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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7

[이태수 칼럼] 겨울 여행을 하면서 2024/01/16
아트코리아 | 조회 257
모처럼 집사람과 함께 겨울 여행을 하고 있다. 비수기라서 동유럽과 발칸반도에는 여행객들이 붐비지 않아 한결 더 겨울 여행다운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몇 시간씩은 차창 밖을 바라보거나 졸게 마련이지만 대부분 전에 와본 여행지라서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느낌들을 안겨 주니더욱 좋다. 

일상생활과는 다르게 ‘나’를 찾아가는 길 나서기이기도 해서 소통은 거의 자제하고 있지만,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국내 소식도 훤히 알 수 있고, 소통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 ‘지구촌’이라는 말도 실감난다. 괴로운 점은 집을 나서면 밤잠을 제대로 못 자는 습성이 여전하고, 선잠만 들어도 꿈을 꾸는 증상이 더 심해지는 점이다. 같은 방을 쓰는 집사람에게는 민망스럽기도 하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는 평소에는 별로 꾸지 않던 꿈을 몇 번이나 꿨다. 버스로 여행지에서 그 다음 여행지로 장시간 가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그랬다. 그중에서도 천상병 시인과 고승(高僧)들에 대한 꿈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방인으로 떠도는 겨울 여행인데다가 요즘은 비우고 내려놓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과 사는 게 나그네 행각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제에 고승들의 삶을 떠올리며 자신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불교에서의 ‘천화(遷化)’라는 말은 입적(入寂)을 앞두고 깊은 산에 홀로 들어가 나뭇잎을 요와 이불 삼아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아름다운 열반’을 일컫는다. 생몰 연대를 뛰어넘는 고승들의 삶이 신비스러운 것도 거기에 뿌리가 있기도 한 것 같다. 생사의 갈림길을 이웃집 나들이 정도로 여기는 고승들의 깨달음의 세계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도를 깨친 승려들이 남기고 간 열반송(涅槃頌)은 정신적 사리(舍利)’ 같기 때문이다.
 
혜근(惠勤)의 ‘죽음이란 달그림자가 못에 잠기는 것’이라는 말, ‘어허 우습도다. 소를 탄 사람이여/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라고 했던 태능(太能)의 임종게, 서암(西庵) 스님의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고 했던 열반송은 세속에 찌든 우리를 바늘로 찌르는 정신적 사리들이 아닐 수 없다.
 
천상병 시인은 평생 가난, 무직, 방랑, 주벽(酒癖), 기행(奇行)이라는 ‘관’을 쓰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담배 한 갑과 나들이 버스비만으로도 행복했던 그에게는 커피와 막걸리 몇 잔만 마실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다고 할까. 그의 말대로 마치 이 세상에 ‘소풍’ 왔듯이 유유자적하면서 세속적인 욕망과는 완전히 담을 쌓듯이 살았던 분이었다.

마흔이 넘어 마음씨 착한 여인을 만나 늦장가를 든 그는 의정부의 한 셋방에 살 때가 황금기였다고 한다. 부인은 서울 인사동의 조그마한 카페 ‘귀천(歸天)’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는데 출근하면서는 그에게 어김없이 막걸리 두 병과 담배 한 갑을 챙겨 주었다. 부인이 돌아오기 전에 술과 담배가 떨어지면 야단을 맞고 심심하기도 해서 아껴가며 천천히 마시고 피웠다는 말도 전한다.
 
세속적인 눈으로는 기인이나 광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 번이나 죽음에 진배없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전기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71년엔 행방불명돼 문우들이 유고시집 ‘새’가 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에서도 읽을 수 있듯 “한잔의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을 행복해했다.
 
인간의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치면 파멸을 부르며, 세상을 병들게도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시 ‘귀천’은 그런 의미에서 새삼 신선하게 느껴진다. 가난과 기행을 예찬하는 건 아니지만, 인생을 천진난만하게 살다 간 기인의 생애가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각박한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고승들의 깨달음의 세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게 욕망으로 일그러지고 있는 오늘의 세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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