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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6

[이태수 칼럼] 새봄의 염원 / 경북신문 2022.3.22
아트코리아 | 조회 457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는 ‘한(恨)’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민족에게는 이런 독특한 정서가 거의 없으므로 정확한 번역이 어려울는지도 모른다. 남에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도 되갚음보다 ‘가슴 속 응어리’로 떠안은 채 살아가는 정서가 ‘한’이다.
그 뿌리는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역사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빈번한 외세 침입과 내란, 엄격한 신분사회 등으로 이 땅의 서민들은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세계에서 시가 가장 많이 읽히는 까닭도 감정을 최대한 응축시킨 시가 한의 정서와 관련돼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승려 신충(信忠)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효성왕에 대한 한을 향가(鄕歌)로 지어 나무에 걸어놓았더니 나무가 죽었다는 고사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임금이 뒤늦게 깨닫고 신충을 불러 벼슬을 내리자 죽은 나무가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 설화는 사람이 품은 원한의 두려움과 함께 그것을 풀어내는 해원의 슬기를 가르친다.
‘헌화가’, ‘처용가’, ‘찬기파랑가’, ‘서동요’, ‘제망매가’, ‘모죽지랑가’, ‘도솔가’, ‘공덕가’ 등에 담긴 깊은 의미들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덕목들을 담고 있다. 이들 향가는 짧은 노래지만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는 정서적 뿌리이며, 숭고하고 평화로운 노래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되갚음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덕목이라면, 향가를 고리타분한 옛 노래로 여길 게 아니라 새롭게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더구나 향가의 수사는 순진하고 원융(圓融)할 뿐 아니라 저속하거나 침음(沈陰)하지 않고, 안으로는 씩씩한 기상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너무나 각박하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심과 갈라치기가 횡행하고, 윤리 도덕과 사회 기강도 땅에 떨어졌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가 하면, 불신 풍조도 만연하고 있다. ‘제망매가’에서도 숭고한 마음과 종교를 뛰어넘는 사람의 정(情)을 읽을 수 있지만, 사청구려(詞淸句麗)하고 기의심고(其意甚高)하면서도 사람의 애틋한 정까지 떠올리는 향가를 돼새겨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 봄빛이 완연하다. 나무에는 새잎들이 돋아나고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오른다. 한으로 얼룩진 마음과 그 응어리들을 풀어내고, 생명과 희망과 환희의 계절을 끌어들이는 화해와 해원의 슬기가 요구된다. 그런 한편, 태어나고 죽는 것도 동전의 앞뒤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내려놓을 건 내려놓고 비울 건 비우는 지혜도 따라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의 ‘천화(遷化)’라는 말은 고승들의 적정(寂靜)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입적을 앞두고 깊은 산에 홀로 들어가 나뭇잎을 요와 이불 삼아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아름다운 열반(涅槃)’을 일컫는다. 생몰 연대를 뛰어넘는 고승들의 삶이 신비스러운 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이웃집 나들이 정도로 여기는 범연함에 있다. 이 때문에 도를 깨친 승려들의 ‘열반송(涅槃頌)’은 ‘정신적 사리(舍利)’라 할 수 있다.
‘죽음이란 달 그림자가 못에 잠기는 것’이라고 한 혜근(惠勤)이나 ‘어허 우습도다. 소를 탄 사람이여/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라고 한 태능(太能)의 임종게(臨終偈)는 세속에 찌든 우리를 바늘로 찌르는 정신적 사리들이 아닐 수 없다. 열반송, 임종게, 오도송(悟道頌), 게송(偈頌) 은 때와 장소에 따른 이름일 뿐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화두들이다.
서암(西庵) 스님의 경우는 입적하기 전에 측근들이 열반송을 채근하자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만년에 제자들이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올리면 ‘고목에 비료 주는 것이냐’며 물리치기도 했다고도 한다.
오랜 세월 수행한 선승의 이 열반송도 새봄과 더불어 깊이 새겨듣지 않을 수 없다. 빈손으로 왔다 가는 걸 증명하기 위해 죽어서 두 손을 관 밖으로 내놓았다는 어느 부자 이야기 역시 이 세태에 고승들이 남긴 정신적 사리 못잖게 할 말을 잃게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아름다운 봄날에 왜 하필 죽음(소멸)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더욱 그윽한 곳으로 끌어올리려면 생멸(生滅)을 숙명으로 하는 만물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마음을 겸허하게 낮추어서 높아질 수 있는 새봄을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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