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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6

[이태수 칼럼] 악세에서의 꿈꾸기 - 경북신문 22/01/27
아트코리아 | 조회 498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시시포스가 힘들여 바위를 산꼭대기에 밀어 올리면 그 바위는 어김없이 자기 무게 때문에 아래로 굴러떨어진다고 그렸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사람들의 삶이 기대나 희망 사항과는 달리 부질없다고 느끼면서도 하루하루를 주어진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를 일깨웠다.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이든, 어떤 부조리와 마주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업보이며 트라우마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업보와 트라우마 속에서도 끊임없이 더 나은 삶과 그런 세계에 대한 기대와 꿈에 불을 지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새삼스러운 문제지만, 최근에 낸 시집 '담박하게 정갈하게'의 맨 앞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도 그 때문이다.

"밤에는 꿈을 꿀까 두렵지만/낮엔 안간힘으로 꿈을 불러들입니다/더 나은 삶을 향한 꿈꾸기와/가위누르는 꿈이 밤낮으로 길항합니다/이 길항은 어제오늘뿐 아니라/오랜 세월의 트라우마이기도 합니다/그 그늘에서 말들이 빚어지고/가혹하게 지워지고 밀려나기도 합니다/하지만 그 그늘에서 언제나/더 나은 세계를 열망하고 있습니다/이젠 밤낮없이 꿈을 꿉니다" (자작시 '나의 카르마')

밤마다 악몽에 시달릴 때가 잦아 잠이 오면 두려워진다. 애써 그 꿈 밖으로 나와 보면 세상도 그 악몽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그러나 다시 그 악몽과는 상반되는 꿈에 불을 지피며 또 하루를 끌어안게 마련이다. 시시포스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부조리와 그 속에서의 안간힘 쓰기의 연속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지금 혼탁으로 치닫는 악세(惡世)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재난들이 잇따르는 데다 늘 심란하고, 사회적으로 불안하며,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럽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들을 헤쳐나가 더 나은 세상을 만날 수 있을는지, 그 전망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 혼탁을 언급하면서 그 가운데 악세는 시대의 혼탁을 말하는 겁탁(劫濁)과 수명이 짧아지는 혼탁을 일컫는 명탁(命濁)의 세계 때문이라고 했다. 겁탁의 시대에는 대형 인재(人災)들이 발생하고 가공할 신종 병이 유행하며, 명탁으로 단명을 부른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요즘 세상이 악세라는 느낌은 겁탁이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혼탁이 거듭되고 있으며, 인재들이 잇달아 일어나는 데다 두 해째 신종 병인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하지만 겁탁과 달리 명탁에 대해서는 평균수명이 점점 길어져 고령사회로 가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언급한 다섯 가지 혼탁 가운데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의 혼탁, 불안·불만, 인성(人性)의 혼탁 등 다른 세 가지 혼탁도 함께 떠올려 보면 명탁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한 원로 사회학자는 우리는 지금 '지위 반란' 시대에 살고 있다고도 지적한 바 있다. 검증도 안 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 검증된 인사들을 내쫓는 분위기가 팽배해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는 비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한 시인은 욕망의 길이 아닌 마음과 혼이 담긴 길을 걸어야 한다는 해법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그래서 이런 시도 썼던 것 같다.

"나는 작을 대로 작아져서/이슬방울 속으로 들어갑니다/나는 그렇게 작아지고 작아져서/잠깐이라도 그 맑은 글썽임 속에서/진절머리 나는 이 풍진세상이/투명하게 밝아지기를 소망합니다/새 아침의 햇살을 끌어당기며/글썽이다가 흘러내리거나 기화하는/이슬방울과 함께 기화하거나/흘러내리고 싶기도 합니다/나는 작아지고 작아져서//이 풍진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맑고 깨끗한 공기 입자가 돼서라도/새 아침에는 거듭나고 싶습니다" (자작시 '나는 작아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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