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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5

새봄을 기다리며―경북신문 2019. 2. 25
아트코리아 | 조회 584
<이태수 칼럼>
 
새봄을 기다리며―경북신문 2019. 2. 25
 

 
경칩이 다가오지만 아직은 춥다. 하지만 봄의 기미들이 가까이 느껴진다. 창밖을 바라보면 봄의 발소리가 저만큼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제 곧 앙상한 나무에도 잎들이 돋아나고 산수유, 목련, 개나리, 벚꽃들이 다투듯 피어날 것이다.
얼마 전에는 또 포항 인근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렸다. 경주와 포항 등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에 겪었던 재앙과 그 고통을 새삼 생생하게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번 지진은 강도가 약하지 않았으나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하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우리 인간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재앙에서 언제나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런 불안감과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향한 기다림 때문에 견디고 이겨내는지 모른다. 막스 피카르트는 “봄은 겨울에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의미심장한 견자의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 말과 창세기에 “태초에 로고스(말)가 있었다”는 구절을 함께 떠올리면서 ‘침묵’을 ‘겨울’로, ‘봄’을 ‘말’로 바꾸어 생각해본다.
피카르트의 말대로 침묵은 언제나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러나 말은 침묵에서 나와 침묵으로 되돌아간다. 말은 침묵 없이 홀로 있을 수 없고, 침묵의 배경 없이 깊이를 가질 수도 없다. 그러나 침묵은 언제나 절대적인 말을 잉태한다. 미지의 세계를 품으면서 그 속에 끌어안고 있는 사물들에 신성한 힘(생명)을 부여한다.
시인 쉘리는 일찍이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며, 겨울이 올 때 이미 봄을 기다렸듯이, 봄은 언제나 겨울을 전제로 한다. 겨울을 참고 견뎌야 봄을 맞을 수 있고 그 참의미를 느낄 수도 있다. 이같이 겨울이 없는 봄이나 침묵이 없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겨울을 이겨내려는 마음과 다르지 않으며, 침묵과 마주하면서 말을 꿈꾸고 새봄을 꿈꾸는 기다림과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성서의 말을 깊이 되새겨보게 되는 것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거듭나려는 순응의 미덕을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생각해 보더라도, 바닥이 없다면 하늘이 있을 수 없고, 고통 없이는 삶의 진정한 기쁨도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고통과 기쁨은 먼 거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앞과 뒤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기독교(가톨릭) 신자들은 이맘때면 부활을 기다리며 되돌아감과 회개, 고백을 하면서 거듭나기를 기구한다. 예수의 부활과 그 은총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겸허하게 그 길을 따라나선다. 예수는 먼 옛날 광야에서 40일간이나 단식하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겸손을 통한 구원(부활)을 선택했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월엔 십자가 새 형틀을 짜고 / 죽으러 오시는 주님을 기다린다 / 부활의 부시게 밝은 새벽 그 먼저 / 사흘 낮 사흘 밤을 / 내 품에 안겨 주실 / 절망의 하느님을 기다린다(김남조의 시 ‘망부활(望復活)’ 부분)
 
이제 우리도 다시 살게 하소서 / 사람답게 살기 위해 / 무릎 꿇어 속죄하는 이 어린 양들 / 부끄러운 가슴에 / 불덩이 안겨 주시는 구원의 말씀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높으신 그 말씀 / 정녕 목이 탑니다(김후란의 시 ‘우리도 다시 살게’ 부분)
 
두 시인의 시를 통해서도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김남조 시인은 십자가의 겸손을 통한 구원을 선택한 예수를 역설적으로 처연하게 노래했다. 부활을 기다리는 절절한 간구와 소망이 감동을 자아낸다. 김후란 시인은 겸허하면서도 뜨겁게 평화를 기구하는가 하면, 거듭남(부활)을 희구하는 심경을 떠올려 보여 되풀이해 읽어보게 한다. 아무튼 우리가 기다리던 새봄은 이제 다가오고 있다. 자연뿐 아니라 신음소리가 높아지는 우리의 삶에도 봄이 오기를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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