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형은 생업과 창작활동을 병행하는 작가임에도 사유의 여정과 특별한 체험을 위해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수반하는 창작에 온전히 정성을 바친다. 창작은 예민한 감각과 직관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을 것이고, 많은 시간 고뇌의 시선으로 흩어지는 무형의 이미지를 모으고 재조합하면서 그렇게 작업의 성과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가상의 공간에서 출발한 그의 자취는 문자적 상상력과 감각의 논리를 따른다.
그는 초기에 수행 차원의 서예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고 이후 문자추상이라는 독자적인 형식으로 전환하면서 작업에 서법의 독창성을 반영한다. 먹으로 화선지를 가르듯 하면서 용접기로 글씨를 쓰고, 산소절단기의 강한 불로 철판을 가르고 면을 세워 3차원의 문자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이후 문자를 해체하여 이미지로 재조합하고 이야기를 확장하는 ‘그림문자(pictogram)’라는 다차원의 조형형식으로 나아간다.
화가는 문자 외형의 품격과 내적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조형적인 특성에 주목한다. 문자 자체가 이미 미적 가치를 충분히 지닌 그림문자(pictogram)이나 한자와 한글 문자를 이미지로 유추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형성을 확장한다. 문자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합해 잠재적 가치를 증식시키는 방식은 이미지화한 문자의 의미가 확장되도록 유도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는 규범이나 보편의 가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위한 일탈과 유희에 주목한다.
언어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인간의 사소한 감정과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언어 그 너머의 세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언어는 스스로 습득한 소통방법이기보다는 결국 타자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욕망은 말을 습득하면서 억압당하고, 타자 언어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새로운 언어를 찾는 사유의 틀로 나아가는 것이다. 조승형의 작품은 말로서의 문자를 해체하고 재배치하면서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하도록 유도한다. 문자를 해체하는 일은 문자에 내재된 관습적인 가치를 분해해 생경하고 신선한 가치를 재확인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므로 체계의 논리가 아니라 해체의 논리에 주목한다.
1. 일탈과 유희적인 사유로서 문자추상
“작업이란 무수한 시간 속에 텅 빈 머릿속에 머문 고뇌와 상념들이 발음이 없는 언어가 되고 흩어졌다 다시 조합하는 형상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조승형 작가노트 중
소통의 기호로서 언어는 시각과 청각 정보를 지닌 기표(signifiant)이며, 대상과 의미하는 바가 일치하는 기의(signifié)라는 자의적인 규칙에서 출발한다. 문자는 의성어 차원의 기호이며, 이미지 기호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은 문자의 의미를 고정된 재현(representation)의 가치에서 벗어나 가상의 세계로 향하도록 한다. 그런 이유로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적 표상체계와 회화적 표상체계의 유사 관계에 대한 비판으로 일련의 그림들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부조리한 관계형식을 제시하여 재현의 가치에 대한 비판적인 작업을 제안하였다.
조승형의 작업은 일상의 언어 너머 예술적인 감수성을 통해 미적대상이라는 작가의 욕구가 구현된 것으로 그의 조형언어는 재현이기보다는 물활론(物活論)의가치를 지닌다. 이는 문자추상이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원초적 교감과 유희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므로 가능하다. 프로이트는 유희와 예술의 기능이 정신적인 치료라고 주장하며 특히 예술은 일상에서 금기시 된 욕망의 충족과 환상을 허용함으로써 삶을 보완한다고 했다.
언어에는 고유한 문화적 감수성, 원형의 무의식과 감정이 축적되어 있다. 에밀 시오랑은 ‘사람은 국가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산다. 언어야 말로 조국이다.’ 라는 말로 언어의 의미에 무게감을 더했다. 조승형의 작업은 고구려 벽화나 토기에 그려진 ‘신화이미지(mythogram)’와 조응하는 한국적 정체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화가들을 호출하고 삶의 불안과 비애를 쾌활하게 풀었던 원초적인 감성에 매료되어 문자를 문자로 보는 방식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의식의 변화로 나아간 결과이다. 익숙한 문자를 낯설게 바라보기는 표현 이전의 혼돈을 만나고 순수 존재에 대한 진솔한 자각이 발생하게 한다.
최근 조승형 작품에서는 상투적인 문자들이 만들어내는 위트, 재치, 익살, 해학이 넘쳐나지만 간절한 기원이나 소망을 담고 있다. 삶의 유희를 장착한 상징성 있는 그림은 쉽게 읽혀지고 의미는 쾌활하다. 이미지 사유를 통해 소중한 가치를 남긴 예술가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는 한자의 상형성에서 벗어나 글과 그림이 하나의 구조체로 독특하게 작용하는 ‘이미지 서체’를 창안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谿山無盡>은 관념으로 정신성을 구축하기보다는 당대의 정치적인 현실을 바라보는 감정을 진솔하게 그림처럼 그린 글씨다. 이런 사례는 조승형 작가에게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즉 멋을 부린 문자(calligraphy)가 아니라 참된 지혜로 대상의 본질을 응시하려는 관조의 정신을 추구한 ‘문자그림’으로, 이는 논리적인 사고에서 직관적인 사고로의 이행이며 ‘탈영토화’의 사유방식이다.
2. ‘탈영토화’로서의 문자그림“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기원한다.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 내가 품고 있는 꿈을 이야기로 만들고 기도문으로 편집하여 형상을 구성하고 공간을 채운다. 나는 그것을 추상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조승형 작가노트 중
인간은 언어와 문자를 통해 상징계로 진입하고 규범이나 지식은 문자로 축적된다. 대타자라 불리는 지식은 상징계의 가치판단의 잣대로 재구성되어 정상적인 규범과 상식으로 인정받는다. 법의 질서, 즉 대타자라 불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벗어난 곳에서 새로운 사유의 틈이 발생하지만 쉽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문자의 구조가 대타자라면 그림문자는 상징계로부터 이탈한 그 너머의 세상을 밝히는 새로운 균열이며 진실인 것이다.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의 방향성을 지니며 상식이라 불리는 고정관념을 해체하려는 것이다. 문자가 ‘홈 패인 공간의 사유’라면 문자그림의 이미지는 ‘매끄러운 공간적 사유’의 결과이다.
기의로서 문자에 발생하는 의미는 무한대로 미끄러지는 ‘확정 불가능성’의 특성을 지닌 ‘주름’이다. 조승형 화가는 문자의 주름(pli)을 펴고 확장(ex-pli)하여 새로운 탈-문자적(de-pli)인 가치를 보여준다. 주름진 얼굴이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나 문자 또한 특수한 상황의 사회적 가치를 품고 있는 주름이다. 작가는 이미지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구성하며, 언어의 다의성을 지닌 문자의 주름을 펼치고(ex-pli) 다시 접어(im-pli) 잠재적 가치를 상징화한다. 전체적인 삶을 축적한 주름의 형상처럼 문자 또한 응축된 가치에 의해 통합된 것이다.
문자를 풀어 조형언어로 확장한 그의 그림은 구상성이 대부분이지만 현실보다는 가상의 이야기가 상상을 기반으로 구현되었으므로 ‘문자추상’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엄격한 구조체계에서 벗어나 ‘탈영토화’된 그림문자는 새로운 접속에 의해 관계를 맺는 방식이어서 우연의 요소들이 작동한다. ‘유목적 사유(nomadism)’에 의해 방향성도 규정된 틀도 없이 해체된 이미지는 스스로 접속하고 배치, 구성되면서 때로는 익살을 떨기도 한다. 이렇듯 매우 이질적인 것과의 접속과 다양한 배치가 그림을 생성 가능한 세계로 이끌고 가면서 우연하고도 우발적으로 주름을 펼치는 상황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이질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그림은 주름으로 가득 찬 소우주인 ‘모나드(monad)’인 것이다.
3. 문자의 원초적인 이미지
“나는 문자가 가진 특별한 의미와 원초부터 만들어진 형태를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곤 한다.때론 나만의 해석으로 형상을 변형하면서 그 속에 샤머니즘을 가미 한다.”
조승형 작가노트 중
문자 이전의 시대에 인간은 그림으로 소통하고 간단한 정보를 저장했는데 추상적인 사유가 탄생하면서 기호로서의 언어를 만들었다. 언어는 단어를 이루고 문장을 만들어 말과 사물이 지시하는 이상의 가치를 지니면서 인간의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의식과 사유의 틀이며 존재를 보는 기호’이지만, 인간의 사유를 고정된 틀로 얽매이게 하는 기능도 있다. 작가의 작업은 말의 혁신 없이는 새로운 존재도 세계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언어와 문자의 해체가 고정된 의식과 상식을 바꿀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주장하는 픽토그램(pictogram)은 문자가 출발한 원초적인 삶의 공간으로 거슬러 오른다. 화가는 태초에 인간이 사용했던 사물과 기호가 조응하던 최초의 시절을 호명했을 것이므로 그의 그림은 원시벽화에서 볼 수 있는 형상성이나 토착적인 신앙을 지닌 이미지에서 미의식을 복원한 민화(民畵)처럼 보인다. 대상을 지시하는 문자는 잃어버린 욕망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기에 원초적인 이미지를 갈망할 수밖에 없다. 문자 이상의 잠재적인 것을 보기 위해서는 문자가 감추고 있는 말의 본질을 밝혀야 하며, 이는 당연히 작가의 몫이 된다. 최초의 문자는 사물을 닮은 그림이었고 말은 문자 이전에 탄생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말은 ‘영혼의 표현이며 상징’이다.
문자는 음성으로 표현되어 청각으로 전달되는 기호체계인데 사실과 의미 사이에는 가늠하기에 따라 상당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화가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다투려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시각과 감정에 조응하는 문자를 재탄생시킨다. 한자의 문(文)은 무늬를 의미하는데 고고학에서는 초기의 사물의 형체를 알 수 있도록 만든 그림 문자(picture writing)라고 한다. 대상을 연상하는 그림과 간단한 정보의 기호가 모여 문자를 만들었고 이를 상형문자(pictogram)와 표의문자(ideogram)로 부른다. 파울 클레는 심오한 리듬과 색채를 혼융하여 알파벳이 이이미지와 텍스트를 넘어 독립적이고 고유한 존재 형태로 표현되도록 했다. 시적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다.
마무리하며(epilogue)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언어는 권력에 의해 의미는 강력하게 구조화 되어있으며, 말을 사용하는 행위는 말의 권력에 인간의 무의식도 종속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새로운 이미지 언어의 사용은 균열을 발생시키며, 공백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감춰진 새로운 존재와 세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화가 조승형의 작업은 문자언어를 회화언어로 변용하여 새로운 존재와 진실을 추구하면서 진정한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탐구다. 언어에 감춰진 진정한 사유의 가치를 해체하고 파헤치기 위해 문자 바깥으로 향하는 알지 못하는 세계로의 통로를 제시한다. 관념으로 메마른 문자에 서정의 온기와 순수한 감정을 덧입히는 것이다.
문인화가 사군자의 고고한 정신을 오롯이 담는다지만 문자와 결합됨으로써 사군자의 진정한 특성과 실재는 사라진다. 언어를 회화적으로 이미지화하기 위해서는 굳어진 인식 체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존재와 세계의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의 픽토그램(pictogram)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끝없는 노동이어서 문자 이미지는 그를 대신해 사유하고 표현한 생각의 연장이고 진리를 탐구하는 심상이다. 문자에 단단히 박혀 있던 의미를 풀고 본래적인 조형의 가치를 통해 아담의 언어를 복원하는 것이다.
문자의 의미는 청각적 전달력과는 달리 시대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증식되고 조정된다. 작가 조승형도 세상과의 접속으로 다양체를 만들듯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문자의 변신을 꾀한다. 작품의 중심에 작가 자신을 두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변화되고 의미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삶의 여정에서 무언가와 접속하는 일은 곧 내가 가야할 방향과 목적을 다시금 가다듬어야 하므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건과 접속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또 다른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一微塵中含十方’ 티끌이 온 우주를 담고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있듯이 경전은 풀 한 포기에도 있다. 회화가 하나의 걸림돌이었던 그에게 이제 그림은 하나의 디딤돌이 되고 있다. 개울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돌이 하나하나 얹혀 지고 그 징검다리 돌을 지나 새로운 진정한 세상을 만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