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업데이트: 20-01-31 14:23

비평

1992 최병식 서문 「바위산의 심미(審美), 그 평정(平靜)과 자각(自覺)」
관리자 | 조회 668
 
「바위산의 심미(審美), 그 평정(平靜)과 자각(自覺)」
 
崔炳植 / 美術評論家
 
성인은 도를 품고서 사물에 화응(和應)하고 현인은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한다. 산수는 형질을 갖고 있으면서 영묘한 정신을 취한다. 이 때문에 옛적의 현인들, 헌원, 요, 공자, 광성자, 대외, 허유, 고죽 등이 공동, 구자, 막고산, 기산, 수양산, 대몽산 등에서 노닐었다. 이는 인자와 지자의 즐거움이다. 대저 성인은 정신으로서 도를 규범하고 그 규범화 된 것을 세상에 넓혀 행한다. 산수는 형상으로 도를 아름답게 나타내고 어진 사람은 이를 즐기니 이 또한 이상적인 경지가 아니겠는가?

「聖人含道映物, 賢者澄懷味象, 至於山水質有而趣靈, 是以軒轅, 堯, 孔, 廣, 成, 大隗, 許由, 孤竹之流, 必有崆峒, 具恣, 藐姑, 箕, 首, 大蒙之遊焉, 又稱仁智之樂焉, 夫聖人以神法道, 而賢者通, 山水以形媚道而仁者樂, 不亦幾平?」
 
위의 화론은 유명한 종병(宗炳)(375~443)의 ≪화산수서(畵山水序)≫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동양화에서의 산수화가 갖는 본질적인 경지를 유추하게된다. 즉 작가가 자연을 대함에 있어서 그림을 그리려는 조형적 유희에 앞서 성인(聖人)이 도(道)를 품고 사물을 대하는 것처럼 맑은 마음으로 형상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는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형미도(以形媚道)」즉, 형상으로서 도(道)를 아름답게 표현하게 된다는 산수화의 이치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양회화사상의 요체를 이루어 왔다고 보아도 좋을 산수화의 근본사상은 그 시작부터 본령의 경지까지가 모두다 작가자신의 징회(澄懷)와 같은 고도의 심신(心身)수양을 통한 정신세계의 반영이다. 그 정신세계의 경지란 다름 아닌 도가(道家)사상에 있어서의 허정지심(虛靜之心), 무(無), 무위(無爲)의 경지를 향하는 삶자체의 수양이며, 불선(佛禪)에 있어서 해탈에 이르는 좌선과도 같은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 다만 산수화는 「이형(以形)」즉, 형상을 통한 심미(審美) 세계의 표현이라는 방법상의 차이를 지니고 있을 뿐이며, 그 궁극적 경 지는 미도(媚道) 즉, 아름다운 도(道)의 세계를 이루려는 공통된 목적이다.
김석기의 최근 산수화는 위와 같은 「이형미도(以形媚道)」의 경지를 깨닫기 시작한 정제된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색체에 대한 재인식으로부터 비롯된 수묵세계로의 진입이나, 암산(岩山)의 소재들로 일관되는 명료한 주제 설정, 작업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는 형식상의 절제된 노력들이 모두가 척제(滌除)된 가슴을 열기 시작한 절대경지인 「현람(玄覽)」으로의 흔적이다.
김석기는 1971 대학졸업후 80년 1회 대전(大田)개인전을 계기로 하여 지금까지 10회의 개인전을 서울과 대전에서 개최해왔다. 그의 작업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 처음단계는 그가 생활해온 대전으로부터 멀지 않은 대둔산, 속리산 등을 주로 하여 많은 암산(岩山)들의 스케치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다음시기에 접어들면서 암산(岩山) 이외의 전원, 농가와 같은 일상소재들이 등장하게 된다. 마치 전자가 지금껏 전통적 맥락에 의해 선택되어오던 전형적 규범성이 전제되어졌다면, 후자는 그에 비해 기성화된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작가의 의도적인 보편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는 일상적 심미의식의 형식을 벗어나 어느 곳에서나 쉽게 대할 수 있는 소재를 다루려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으며 그 연유로 인해 두 가지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하나는 소재의 개방으로 인한 보다 다원적인 시각의 경험을 체득하게 되거나 자연히 그에 따른 기법상의 새로운 측면을 체험하는 긍정적 일면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 자연대상의 골기(骨氣)를 체득해야 되는 정도(正道)가 왜곡되면서 심미자세의 위상이 흐려지게 된 것이다. 하나의 시각이 아닌 농가풍경이나, 촌락, 고산준령의 산정(山頂), 계곡의 모퉁이로부터 폭포수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혼재된 80년대 후반의 작업들이 바로 그러한 양면성의 모색시기 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프레스센터 전시의 작업경향은 여러 측면에서 위의 두 단계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평정성(平靜性)」의 구현이다. 이 현상은 다시 소재와 재료상의 시각으로 나뉠 수 있는데 소재면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그간 80년대 후반기에 보여주었던 다양한 일상적 소재들을 하나의 시각으로 집결시키면서 「암산(岩山) 시리즈」가 등장한 것이다.
산수화에 있어서의 바위는 지(地)의 기체(氣體)로까지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골간을 이루는 소재이다. 또한 단순 명료하지만 무언(無言), 무화(無花)의 에너지를 밀장(密藏)하고 있는 형상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만큼 오묘하면서도 접하기가 어려운 소재로서 사실상 산수화에 있어서의 초석과도 같은 소재상의 위치를 점유해 왔다. 대둔산, 월출산, 가야산, 설악산, 주왕산 등 각지의 산들을 두루 사생하여 제작된 김석기의 암산(岩山)시리즈는 이 같은 산수에 있어서의 정수를 터득해야만 된다는 자각에 의해 시도된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초목(草木)의 형상이 시작되기 이전의 산수가 갖는 본연의 실체를 다시금 음미하고 재정리해 보고 싶은 충동이 「암산(岩山) 시리즈」로 나타난 것이다.
다음은 재료상의 평정성(平靜性)으로서 다수의 설색(設色)이 절제되는 여러 각도의 운염(暈染)까지 수용한 수묵의 사용이 크게 증가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말한 소재상의 변화와도 상통되는 일면으로서 외형적으로는 다소 일원적 관심으로 후퇴한 듯한 측면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상은 보다 심오한 「현화(玄化)」의 단계로 비상하려는 확인의 과정이며 재인식의 단계로도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소재나 재료 등에서 볼 수 있는 가시적(可視的)인 현상이 아닌 비가시적(非可視的)인 현상으로서 사경(寫境)으로부터 자신의 의식이 가미된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된 의경(意境)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철저한 현장작업을 바탕으로 했던 경우와는 달리 극히 부분적인 작업들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심상(心象)화면을 바탕으로한 소재결정이나 구도, 공간의 설정 등에서 기미를 엿보게 한다. 즉, 제 2자연으로의 잠재적인 전환일 수도 있는 이 현상은 사실상 앞으로의 이정표를 결정 지우는 중요한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나칠 수가 없다.
김석기의 이와 같은 변신은 분명 형상의 실체를 통하여 전신(傳神), 즉 작가의 정신세계를 전이하려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예술관을 구현하려는 전통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의 명멸하는 각종 전위사조들이 세례 하는 시대적 난제(難題)들 사이에서 이처럼 평정(平靜)의 묵필(墨筆)을 간직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그 자체가 상대적인 고뇌일 수 있다.
시간은 굴레를 타고 거듭된 형식의 함몰과 위상의 변천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미 한 세기를 두고 수없이 많은 이론(異論)들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재나 방법적인 측면, 심미체계의 전 범주를 비롯한 재료 등을 막론하고 전통의 주변은 위상의 도전과 함몰의 역사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석기의 산수는 이미 시간의 굴레를 타고 세례해왔던 금세기의 어떠한 첨단사조와도 궤를 같이 하게 되는 공존(共存)의 영역에 서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시각예술도 조형적 「이형(以形)」의 방법론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 대상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다. 다만 여기서 차이를 갖는 것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줄곧 불변의 대상으로 존재해 온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작가의 심미대상만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모종의 심미의식을 표현해내는 메커니즘의 형식일 뿐이므로 「산수(山水)를 위한 산수(山水)」의 형식화, 도식화는 파탄이며 함몰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김석기의 「바위산」, 그 평정화(平靜化)는 자연의 순미감(純美感)을 표출하려는 작가의 한 시기적 자각일 뿐, 바위를 위한 재현(再現)을 목적으로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실오라기 같은 한 획의 바위틈으로부터도 「이형미도(以形媚道)」로 이어지는 심상(心象)의 빛을 기대해 본다. 한 여름의 산기(山氣) 한 가닥을 띄우면서.
 
(1992년 7월)
 
 
Aesthetics of a Rocky Mountain, the Composure and Consciousness
 
CHOI BYUNG-SIK / Professor and Art critic Kyung Hee University
 
A holy man agrees with things as he has truth, and a wise man appreciates shape as he purifies his mind. The landscape takes subtle spirit as well as form and quality. For this reason, holy men of old times, Hyun-won, Yo, Confucius, Kwang-sung-ja, Dae-oe, Heo-yu, and Ko-jug strolled in mountains, that is, Mt. Kong-dang, Ku-ja, Mag-ko, Ki Su-yang, and Dae-mong. This is the pleasure of a benevolent person and a wise man. A holy man in general lays down truth as his spirit, and a wise man practices it widely in the world. It must be an ideal state that the landscape beautifully represents truth by shape and a wise man enjoys it.
The above essay on painting is the content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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