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묵색(墨色)은 천지 만물의 색이요, 선(禪)은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불가의 묵언 명상 수행방법이니 담원 화백의 선묵화는 천지 만물의 색으로 그려낸 차원 높은 구도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그림이라 하겠다.
선묵화는 무형의 선(禪)의 세계를 이차원의 시각적인 평면 위에 필묵으로 그려낸 예술의 세계인데 우리 화단에서는 담원 김창배(潭園 金昌培)화백을 명과 실을 겸비한 선묵화(禪墨畵)의 대가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러한 자타 공인의 선묵화의 대가로서의 명성은 선묵화 창작을 위한 오랜 화업 수련과정을 통해 어렵사리 얻어낸 결실로 담원 화백은 수준 높은 선묵화의 세계를 군더더기 없는 발군의 소쇄(瀟灑)한 필력으로 펼쳐보이고 있다.
2. 선(禪)과 차(茶)의 이중주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禪)의 세계를 깨닫고 수련하는 방법의 하나로 불가에서는 선승이 던진 화두를 매개로 선문답(禪問答)을 하곤 한다. 불가에서 선스승(先師)을 따르고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선문답을 통하지 않고 선의 경지에 도달하고 법열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으니 다도(茶道)를 통해서이다. 다선일체(茶禪一體), 다선일여(茶禪一如)라고 하는 이유이다.
담원 화백의 선묵화의 세계가 대부분 끽차(喫茶)를 주제를 한 작품들인 것은 곧 다선일체(茶禪一體),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시각적 표현이다.
'끽다거(喫茶去)'라는 유명한 화두를 남겼으며 차를 선(禪)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 당나라의 선승 조주(趙州) 선사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조선의 초의선사는 다선일체(茶禪一體)를 주창하고 동다송(東茶頌)을 짓고 선(禪) 수행을 끽다(喫茶)와 일치시켜 우리나라에 차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다. 이후 추사 등의 선비들이나 사찰의 승려 등이 다도를 통해 일체의 근심과 의혹을 씻어내어 면벽 무언을 행함과도 같은 척체현람(滌除玄覽)의 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다.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차를 즐기며 차(茶)와 선(禪)의 세계와 관련한 문장이나 서예작품은 많이 남겼으나 차와 관련된 선묵화를 그려온 사람은 많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오랜 기간 수많은 차 관련 작품을 창작해 온 우리나라 작가로는 (필자의 과문인지 모르겠으나) 담원 화백 이외에는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칭 작가라 불리우는 인사들 가운데 언제 어디서 누가 봐도 그의 화풍임을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고 있는 작가라면 그 사람을 일러 그 분야에 일가를 이룬 거장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담원 화백을 명실상부한 선묵화(禪墨畵) 혹은 선다화(禪茶畵)의 대가라 부르는 이유이다. 담원 화백은 웬만한 사람이면 그의 작품임을 쉬이 알아볼 수 있는 다(茶)와 선(禪)의 이중주로 이루어낸 다향(茶香)이 짙게 배인 명작들을 창작하고 있다.
3. 청징(淸澄), 야일(野逸)의 선미(禪味)
담원 화백의 선묵화는 크게 두 부류의 소재가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데 하나는 인물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군자를 비롯한 화조, 초충 등의 물상들이다. 인물의 경우 차를 즐기는 승려뿐 만 아니라 남녀노소의 다양한 군상들의 삶의 모습도 그려내었다.
그런데 인물이건 자연이건 담원 화백의 선묵화는 필세가 자연스럽고 매끄러우며 먹의 남용이나 붓의 겹침이 거의 없어 화면이 깔끔하고 청징(淸澄)하며 소박해 보이되 은근한 깊이 또한 머금고 있다.
동양에서는 작가의 내면적인 품성이나 기질이 외면적으로 발산된 것이 곧 그의 그림이라 하여 화여기인(畵如其人)이라고 했으니 담원 화백이 그려낸 선묵화는 평소 번거로움과 겉치레를 싫어하는 소박하고도 청징한 그의 마음을 그려낸 것이라 하겠다. 다양한 모티프(motif)의 선묵화를 묵을 주 재료로 쓰되 감상자로 하여금 묵(墨) 특유의 과도하기 쉬운 어두움과 무게감을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고 다향을 즐기듯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음에 그의 선묵화의 탁월함이 있다.
선(禪)이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엄숙하고도 진지한 종교적 수련 행위의 하나이다. 선(禪) 개념 자체가 면벽의 엄중함과 경건함, 그리고 적막함, 외부와의 단절, 정신 집중의 단호함과 인고의 수련, 허정한 마음으로 무아지경에 이름 등의 차원 높은 종교적 구도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 결과 선묵화가 자칫 무언가 두텁고 묵직한 분위기로 화면이 채워 질 수가 있다. 그러나 담원 화백의 선묵화는 간략하면서도 유연하며 겉치레가 요란치 않는 야일(野逸)함 가운데에서도 선미(禪味)를 부지불식간에 느끼게 해줄 뿐 아니라 마치 쉽고 친근한 말로 써내려간 한 편의 수필을 읽는 것처럼 편안한기분이 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인물들의 옷깃의 묘사에 있어서는 단원 김홍도의 ‘무동도’나 ‘씨름도’ 등에서 볼 수 있는 일필직입(一筆直入)의 경쾌한 속도감과 필치의 자유분방함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감필(減筆)의 담박(淡泊)함과 일필(逸筆)의 생동감이 잘 어우러져 있다. 즉 화면 속 인물의 경우 간결하고 탄력있는 선묘로써 필묵의 묘미를 살리는 동시에 인물 주변 물상들에 단아한 설채(設彩)를 구사하여 전체로서 선묵화 특유의 정취를 잘 담아내고 있다.
4. 시화일률(詩畵一律)의 경지
담원 화백의 선묵화는 선(禪) 특유의 범접하기 어려운 구도(求道)를 향한 정적과 근엄함이 담긴 그림이 아니라 청징(淸澄), 야일(野逸)할 뿐 아니라 때로 해학적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볍지 않은데 그것은 시화상보(詩畵相補)의 어우러짐으로 화문일률(畵文一律)의 조화로움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담원 화백은 그림으로써 못다 한 내면적인 상념과 선(禪)의 향기를 유려한 필치의 글로써 풀어놓았다. 즉 오랜 화기(畵技)의 수련에서 오는 필묵의 건습(乾濕) 변화와 조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대가로서의 풍모가 느껴지는 그림과 높은 정신적 사유를 표현한 서체의 어우러짐으로 시각예술이 갖는 그림의 한계를 지적인 언어예술로 훌륭히 보완하여 품격높은 문기(文氣)를 느끼게 한다.
특히 화면의 포치에 있어서 추종불허의 절묘한 구도 감각으로 글이 그림을 혼란스럽게 침범하지 않고 동양화 특유의 여백을 살린 그림 역시 글과 조화를 이루어 화면을 어지럽히지 않는 시화일치(詩畵一致)의 세련됨을 보여주고 있다.
5. 에필로그 - 한류(韓流)에의 동참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며, 논자에 따라서는 문화 전쟁의 시대라고도 한다. 한 나라 한 민족의 고유하고도 창의적인 문화의 힘은 그 나라 국력의 바탕이 된다는 의미이다.
근래에 들어 우리의 문화 예술이 세계 무대에서 한류의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전 세계인들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처럼 음악과 영화, 드라마, 음식 등은 한류에 동승하여 날로 지구촌에 그 반향을 크게 일으키고 있으나 미술 특히 전통 회화 분야 만은 한류의 한 축을 담당하지 못하고 세계 예술무대의 변방에서 우리들 만의 고답적인 묵의 유희에 머물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담원 화백의 선묵화를 통해 우리 전통 회화의 한류에의 동참을 위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하다. 일본화 특유의 평면적인 장식성과 건조함 그리고 강렬한 색의 대비, 중국화의 부려(富麗)함과 묵의 남용에서 오는 무거움과 구별되는 담원 화백 선묵화의 담박(淡泊)한 맑음과 사찰의 풍경소리가 들리는 듯한 상쾌함,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해학(諧謔)적인 표현은 같은 동아시아 나라이면서도 저들 나라와 또 다른 한국미를 오롯이 함축하고 있다.
즉 담원 화백의 선묵화는 둔탁하지 않은 필선의 활달함과 담채를 곁들인 다양한 인물들의 차림새나 표정 그리고 화면의 배경이 된 소재들의 문인적 표현에서 같은 아시아인이면서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 또 다른 한국인 고유의 문화적 분위기와 정서가 유감없이 발현되고 있다.
담원 화백의 선묵화가 근래에 이르러 중국과 일본,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 뿐 만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까지 세계인들의 시선을 매료시키기 시작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선묵화는 이제 우리 국내에서 한국 전통예술 분야의 독창적인 장르로서 당당히 자리매김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장래 세계인들의 심미감을 사로잡을 날도 멀지 않으리라고 본다.
자칫 중국화의 아류처럼 보이기 십상이던 전통 수묵화의 한류에의 당당한 동참을 담원 화백의 선묵화를 통해 기대해 보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