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7    업데이트: 20-12-29 10:14

칼럼-5

​부끄러움의 미덕-가톨릭신문 2018. 6. 17
아트코리아 | 조회 364
부끄러움의 미덕-가톨릭신문 2018. 6. 17
 
 
 부끄러움은 양심의 소리에서 비롯되므로 부끄러움을 아는 건 ‘인간 확인 행위’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몸을 가리기 시작했을 때가 바로 원죄를 저지른 인간의 ‘숙명적인 길 걷기’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 운명의 길 위에서 헤매고 있으며, 그 길은 끝이 없다. 인간의 삶과 문화는, 그런 원죄 탓으로, 부끄러움을 아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그 미덕을 저버리거나 느끼지 못하면 스스로를 인간의 범주 밖으로 내몰리게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법이나 규범의 힘에 앞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더구나 그 행위는 인간 사회의 균형을 지탱하는 기본적이고 원형적인 안전판이다. 맹자는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가르쳤다, 공자로부터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말’은 ‘인수지변(人獸之辨)’이다. 이는 ‘사람과 짐승은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그 기준점을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에 두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논리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부끄러움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거나 아예 마비 지경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부정부패, 파렴치한 사기범, 폭력배, 가정 파괴범이 비일비재다. 특히 정치권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끄러움 상실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게다가 누가 꾸짖어 보았자 자기 눈의 들보를 인정하려 하기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되레 적대감과 편 가르기를 일삼는 행태는 딱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어쩌면 ‘욕심의 왕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위를 돌아보면, 제몫 챙기기에만 골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제몫만 생각하므로 서로 믿지 못하는가 하면, 경계하고 맞서면서 이전투구 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원칙이 무너지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는가 하면, 그 소용돌이 속에는 거짓말과 말 바꾸기, 집단이기주의가 판을 친다고 해도 지나치지 만은 않을 것이다. 그뿐인가. 우리 사회는 자신과 자신이 소속된 ‘패거리’의 이익만 추구하는 ‘삭막한 풍경’ 속에 내팽개쳐지고, 그 세력 다툼이 창궐하고 있다.
 정말 이렇게 간다면 우리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편 가르기, 그에 따르는 갈등과 대립은 이미 불안한 차원을 넘어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한탄들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인격이나 능력보다는 같은 패거리만 중시되고, 줄서기가 횡행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남의 탓’ 타령이 ‘내 탓’ 위에 포개어진 채 ‘부끄러움’도 없이 불거지는 세태라면 누구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걸까. 두말할 나위 없이 이젠 ‘윗물부터 맑아지려는 때’가 돼야 한다. 성서가 아프게 타이르고 있지만 ‘제 탓이오’가 실종한 사회는 어둠의 도가니이며, 희망이 없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아집은 바로 어리석음이요 무명(無明)이며, 미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미혹을 불살라 버리고 어둠 속에 빛살을 뿌릴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맞춰지게 마련이다. 그게 다름 아닌 지혜의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삶을 진실로 멋진 데로 끌어올리려면 분에 넘치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지고, ‘욕심의 왕궁’을 허물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래톱 위의 왕궁과 그 성곽이 높고 거창하며 호화로울수록 쉽게 무너진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자성과 타이름의 번복이 어디 한두 번이기만 했던가.
 ‘욕심의 왕궁’으로부터의 자유, 그 미혹의 수렁에서의 일탈이 ‘부끄러움의 미덕’과 만나야 한다는 게 평소의 소신이며 믿음이지만 마음만 앞서가는 것 같아 민망스러워지곤 한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 또 그럴는지 모르지만, 이런 말을 늘어놓는 지금도 부끄럽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