에 담기를 그토록 염원했던 divine spark – 신의 피조물, 특히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神性)의 반짝임 – 으로 대변되는 그 무엇이 존재함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그 ‘반짝임’이고 kunstwollen이기에 미리 구상해 놓은 최종 결과물도 작업이 도달해야 할 완성도도 없다.
도자기에 빛을 내는 것은 불이다. 하지만 도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신의 선물, 즉 불을 다루는 도공의 의지이다. 얼만큼 기다리고 어느 순간 꺼내야 할지를 결정하는 도공의 자발적 의지가 비록 덜 구워진 도자기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완전한 작품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전시되는 일곱 점의 사진들은 [Trans-Society] 작업의 기록인 동시에 작가의 kunstwollen으로 완성한 완전한 non-finito 작품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Trans-Society #4-1]의 ‘영(永)’자가 눈에 띈다. 영원을 뜻하는 글자, 그것도 영원한 명필 왕희지가 쓴 글자가 얼만큼 지워져 있다. 끝없이 흐르는 시간이란 개념으로서의 영원이 지워진 셈이다. 대신 그 위에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정의한 영원, 즉 흐름이 없는 시간이라는 개념으로서의 영원이 지어진 것이다. 흰개미들이 이룬 ‘지움’과 ‘지음’의 공시성이야 말로 [Trans-Society]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개념이자 예술이란 초월적인 것이라는 작가의 신념이 유효함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는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선언에 대한 시각적, 예술적 항거이고 ‘강석호 식’ 반증이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여전히 초월적인 것이다. 그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이 [Trans-Society]를 통해 자명해졌다.
김영준(Art Cri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