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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5

가을, 고도 경주에서 - 경북신문 2020. 10. 28
아트코리아 | 조회 533
가을, 고도 경주에서

——경북신문 2020. 10. 28

가을은 조락의 계절이다.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서니 나뭇잎들이 발치에 떨어진다. 아직 홍단풍, 청단풍은 제 빛깔을 한창 내고 있는 중이지만, 낙엽을 밟으니 마음이 울적해진다. 올해는 이른 봄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로 괴로워하며 맞는 가을이어서 더욱 그런지 모른다.
지난 3월에 열여섯 번째 시집 『리창 이쪽』을 낸 이후 쉰 편이 넘는 시를 썼다. 우울한 마음의 그림들이 많지만, 지난 2월에 쓴 「봄 전갈」을 빼도 ‘코로나 19’를 주제로 한 시가 일곱 편이나 된다. 이 질 나쁜 바이러스가 마음을 적잖이 흔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조금 긴 시 「코로나에게」는 「봅 전갈」과 달리 ‘제 탓이오’라는 관점에서 썼으며, 대부분이 ‘거리 두기’의 비애에 기울어져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픔에 무게가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집을 나서면 마스크를 끼고 거리를 두는 게 기본이었으므로 ”나는 너와 거리를 두고/ 너는 나와 거리를 두는 동안/ 마음만은 안 멀어질 수 있을까“(「거리 두기 1」)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오죽했으면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나도/ 내려서 이웃 사람과 마주쳐도/ 한두 발짝 비껴섭니다”(같은 시)라거나 “뜰에 활짝 핀 영산홍 앞에서도/ 마스크 낀 채 거리를 둡니다/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나도 몰래 몇 발 물러섭니다/ 다가오면 거리를 두는 게 아예/ 버릇으로 굳어질까 두려워집니다”(「거리 두기 2」)라고 했겠는지, 되돌아보게도 한다.
거리가 텅 빈 도회의 퇴근시간에는 마스크를 끼고 길거리에 서서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자기 그림자를 끌고 지나간다/ 한참 전부터 붙박이듯 가로등 옆에 서 있는/ 저 사람은 일자리를 잃었을까”(「거리 두기 3」)라는 생각에다 “거리 두기가 그에겐 비애 자체일까”(같은 시)라는 생각도 했었다. 가까운 사람을 만나도 그런 비애는 거의 마찬가지였다.
“검은 마스크를 낀 사람이/ 나를 향한 듯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나는 버릇처럼 비껴 선다// 안경에 서린 입김 너머로 그를 본다/ 적잖이 기다리던 사람인데/ 한갓 주먹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다// <중략> // 그의 뒷모습에 눈길을 준다/ 오늘도 별 수 없이 고도를 기다리며”(「거리 두기 4」)라는 대목이 말하고 있듯, 사무엘 베케트가 영영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듯이, 아직도 이 지구촌은 코로나가 창궐해 기약도 없이 온전한 일상을 기다려야만 한다.
거리 두기의 아픔은 그런 선에서 끝나지도 않는다. “사람과 거리 좁히기가 두려워집니다/
<중략> / 사람들을 가까이하기 겁이 납니다/ 가깝던 몇몇 사람들이 등을 돌려서,/ 크고 깊은 상처를 안겨줘서일까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가깝던 사람들이 더 무서워집니다/ 꿈속에도 쳐들어와 목을 옥죄니까요”(「거리 두기 5」)라는 데 이르면 그 심경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색해질 만큼/ 사람들이 두렵습니다”(같은 시)라고까지 쓰기도 했다.
그래서 급기야 “마스크를 끼고, 말에 마스크 채우고/ 집과 집 옆 글방을 오갔다/ 코로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등 뒤로 날아드는 칼, 안 보이지만/ 꿈속에서도 잠을 깨게 하는/ 칼날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봄‧여름·가을, 2020」)고 했으며, “입 열고 싶어 돌 것 같아도/ 진실이 말을 해줄 때까지는/ 말에 마스크 채우고 있기로 했다”(같은 시)고 마음먹게도 했다.
우울하고 갑갑할 때 가끔 무작정 자동차로 길을 나서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길을 나서면 고도 경주에 닿을 때도 있다. 늦은 오후의 이 고도를 쓸쓸하게 떠돌면 위안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가을 풍경 속의 사찰은 그중에서도 제격이다. 첨성대 앞 핑크뮬리 군락지의 ‘분홍빛 물결’에 마음이 사로잡히다가 한 고즈넉한 암자에 깃들어 쓴 짧은 시 한 편을 옮겨 본다.
 
“저녁노을을 이고/ 새들은 어디서 날아드는 걸까// 절집 쪽문 열고 귀 기울이면/ 땅거미 디디며 오는 풍경 소리,/ 그 앞을 가로질러 안기어드는// 독경 소리, 목어 소리// 비단벌레차를 타고 황홀해하던/ 첨성대 앞마당 핑크뮬리들이/ 예까지 따라와 어우러진다// 그 분홍쥐꼬리새 자주꽃들도/ 바람에 묻어온다”(「산문山門 점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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