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    업데이트: 20-10-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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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경북을 걷다] <36>군위 장곡 숲길을 따라
윤종대 | 조회 1,859


[동행-경북을 걷다]
<36>군위 장곡 숲길을 따라 길은 생기고 사라지지만 추억은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군위군 고로면은 위천이 발원하는 곳이다. 위천은 이곳에서 물길을 시작해 군위 땅을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며 의성 쌍계천과 만난 뒤 낙동강과 합류해 다시 남으로 흘러내린다. 경북을 오가며 군위를 숱하게 지났지만 고로에 발길을 닿기는 쉽지 않다. 영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국도는 2가지. 영천 신녕면을 지나 의성 안계면을 거쳐 예천으로 이어지는 28번 국도와 영천 화북면에서 청송 현서면을 지나 안동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다. 고로 땅은 바로 이 두 국도 사이에 놓여있다. 대구에서 가자면 대구~포항고속도로 청통와촌 나들목에서 내려 신녕면으로 가다가 28번 국도를 만난 뒤 화수삼거리에서 오른쪽 908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된다. 인각사 마주보는 학소대 절경 고로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10여 년 전 이곳으로 스케치 여행을 자주 다녔다는 윤종대 화백은 “군위댐이 들어선 뒤 일대 풍경은 전혀 딴판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앞서 화수삼거리에서 군위댐 쪽으로 가다 보면 위천 줄기를 호위하듯 둘러선 기암절벽에 감탄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했다는 인각사를 마주보는 학소대는 특히 아름답다. 인각사 뒤편은 태백산맥의 남쪽 끝에 자리한 화산(華山`828m)이다. 절터 뒤편의 산줄기가 전설 속의 동물인 기린의 뿔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인각사(麟角寺)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화산 정상부에는 화산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훈련장으로 쓰이다가 조선 숙종 35년(1709년) 병마절도사 윤숙 장군이 병영을 세우기 위해 쌓은 산성. 산 중턱에 있는 바위에 매질을 해서 산꼭대기로 올라가게 하는 신통력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지개 모양의 전통적인 석문이 남아있지만 안타깝게도 완성을 보지 못했다. 한창 공사 중에 소복을 입은 여인이 주위를 서성이다 홀연히 사라진 탓에 행여 부정을 탈까 싶어 공사를 중단했다는 전설도 있다. 사실은 극심한 흉년이 3년 넘게 이어진데다 산성 축조를 책임진 윤숙 장군이 전라도로 부임하면서 미처 완공하지 못했다.

산성 안에는 100여 년 전 한 학자가 이름 지었다는 옥정영원(玉井靈源)이라는 약수터도 있다. 아무리 맹위를 떨치는 삼복에도 이 물을 마시면 더위를 잊어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초 길 안내를 맡은 김기태 고로면장은 옛길을 더듬어 보자며, 화산 북쪽 괴산리에서 살구재를 넘어 영천 화남면 구전리로 가는 길을 추천했다. 길은 생기고 사라지지만 추억은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남는다. 지금은 물에 잠긴 그 길들. 고로면사무소 뒤편에서 화산 쪽을 바라보면 푸른 물결만이 찰랑거린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선 길들이 만나고 갈라지고, 사람들이 오가며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옛 사람들은 장을 보고 사람을 만나러 살구재 고개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댐이 생겨 물로 가득 차기도 전에 이미 고갯길은 사라졌다. 신작로가 생기고 차들이 다니면서 걷는 길은 잊혀졌고, 지금은 아예 숲에 막혀버렸다. 결국 다른 길을 택해 걷기로 했다.

장곡자연휴양림 방문객 북적 군위 장곡자연휴양림은 1997년 개장했다. 군위댐이 생기면서 주변 연결도로가 시원스레 확장되기 전만 해도 숲깨나 찾았다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즐기던 곳.
올 들어 접근하기 쉬워진 덕분에 예약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내딛고 있다. 대부분 캠핑을 하거나 방갈로에서 하루 쉬어가는 정도에 그치지만 사실 이곳의 묘미는 뒤편 산길을 한 바퀴 도는 숲환경 체험로에 있다. 쉬엄쉬엄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원래 임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길은 널찍하고 오르막길 곳곳에 콘크리트 포장도 돼 있다. 하지만 차량 통행을 못 하게 막아뒀기 때문에 원래 숲맛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어른 허리춤까지 자란 잡초가 길을 막아서지만 오히려 때 묻지 않은 길을 만난 듯 즐겁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참매미의 울음소리도 경쾌하다.

도시의 소음 속에 사는 매미는 듣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악을 써댄다. 잠시 쉬지도 않는다. 일정한 높이의 고음으로 마치 기계에서 들리는 소리 같다. 하지만 숲속 매미 소리는 다르다. 여유가 있다. ‘맴맴 매앰~ 매애앰’. 나무 아래를 지나는 인기척이 들리면 잠시 멈칫한다. 도시 나그네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하듯. 특히 최근 등산로 정비가 마무리되면서 산악인들 사이에 숲길이 알려지고 있다. 최근 군위군은 3년간에 걸쳐 아미산 등산로 정비를 마무리했다.

아미산(737m)에서 방가산(755m)을 지나 장곡휴양림을 연결하는 23.8㎞의 등산로. 장곡휴양림을 나와 908번 지방도를 따라 영천 쪽으로 가다 보면 아미산 등산로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이 험한데다 코스를 마치는 데 5시간가량 걸리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산행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입구에서 바위길을 따라 잠시 오른 뒤에 계속 남쪽으로 능선을 타고 오르내린다. 앞서 장곡휴양림 숲환경 체험로에서 방가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있다. 거기서 출 발하면 거꾸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아미산에 오른다.

소원 들어주는 ‘신비의 소나무’ 908번 도로를 타고 좀 더 가면 학암리에 이른다. 여기에는 ‘신비의 소나무’가 있다. 500년이 넘는 소나무는 둘레 4.5m, 높이 7m에 이르는 거목이다. 한 번 만져보고 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담겨있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제관을 뽑아 냉수에 목욕재계한 뒤 동제를 지내고, 7월이면 마을 청년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도 지낸다고 한다.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으면서 소나무에 술을 뿌리는 모양이다. 서툰 글씨체로 ‘뿌리가 썩고 병충해가 많으니 술을 뿌리지 말고 물을 주라’고 써 놓았다. 술은 사람이나 좋아하지 나무가 좋아할 리가 있나.

윤종대 화백은 “만져봐야 소원을 이뤄준다는데”라며 냉큼 올라서서 나무 둥치를 어루만지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무엇을 빌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소나무 아래턱에 마을 아주머니 둘이서 복숭아를 팔고 있다. 하루 종일 몇 사람이 다녀갈까 싶은데도 급한 기색이 없다. “안 사도 되니까 더운데 복숭아 맛이나 좀 보고 가소.”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외면할까. 가격 흥정도 하지 않고 한 상자를 샀다. 원래 군위는 사과로 유명한데, 여름철 마을에서 몇 그루 키우는 복숭아를 직판하는 모양이다. 한낮 뙤약볕을 피해 잠시 그늘에서 복숭아를 팔다가 해거름이면 다시 밭일을 시작한단다. 표정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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