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5    업데이트: 21-02-03 16:26

자유로운 이야기

나의 길, 나의 시
이태수 | 조회 1,786

나의 길, 나의 시
이태수 <시인, 전 매일신문 논설주간>
 
 
 
아버지, 그리움 속 멀고 가까운 이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상실과 좌절, 그리움의 정서가 는개처럼 밀려온다. 철이 들어서도 그렇게 젖어서 방황하고 갈등하던 날들까지 마치 낡은 흑백 필름의 영상처럼 흐리면서도 절절하게 다가오는가 하면, 고향과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예 그대로 선연하게 떠오르곤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같이 옛 생각만 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먼 시공을 거슬러 오르듯이 철부지 어린아이 때로 되돌아가게 되는 까닭은 ‘왜’일까.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먼먼 그리움 속에 언제나 그대로 계시고, 아버지를 여윈 가슴의 상처들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고향에 대한 글을 쓴 건 두세 편의 시가 고작이다. 더구나 아버지에 대해서는 글을 써본 적이 거의 없다.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은 그만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많고, 여태 짙은 아픔과 그림자로 남아 있어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탓일 것이다.
오랜만에 사진첩을 뒤져 아버지의 사진을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누님과 동생들에게 전화를 해봐도 보이지 않는단다. 원래 아버지 사진을 몇 장밖에 없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동생들이 가져가 보관하다가 없어져버린 모양이다. 원망할 수도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무대와 배경은 아버지를 일찍 여윈 뒤 급격하게 기운 가세와 상실감, 좌절감으로 얼룩진 채 허우적거리던 시골 마을(의성군 사곡면 음지리), 인근의 읍내(의성)다. 그리 높지 않게 둘러쳐져 있는 야산들과 흐름이 자주 끊기는 시내를 보듬듯이 끼고 산발치까지 이어져 앉아 있는 들판도 예 그대로 다가선다. 거기서 나는 그 얼마나 헤매고 목말라했으며, 실의에 빠져 주저앉곤 했던가. 어린 동생들이 얼마나 가여웠던가.
 
20대로 접어들면서 우여곡절 끝에 대구로 이사했지만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골의 논밭을 하나둘 처분하면서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고, 오래지 않아 그마저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그런 고향을 가슴에 보듬어 안고 사셨다. 자식들 진학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고향을 떠나면 못 살줄 아시는 어머니였다. 아니, 그보다는 지난날들에 대한 애틋한 미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등지고 떠나온 고향을 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싫어했던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어둡고 우울한 기억들이 온통 지배하고 있는 그곳은, 언제나 가서 안기고 싶거나 따스하게 느껴지는 사람들과는 달리,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싶은 공간일 뿐이었다. 그 공간이 끌어안거나 떠받들고 있는 시간들(세월)은 더욱 그랬다. 이 모두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별세와 그 이후의 짙은 그림자들 때문이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가끔 꾸짖으셨다. 그래도 고향만한 곳은 없으며, 고향을 등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대구 생활에 지치신 어머니가 나도 아버지가 됐을 때 병환으로 돌아가신 뒤에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함께 계시는(묘소가 있는) 고향이 사뭇 바뀐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 살고 바뀌어버린 고향집 언저리를 배회할 때도 적지 않았다.
고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상실과 좌절, 쓰라림과 그리움을 끝없이 되새김질하게 하는 곳이 돼버렸을지라도, 그런 정서를 어느 정도 끌어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랄까,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을 받아들여 그것까지 소중하게 보듬어 안게 됐기 때문이랄까, 아마도 그런 완만한 심경 변화가 고향 쪽으로 다시 눈을 돌리게 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절대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는 내게 늘 그렇게 다가오셨다. 나 또한 그렇게 따랐었다. 가까이 계시든 그렇지 않든 아버지의 그늘 속에 놓여 있었으며, 아버지가 안 계시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버지는 인자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풍류를 즐기는 선비의 후예이셨다. 가부장적인 부권을 놓지 않으면서도 인정과 눈물이 많으셨고, 현대판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럽고 그리운 대상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한동안 일본에서 사셨다.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지금의 중국과 베트남 등지를 두루 방랑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익히셨으면서도 고리타분한 선비와는 다르게 현대적인 지성과 감성을 지녔던 멋쟁이로 국경을 넘나들며 망국의 한을 방랑으로 보내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조국으로 돌아오셔서도 시골 생활은 좋아하시지 않으셨던 것 같다. 고향을 완전히 떠나시지는 않으셨지만 대처와 시골을 오가시면서 농경생활과 다른 삶을 향유하곤 하셨다. 아버지와의 고향집에서의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그리움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눈뜨게 하신 분이시다. 어머니에 따르면, 어린 내가 아무도 몰래 자주 동구 밖으로 나가 아버지를 기다리고, “아버지, 아버지”라고 중얼거리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고 한다. 뭔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그랬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시골에 머물며 살았고, 아버지는 대처(대구시와 의성읍)에서 운수업을 하셨으므로 집에 안 계실 때가 많았다. 더구나 함께 있을 때는 각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몇 살 때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시는 어머니의 성화와 아버지의 건강 악화 때문이었다. 농촌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신 아버지시지만 농사일은 익숙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자주 앓아눕곤 하셨다. 어머니가 간호에 정성을 쏟아 부으시던 기억들도 선연하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아버지는 급기야 대구에서 병원 생활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님들과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마저 드물게 만나면서 살아야만 했다. 우울한 나날들이었다. 그런 생활이 3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하셨다.
어느 눈보라치던 날, 아버지는 영영 눈감으신 채 고향으로 오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학예회 연극 연습(나는 극중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을 하다가 교실 문을 두드리는 큰집 조카의 전갈을 받고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와 관 위에 쓰러져 실신해버렸다.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온 세상이 캄캄했다. 마흔둘의 아버지는 그렇게 먼 세계로 홀연 떠나버리셨다.
 
나는 성주이씨 25세로 문렬공 후손으로 태어났다. 문렬공은 고려조의 정당문학으로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시작되는 시조로 널리 알려진 이조년(2세) 할아버지이시다. 대제학을 지낸 그의 손자 이인민(4세) 할아버지,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로 시작되는 시조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맏아들 문경공 이 직(5세) 할아버지(조선조 영의정)의 후손(그 이후 선조들에 대해서는 생략)이기도 하다.
나는 장남으로 위로는 누님이 둘이다. 원래 셋이었지만 큰누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말로만 들었다. 오래 기다리다 태어나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사람들의 사랑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총기가 남다르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들은 그야말로 단편적으로 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귀하게’ 자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버지가 직접 천자문을 가르쳐주시던 기억도 또렷하다. 자주 칭찬도 하셨다. 암기력이 좋고, 상상력이 가상하다는 말씀이셨던 것 같다. 애국가(당시의 곡은 지금과 달랐던 것으로 기억됨)를 가르치신 뒤에는 공부할 때 먼저 부르게 하는가 하면, 나들이를 가실 때는 자주 어린 나를 앞장세우기도 하셨다. 미지의 세계, 내일에의 꿈을 꾸도록 부추겨주시던 말씀들도 금싸라기처럼 남아 있다.
마을의 또래나 약간 위의 형들에게는 주인공일 때가 많았다. 내가 괜한 고집을 부리거나 잘못이 있을 때도 다들 너그러웠다. 감싸주고 보호해주는 형들이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장롱 속을 들여다보면 즐겨 입으시는 아버지의 양복(더블) 등 옷가지들, 장롱 위에 얹혀 있던 제도기․가방 등을 아이들과 함께 신기하게 만져보곤 하던 기억들도 선연하다. 또 어떤 때는 아버지가 차를 몰고 오셔서 아이들을 태워주고 나를 운전석 옆에 앉혀 기어 넣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던,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하던 기억들, 함께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기억들 역시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또래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던 내가 그 반대의 자리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데다 가세가 기울고 점점 더 어려워지는 가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물론 누님들이 나보다 마음고생이 훨씬 심했겠지만 기가 죽어 우울한 소년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막내 동생과 막내 누이는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별세는 절망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리게 했다. 아버지를 영영 만날 수 없다는 애절한 상실감은 어린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은 듯 엄청난 상처였다. 성품과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버지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데도 오랜 방황이 따라야 했으며, 성장 과정이 그만큼 힘겨웠던 것도 사실이다.
소년 시절에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꿈을 자주자주 꾸곤 했다. 지금도 아버지만 생각하면 슬픔과 아픔이 물밀듯하는 감상에 빠져들곤 한다. 아버지는 여전히 어린 눈과 가슴에 비친 그대로 변함없이 먼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살아계신다.
이율배반적인 이야기일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윈 뒤의 절망감과 좌절감, 상실감과 상처감의 그루터기에서, 또한 선조들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으로, 시심이 싹트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니 멋대로 살아라’의 깊은 울림
 
방황을 거듭하던 20대를 되돌아보면 여전히 마음이 어둡고 무겁다. 그 무거움과 어두움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졌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몇 년간 병상에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극도로 기울어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중․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생존 자체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고향에서 중․고등학교에 간신히 진학할 수는 있었으나, 그야말로 고학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며 중학교에 다니고(줄곧 전 학년 1등) 나서 대구의 가장 이름난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집을 멀리 떠나서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았으며, 시골 학교마저 제대로 다니기 어려웠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갈등과 방황이 시작됐다.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낼 정도여서 좌절감에 빠지곤 했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나와서는 몇 달간 방황하다가 대구로 가출을 시도했다. 친구의 소개로 가정교사 자리를 구해 그 집에 머물며,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신경쇄약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더 버티기 어려워 몇 달 만에 낙향해야 했다. 대학 진학을 역시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 시절(중학생 때부터) 내게 한 가닥 ‘희망’을 안겨준 분이 있다. 당시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 철학과 학생이던 김광수 선생이었다. 친구의 형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나도 같은 길을 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었다. 김광수 선생은 여러 가지 조언으로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래서 그 뒤 우여곡절 끝에 김광수 선생이 다녔던 대학의 철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아르바이트 등으로 어렵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일찍이 김광수 선생으로부터 이야기를 적잖이 듣기도 했던 이종후 교수님을 가까이 만나고,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어눌한 듯 혜안이 번뜩이는 교수님의 면모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고, 존경하며 따르는 제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대학 시절도 우울한 방황을 거듭하던 기억들뿐이다. 앞날이 불확정한 데다 대구로 합류한 가족들과의 삶이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사춘기 무렵부터 문학의 길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열병을 앓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틈만 나면 비슷한 부류의 학생들과 어울려 문학적 치기를 쏟곤 했다. 다른 대학 학생들과도 함께 어울리는 문학동인 ‘삼대’에 가담해 철없는 열정에 불을 지피곤 했다.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김춘수 선생님의 ‘시론’ 등 현대문학 강의를 선택해서 들었으며, 선생님처럼 시인이 되고 싶기도했다. 대학에서 공모하는 ‘천마문학상’에 시를 투고해 당선되고, 매일신문과 대구일보에 시가 실리기도 했다.
이종후 교수님은 언제나 무뚝뚝하면서도 자상하고 무게 있게 나아갈 길을 가르쳐주셨다. 김춘수 선생님이 중학교(경기중) 바로 한 해 후배라면서 소개해 주시고, 철학적 바탕을 다져 그 길을 걸어보라고도 하셨다. 교수님도 젊은 시절에는 문인들과 가까이 교우했으며, 문학은 인생을 걸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철학과에 다니면서도 선택과목으로 국문과 강의를 듣곤 했다. 김춘수 선생님(당시는 경북대 교수로 대구대에도 출강)께는 ‘현대시론’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그 인연으로 늘 문학의 스승으로 따랐다.
어느 날,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이종후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가 “어떤 길을 걷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까?”라고 여쭈었던 적이 있다. 그때 교수님은 한동안 눈을 감으셨다 뜨셨다,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시다가 딱 한 말씀만 하셨다.
“니 멋대로 살아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 교수님은 가까운 주점에 함께 가자고 하셨다. 안주로는 어묵꼬치가 나왔다. 막걸리를 한 잔을 먼저 비우신 교수님을 따라 단숨에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러자 교수님은 침묵을 깨셨다.
“우리 한 꼬쟁이씩 하자.”
어묵 한 꼬치를 안주로 먹으라는 뜻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만, 이 얼마나 제자를 가까이, 깊숙하게 끌어당기는 말씀인가.
교수님은 평소 말을 별로 꾸며서 하지 않으셨다. 때로는 앞의 두 말씀처럼 퉁명스럽기 그지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안을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역시 교수님다우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많은 말보다는 극도로 함축되고 압축된 뜻을 담은 말씀을 불쑥 내뱉듯이 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승이 오랜 참선 뒤에 깨우친 경지의 말씀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뱉어내는 말과도 같다고나 할까. 교수님의 말씀을 이같이 하나같이 금싸라기 같았다.
 
나는 어쩌면 교수님의 그 “한 꼬쟁이씩 하자”는 푸근하고 따뜻한 배려와 사랑의 힘으로, “니 멋대로 살아라”고 하신 깊은 울림의 가르침 덕분으로, 좌절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군복무(학훈단 장교) 하고 돌아와 신문사에 입사하게 돼 찾아갔을 때도 교수님은 짧게 문학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 꿈을 버렸느냐는 뜻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수님은 그런 분이셨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바로 시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교수님의 음덕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많이 모자라지만 교수님의 가르침이 언제나 마음속 깊이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므로 아직도 이 길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종후 교수님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 떨칠 수 없다. 신문사(매일신문) 생활을 34년 만에 접고, 대학에 강의를 나가기도 하지만, 이젠 ‘전업시인’에 다름없다.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열 권의 시집과 1권 육필시집(시선집)을 내고, 몇 종의 문학상을 받기는 했으나 교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면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한다.
젊은 시절에는 하루에 한 번 이상 만나던 날로 몇 년이나 될 정도로 늘 따스한 마음을 주시던 김춘수 선생님, 각별한 제자로 가까이 아껴주시던 신동집 선생님, 일찍이 내가 이종후 교수님 제자가 되고 우울한 방황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김광수 선생께도 늘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현대문학》 추천 등단 전후
 
대학 재학 시절에는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고 싶은 목마름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몇몇 지기들도 가을이 깊어지면 신춘문예 열병을 앓곤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에 두 차례 응모했으나 그 꿈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1970년에는 군에 입대하면 3년 가까이 공백기가 될 것이라는 강박감을 남몰래 누르며 두어 군데 투고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일간지(매일신문) 신춘문예(시 부문)에 마지막 후보(시 「겨울 목탄화」)에 올랐으나 다른 사람의 작품이 뽑혔다.(세월이 좀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심사위원인 김춘수 선생은 내 작품을 밀고, 신동집 선생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밀었으나 신동집 선생의 주장 대로 내 작품은 언어의 공전이 다소 심하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낙방한 모양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1971년 3월, ROTC 장교로 입대해야 했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도 전역하면 다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끊임없이 습작을 했다. 제대 무렵에는 100여 편 가까이 모일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군복을 벗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감정 노출이 심하거나 지나치게 현학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출발하기로 마음먹고 미련 없이 노트 째 폐기처분해 버렸다.
 
1973년 여름, 육군 중위로 전역한 뒤 한동안 방황했다. 가장 쉽게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교편생활을 할 것인가, 서울로 가서 자리를 잡을 것인가, 한동안 고민하다가 한 달 예정으로 한 후배(소설가 김원일 선생의 막내동생으로 뒷날 시인으로 활동했으나 요절했음)와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진로에 대한 생각이 때문에 보름 만에 가족이 기다리는 대구로 돌아왔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누군가 신문사 기자 시험에 응시해보자고 제의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기분으로 매일신문 수습기자 공채에 응시했다. 경쟁률이 꾀 높았는데도 신문의 ‘사고’를 보니 1차 시험 합격자 발표 명단 맨 앞자리에 내 이름이 나와 있었다.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얼떨결에 면접을 거쳐 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수습기자 기간은 여섯 달이었지만, 나는 두 달 만에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부서(문화부) 배치가 됐다. 문화부의 일손이 모자라고, 적성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 같다.
문학과 미술 담당 기자로 자리매김하면서 틈이 나는 대로 문학에 뜻을 둔 지기들과 어울리면서 대학시절의 연장선상에서 시에 대한 꿈을 다시 키울 수 있었다. 더구나 신문사에서도 문학, 미술 등을 담당하는 문화부 일을 하게 돼 자연스럽게 같은 연배를 중심으로 선배나 후배들과 만나는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있었다.
 
이 무렵 김춘수 선생은 《현대문학》과 《현대시학》의 추천위원으로 위촉되셨다며, 작품을 준비해 보라고 하셨다. 신문사 일이 바쁜 데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잘 쓰이지 않아 고민하던 중 1973년도 저물었다. 대학 동기이자 ROTC 동기인 박해수가 어느 날 자기 작품을 함께 읽어보자고 전화를 했다. 퇴근 후 나도 습작한 작품을 10여 편 가지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날 두 사람은 한 차례 술자리를 가진 뒤 다른 곳으로 옮겨가다가 길에서 신동집 선생과 마주쳤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기며 한 생맥주집으로 함께 가자고 하셨다.
신동집 선생은 요즘 시를 열심히 쓰느냐고 물으면서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고 하셨다. 박해수가 주저 없이 둘 다 지금 작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버렸다. 민망스러웠지만 피할 수 없이 습작품들을 넘기게 됐다. 그날 신동집 선생은 우리 둘의 작품들을 귀가해 읽어보겠다며 가져가셨다.
한두 달 뒤, 김춘수 선생의 전화를 받고 한 다실도 나갔다. 선생은 단단히 화가 나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자네, 내가 한 말을 잊었나? 내가 자네를 등단시켜줄 수 있다고 했는데, 아무런 상의도 없이 신동집 교수의 추천을 받다니……”
그때까지 나는 《현대문학》을 보지 못했으므로,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신동집 선생께 추천을 부탁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추천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일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동집 선생의 완료추천으로 등단을 하게 됐지만, 등단에 앞서 또 다른 일도 있었다. 한 문예지 편집장으로부터 시가 뽑혔다는 전화가 왔다. 난감했다. 《현대문학》 초회 추천 이전에 투고한 작품이 신인상에 뽑히게 된 것 같지만, 당시는 등단을 한 문예지를 통해서 하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그 사실을 밝히고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무렵에는 신춘문예가 아니면 반드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이기도 했다.
그해 11월 넉 달이라는 단기간에 추천이 완료돼 등단했지만, 신춘문예 응모 때 당선시키려 한 분이 아니라 낙선시킨 분께 뜻밖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사실도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로 남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 후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던 그 두 분의 사랑을 받으며 남들보다는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김춘수 선생과의 에피소드는 또 하나 있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 앞 외국서적 전문 서점에 자주 들르셔서 이따금 신문사로 전화를 하시고, 시간이 나면 불러내곤 하셨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즐겨 찾으시는 다실이나 양식당에 따라 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춘수 선생은 친구인 박해수 씨가 김동리 선생이 경영(발행인)하는 《한국문학》 신인상에 첫 시 당선자로 뽑힌 것 같다고 책을 가지고 있으니 나와 보라고 하셨다. 마침 퇴근 무렵이라 급히 달려갔다. 당선자의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아 ‘본인의 연락을 바란다’는 ‘알림’도 실려 있었다. 당시 김춘수 선생께는 기증본으로 《한국문학》이 보내왔으며, 강의를 들은 적이 있고 문학 지망생인 박해수를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에 내게 미리 알려주셨던 것이다.
그날 바로 박해수가 근무하는 학교(내가 소개해서 왜관 순심중고에 근무)로 전화를 했더니, 놀리지 말라고 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에 응모해 최종심에서 여러 번 떨어진 그는 낙심하고 있을 때이기도 해서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퇴근해서 신문사 인근의 주막으로 달려왔다.
박해수는 투고하면서 하도 낙방을 많이 해 주소를 적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태연한 척 했지만, 내심 너무 기뻤던 탓인지, 그는 난로를 짚어 손에 약간의 화상을 입기도 했다. 당선작 중의 하나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다에 누워」이며, 뒷날 내가 박동규 교수께 소개하고 부탁해 심상사를 통해 이 제목의 첫 시집을 내게 되기도 했다.
 

목월 선생에 대한 기억` `
 
지금도 박목월 선생을 생각하면 ‘청노루’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시곤 한다. 청노루를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래된 이야기이나 대구와 경주에서 몇 차례 가까이서 만난 게 고작이지만, 그때마다 시의 이미지들과 함께 다가오셨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초반, 문단에 갓 나와 신문사(매일신문) 문화부의 새내기 기자로 일하던 때였다. 대구에서 선생님의 문학 강연이 열렸을 때 가게 됐다. 강연 내용을 요약해서 신문에 싣기 위해서였지만, 처음 가까이 만나게 된다는 설렘이 예사롭지 않았다.
강연장에서의 목월 선생은 그야말로 매력적이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많이 쓰셨고, 자상하고 다정다감하셨으며, 거리감 없이 가깝게 끌어당기는 친근감과 젖어들게 하는 듯한 ‘어떤 매력’ 같은 걸 뿜어내셨다. 그랬던 기억이 선명하며, 당시 강연을 듣는 사람들도 그런 표정이었던 것 같다.
시에 대해 속삭이듯 들려주시던 모습은 마치 초기 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청노루 같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게다가 정감이 넘치는 데다 해맑은 체취, 순박하고 어진 듯한 분위기, 보랏빛 보자기, 조금 짧은 헤어스타일 등도 그런 인상으로 느끼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악수를 청하시던 손의 감촉이 더욱 그랬었다.
 
그 뒤 1974년 가을, 선생님이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시인협회의 세미나가 경주에서 열려 갓 등단(《현대문학》 추천)한 새내기 시인으로 의자 하나를 차지했다. 예정된 행사가 끝나고 이승훈 선생 등 몇몇 선배 시인들과 술을 마시다 보니 서너 사람만 남게 됐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등을 두드리시며 “이젠 그만 마셔라.”고 타이르시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 선생님을 따라 팔우정 해장국집에 가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선생님의 일기 몇 토막이 떠올라 두 차례의 만남에서 더욱 인상 깊게 여겨졌을는지도 모른다. 몇 연도였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학생 때는 ‘학창일기’라는 일기장을 사서 짧게 일기를 쓰곤 했는데, 그 일기장 권말에 본보기로 실렸던 선생님의 글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맥주를 처음 마시면서 그 맛이 말 오줌 같다는 표현이 특히 그랬다.
당시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선생님의 시를 각별히 좋아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암송할 수 있는 시가 거의 없지만, 갑자기 시 한 편을 낭송하라면 어김없이 「나그네」를 읊곤 한다. 더구나 갓 등단한 내게 “이 군, 좋은 시 많이 쓰기 바라네.”라고 하시던 그 따스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는 듯하다.

 
《자유시》 동인 시절
 
1976년 첫 동인지를 내면서 출범한 《자유시》 동인은 당시 문예지나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서른 살 안팎의 대구, 경북 출신 젊은 시인들로 구성돼 몇몇 동인의 부침을 감내하면서 1980년대 초반까지 활동을 벌였다.
동인지 창간호의 머리글 ‘자유시의 명제’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다소 관념적이고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에로의 자유,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기치로 내세우고, 어떤 이념이나 방법론으로 억지스럽게 괄호를 치거나 공통분모를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존중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 같은 입장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그 성격이 불투명하고 애매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대를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동세대 시인이라는 점만으로도, 개성의 편차는 있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어떤 공통분모가 도출될 것이며,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의 ‘에꼴’을 이끌어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진정한 창작은 그야말로 ‘모든 것에로의 자유,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개성)에서 가능하다는 너그러움과 여유를 가졌던 셈이다.
동인지 제3집에서 우리는 “시는 개인에서 출발하며, 시와 모든 예술은 어떠한 시대든 당대 개인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에라야 가능하다.”고 다시 천명했으며, 동인지 제6집에서도 다음과 같은 동일선상의 머리글을 실음으로써 동인 활동의 성격과 방향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개인성의 회복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을 바란다. 시와 예술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이고 집단적인 것은 개인을 온당하게 포용할 때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개인에게는 고통으로 작용하며 폭력이 된다. 개인은 전체가 방목하는 꿈이되기를 희망해야 한다. 개인의 삶과 꿈의 온전한 회복이야말로 전체가 꿈꾸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성의 온전한 회복이야말로 전체의 화해를 가져오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을 옹호한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개인성의 옹호가 될 것이다. 목자는 99 마리의 양을 위해 한 마리의 양을 버리지 않는다. 차라리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 더 중한 것이다.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이 희생되어도 좋다는 논리는 이 때문에 모순이다. 그것이 해답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자유시》 제6집 ‘6집을 내면서’ 중에서

돌이켜보면, 이 무렵 우리는 저마다 다른 빛깔의 개성을 가졌지만, 문학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자유시’를 위해서는 한목소리를 내려는 열정을 함께 불지피려했던 것 같다. 낭만적인 감성의 바탕에다 사회나 역사를 향한 눈뜸과 준열한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고, 대부분 순수시를 지향하면서도 참여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으며, 두 가지의 극단적인 경향을 변증법적으로 합일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해를 거듭해도 어디까지나 동인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지, 자유로운 지향을 존중하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찻집이나 술집, 화랑에 모여 시를 향한 열정에 불을 지피곤 했고, 문단과 사회에 대한 생각들을 서로 나눠 갖기도 했다. 당시 문단에는 순수와 참여, 개인과 민중 문제가 가장 두드러진 화두였고, 우리도 이 화두를 중심으로 열띤 대화를 끌어나가곤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순수시의 대표주자인 김춘수와 참여시의 주요 시인으로 꼽혔던 서울의 김수영이 가장 빈번하게 화제에 올랐으며,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이성부, 조태일, 이승훈 선생 등 우리보다 앞선 세대들의 작업에 관심이 쏠렸었다.
그런가 하면, 당시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던 계간지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세계의 문학》 등이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하나둘 이들 계간지를 통해 발판을 굳히는 성과(나와 이하석은 《문학과 지성》, 이동순과 정호승은 《창작과 비평》, 이기철은 『세계의 문학』)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시》 동인들은 모두 문예지나 일간지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들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활동으로보다는 《자유시》를 통해 문단 깊숙이 진입할 수 있었다고 하는 편이 정직한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자유시》 동인의 출범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75년 가을 이하석과 내가 만나 동인을 결성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동인 구성 문제를 놓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몇 차례의 조율을 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문예지나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동세대의 대구, 경북 출신 시인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시인들로 동인을 결성해보자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늘 만나거나 가까이 느끼는 시인들과 접촉해 우선 결정된 대구의 시인들이 몇 차례 만났으며, 대구, 경북 출신으로 서울에서 거주하는 이경록, 정호승에게 의향을 물어 참여하겠다는 언약을 얻어냈다.
동인은 문예지 출신인 박정남(현대시학), 박해수(한국문학), 이경록(월간문학), 이기철(현대문학), 이하석(현대시학), 나(현대문학)와 신춘문예 출신인 이동순(동아일보), 정호승(대한일보) 등 8명으로 확정돼 1976년 1월 어느 날 대구 아카데미극장 맞은편 주점에서 동인 모두가 모인 첫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날 우리는 동인 명칭, 동인지 발간 계획, 활동 방향 등에 대해 논의했으며, 출발을 선언했다. 그 뒤 얼마간의 조율을 거쳐 원고를 모으고, 동인 명칭을 ‘자유시’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자유시》 창간호는 그해 봄, 갖가지 꽃들이 피어오르던 4월에 빛을 보게 됐다. 서예가 이성조의 제자를 담아 조촐하게 펴낸 이 동인지의 서두에는 ‘자유시의 명제’라는 우리의 지향점과 입장을 밝힌 글을 싣고, 작품은 동인들 이름의 ‘가나다’역순으로 신작 5편씩을 실었다. 대구, 경북 출신들로만 동인 구성을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문단의 반응은 좋았다. 정선된 1970년대 시인들의 소집단이라는 인상을 심었으며, 문단의 조명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시》 창간호의 호응에 고무되어 더욱 용기를 얻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는 동인지 창간호의 머리글에서
 
우리의 만남이 향리에서 이루어졌을 때, 함께 나누던 말들의 따사로움을 우리는 기꺼워한다. 말들의 따사로움이 우리를 결합시키고, 말들의 따사로움이 이루어져서 우리들이 가야할 더 큰 말의 본향길이 넓게 틔어졌으면 한다. -《자유시》 창간호 ‘자유시의 명제’ 중에서
 
고도 썼듯이, 향리에서의 만남을 통해 따사로운 말들이 더 큰 말의 본향 길로 점차 틔어지는 성취감을 어느 정도는 맛보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자유시》 동인에 이어 《반시》 동인이 출범하면서 다소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들은 1973년부터 얼마간 ‘73그룹’을 결성, 사화집을 내다가 중단된 상태였다)이 재결집해 《반시》 동인을 결성하면서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동순과 정호승을 양보하라는 강력한 제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놓고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정호승을 《반시》에, 대구의 이동순을 《자유시》에 참여하도록 타협을 보게 됐다. 이런 사정으로 우리는 정호승이 나간 대신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강현국을 받아들이게 됐고, 이경록이 원고를 보낸 뒤 지병으로 작고해 1977년에 발간된 동인지 제2집에는 뜻밖에 그의 유작을 싣는 아픔도 맛보아야 했다.
1978년에는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한 서원동이 새 동인으로 영입되면서 동인지 제3집을 냈고, 대구YMCA 강당에서 ‘독자와의 대화’ 모임을 갖는 등 대외적인 활동의 폭도 넓히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4월에는 박정남이 개인 사정으로 빠진 채 대구 맥향화랑에서 필자의 주선과 지역 화가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동인 시화전과 시낭송회를 여는 한편 그 수익금의 일부로 동인 4집과 이경록의 유고시집 『이 식물원을 위하여』를 냈다. 하지만 1980년과 그 이듬해엔 동인지 발간이 중단됐고, 1983년 청하출판사에서 동인지 제6집을, 실천문학사에서 『자유시 선집』을 내게 됐다.
이같이 우리는 6권의 동인지와 1권의 선집을 낸 채 개별 활동으로만 아쉽게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되돌아보면, 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자유시’동인의 의욕과 야심은 만만치 않았다. 지역 문학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반시’동인과 함께 문단에서 가장 주목되는 시동인으로 부상했으며, 김병익, 김현, 김주연, 염무웅 선생 등 많은 문학평론가들의 관심은 이를 방증했다.
당시 우리는 신인에 불과했지만 지향하는 바 시의 방향은 결코 미숙하고 소박한 차원에 머물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우리의 지향점은 우리의 꿈과 정서와 상상력이 궁극적으로 우리가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에서 마련돼야 한다는 데 있었고, 그러므로 현실과 이상과 언어는 그러한 엄연한 사실 위에 설정되고 긴장을 동반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또한 개인성의 상실은 시의 상실이며, 시가 어떤 관념을 위해 주어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다시 말해 개인성의 상실은 시의 본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입장을 유지했었다. 따라서 투철한 개인의 옹호만이 시의 전체와 통할 수 있고, 그 길트기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그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자유시’의 길이요, ‘시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이라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동인지 《자유시》에 실었던 한 사람당 40여 편의 시들은 개인적이면서 개성적이었고, 다양하면서도 응집력을 이끌어낼 수가 있었던 같다.
그러나 《자유시》 출범 당시와 시를 향한 의욕과 열정에 불을 지피던 그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일말의 아쉬움이 없지 않다. 물론 그때의 동인들이 대부분 지금도 변함없이 정진을 거듭하고 있으며, 자기 세계를 부단히 가꾸는 중견의 위치를 굳히고 있지만 동인 전체가 친화와 응집으로 풍요를 구가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만 한다. 몇몇 동인들은 다시 모여 그 시절과 같은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다고 한다. 나도 은근히, 조금은 씁쓸하게,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첫 시집 출간 무렵
 
첫 시집을 어느 출판사에서 낼까 하는 문제를 두고 적잖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출판사 ‘문장사’를 경영하는 시인 오규원 선생이 시집을 내주겠다는 따뜻한 제의를 해 한동안 즐겁게 망설였다. 문장사의 시리즈 중 첫 시집이 되겠지만,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발간하는 심상사의 첫 기획 시리즈 시집 발간 제의를 이미 받은 상태였고, 또 다른 한 출판사로부터도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망설임 끝에, 박목월 선생 작고 후 《심상》을 계승해 이끄시는`문학평론가 박동규 교수(서울대)께서 직접 전화하신 데다 당시 편집장 이명수 시인이 몇 차례 채근을 해 마음을 굳히게 됐다. 시집 원고는 미리 정리돼 있었으므로 오래잖아 넘겨졌다. 《심상》은 박목월 선생이 창간하셔서 가장 권위 있는 시전문지로 자리매김했을 때이며, 박동규 교수가 이어받아 펴낸 첫 호의 권두칼럼에, 황감하게도, 내 시에 대한 이야기로 채운 ‘각별한 인연’도 있었던 터였다.
그 후 한 주일 조금 더 지났을 무렵이었을까, 문학과지성사로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기획에 내 시집도 내기로 편집위원들(문학평론가 김병익, 김주연, 김 현, 김치수)이 결정했다는 전갈이 왔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과지성사는 1년에 4명의 시인을 선정해 시집을 내는데, 첫해인 1978년에 황동규 선생을 비롯한 4명의 시집을 낸 데 이어 1979년 기획에 내 시집도 예정돼 있다는 것이었다.
계간문학지 《문학과 지성》은 등단 초기에 이하석 등과 결성해 활동하던 ‘자유시’ 동인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원고(시) 청탁을 하고 조명을 해주기도 했으나 시집을 발간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아무튼 이미 시집 원고를 심상사로 넘겨 죄송하다는 말을 전화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첫 시집 『그림자의 그늘』이 심상사에서 출간된 뒤 《문학과 지성》에는 한계전 서울대 교수께서, 《창작과 비평》에는 시인 정희성 선생이 분에 넘치는 서평을 해주셨다. 《심상》에는 문학평론가 김 현 선생(서울대 교수, 《문학과 지성》 편집동인)이 서평을 통해 함께 나온 시집들을 두루 다루셨다. 특히 일면식도 없는 한계전 교수, 정희성 선생 등의 뜻밖의 과분한 서평들을 읽으면서 감격(?)하던 기억도 선연하다.
하지만 김 현 선생은 그 뒤 만난 자리에서 유감의 뜻을 감추지 않으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찍혔구나’하는 생각도 비켜설 수 없었다. 그 이듬해였던가, 소설가 김원일 선생을 따라가 《문학과 지성》 편집동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김병익 선생(당시 문학과지성사 사장)은 다음 시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낼 수 있도록 좋은 시를 쓰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런 인연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으로 두 번째 시집부터 열 번째 시집까지 9권(그 이후 열한 번째 시집 『침묵의 결』도 나와 10권)이나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신문사 생활을 하면서 시를 써야 했기 때문에 정진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좋은 시를 못 쓰고 있다는 자책감에 시달려 오기도 했지만, 행운이 늘 가까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때문에 한 번도 그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늘 송구스럽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고, 짊어지고 있는 빚이 많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우울한 실존적 방황
 
되돌아보면 나의 1970년대는 실존적 방황이랄까, 낭만적 우울 속의 헤맴이랄까, 그런 빛깔과 무늬들로 물들어진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맑고 밝은 시를 쓰지 못하고, 음산하고 공포스런 분위기, 암시적 환기력 등이 시를 뒤덮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자아를 잃고 가상으로 떠내려가면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소외감이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점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시 「낮술」, 연작시 「그림자의 그늘」은 특히 그렇지만, 첫 시집 『그림자의 그늘』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은, 해설에서 김흥규 교수(고려대)가 지적하고 있듯이, ‘건조하고 황량할 뿐인 일상의 외부 세계와 그 안에서 방황하는 정신의 자화상’들이라 할 수 있다.
일련의 이미지들과 그 사이의 연상적 침투와 결합을 통해 작품을 구성하는 방법을 거의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반복적인 상징을 도입하곤 했다. 또한 이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진정한 ‘나’의 부재나 해체를 의미하는 구절들이 도처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이는 바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의 얼굴들’에 다름 아니었다.
 

안개 뜯으며
개들이 짖고 있다.
드문 드문 눈 부비는 별빛
풀잎에 흩어지고
반쯤 피다 시든 꽃 한 잎,
창(窓)유리에 매달리고 있다.
바람에 불리우며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는
한 조각의 꿈, 꿈 한 조각의 아픔
안개 속에 떠돌고 있다.
발, 동동 그르며
안으로 걸린 빗장 밖에서
캄캄한 머리, 떠돌던 이마의 주름이
칼을 쓰고 운다.
눈 부비고 봐도 거울엔
내 얼굴이 없다.
안 보이는 내 얼굴이 컹컹컹
야반(夜半)의 하늘 끝으로
개 짖는 소리, 흘리고 있다.
—「그림자의 그늘 3」 전문

 
연작시 「그림자의 그늘」의 경우 제목이 암시하듯이, 일상의 흐름 속에 부침하면서 알 수 없는 곳으로 표류하는 현실적 자아(그림자)와 스스로의 주체로서 자신과 현실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 채 오히려 그림자에 이끌려 어두운 방황을 거듭하는 내면의 얼굴(그늘)을 교차시키면서 진정한 ‘내 얼굴’을 잃어버린 아픔에 대한 절규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가상(그림자)이 ‘나’를 대신해 삶을 영위하고 ‘나’는 그 그림자의 그늘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그런 상황을 뛰어넘고 싶다는 열망을 역설적으로 환기시키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음습한 분위기를 벗지 못했다.
「낮술」은 그런 분위기와 상통하면서도 내 삶과 이를 둘러싼 상황과의 동적인 관련에 적극적인 의의를 설정함으로써 구체적인 현실의식에의 지향을 예고하기도 했다.
 

풀어지면서 한 잔
만촌동 산비알 포장집
구석에 몰리며 두 잔
낮술에 마음 맡겨 희멀건 낮달처럼
희멀겋게 석 잔, 넉 잔
 
무서워요. 눈 뜨면 요즈음은
칼날이 달려와요. 낮과 밤
꿈속에서도 매일 목 졸리어요.
누군가 자꾸
자꾸 술만 권해요.
 
거울을 깨뜨려요.
구석으로 움츠리며 낮술에 젖어
얼굴 버리고 걸어가요. 요즈음은
아예 얼굴 지우고, 깨어서도
잠자며 걸어가요.
 
걸어가요. 한반도의 그늘 속을
낮술에 끌리어 낮달처럼
희멀겋게 희멀겋게 다섯 잔
여섯 잔, 열두 잔
—「낮술」 전문

 
이 시를 두고 문학평론가 홍기삼 선생이 그해 신인 작품으로는 가장 돋보인다는 극찬을 하기도 했다. 한국일보, 독서신문 등의 조명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에는 대사회적인 관심이 조금씩, 때로는 다소 거칠게 섞여 들기도 했다. 20대의 방황의 소산인 『그림자의 그늘』에서 차츰 발걸음을 옮기면서 여전히 끈끈한 어둠을 떨쳐내지는 못한 채 관념적인 내면성을 어느 정도 벗어나 구체적인 체험 쪽으로 다가서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초월에의 꿈꾸기
 
1980년대는 나를 둘러싼 상황 자체도 어둡고 우울한 시기였다. 정치적, 사회적 소용돌이가 극심한 가운데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이 드높던 1970년대를 거친 1980년대 초반에도 억압정치는 여전했다. 이에 대응하는 반체제운동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급격한 근대화․산업화 물결은 물질적 풍요를 안겨 주었으나 물질만능주의 등 가치관의 혼란을 부르기도 했다.
정치․사회적 혼란뿐 아니라 물질문명의 발달이 야기하는 소외문제, 문명비판적인 시각, 근대화에 되레 더 밀려난 기층민 문제, 현실개혁 의지 등이 문학의 주요 명제와 화두로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추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6․29 선언, 동구권 개방화 바람 등으로 이념이 희석되기 시작하고, 물리적 탄압과 검열제도가 문학마저 질식시킬 정도였으나 후반기로 접어들면서는 이념의 푯대가 거의 무너짐으로써 그 이전과 같은 이념의 경직성이나 과격한 투쟁은 다소 완화되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주체의 분열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는 나로서는 현실에 늘 촉각을 곧추세우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는 어떤 주의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어떤 의식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러 차례 이런 논리의 글을 쓴 적도 있지만, ‘현실의식의 정서화’나 ‘상황의식의 정서화’는 시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자아를 잃고 가상으로 떠내려가면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소외감이 시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나’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가상(그림자)이 ‘나’를 대신해 삶을 영위하고 ‘나’는 그 그림자의 그늘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나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그런 상황을 뛰어넘고 싶다는 열망이 가열되기도 했다.
1982년에 출간된 두 번째 시집 『우울한 비상의 꿈』 뒤표지의 산문(표사)에 “꿈에게 퍼덕이는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썼듯이, 말을 비천하게 만드는 현실에 좌초되면서도 그 암울한 상황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밝고 자유로우며 사랑으로 가득찬 내일을 향한 꿈에 불을 지피곤 했다. 이 때문에 절망하면서도 그것을 초극하려는 완강한 몸짓으로 실존적 방황에 상승 이미지를 부여했던 것 같다.
 

내 마음 깊은 깊이에
새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울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는
눈멀고 말라비튼 귀머거리
새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눈보라 흩날리고
얼어붙은 내 마음 허허벌판에
날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기막힌 새 한 마리,
새 한 마리의 캄캄한 마음이 살고 있다.
강물 풀리고 새 아침이 밝아올 때
단 한 번 울고 오래오래 노래할,
눈뜨고 귀가 트이는 그 시각을 위해
나의 새는 뼛물 말리며
웅크리고만 있다.
가혹한 비상의 꿈을 꾸며
새 하늘을 그리고 있다.
—「내 마음의 새」 전문


이 시집의 해설에서 김병익 선생은 “좌절당하는 자아와, 그 좌절 속에서 끝내 버릴 수 없는 희망 혹은 기다림의 언어 탐구로 나타난다.”고 풀이하고, 그 독자성을 ‘살아 있었음-죽어 있음-살것임’의 대조를 자신의 이미지로 드러낸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무렵의 시에는 살아 있는 진정한 말을 향한 갈망이 번져 있기도 하며, 때로는 시 「망아지의 풋풋한 아침이 되고 싶다」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뛰쳐나오려는 열망이 더 강렬해지면서 동적인 이미지와 어휘를 낳기도 했다. 그 정경은 현실 속에서 찌들고 허우적거리며 말을 잃어버린 우수에 젖어 무기력에 빠져든 우리의 삶에 신선한 환기를 가해주기에 이르렀다.
 

망아지를 키우고 싶다. 내 가슴에
으으으 입술 깨무는
이 목마름을 위하여,
날이면 날마다 가위눌리는
가난한 꿈을 위하여,
 
뛰어가고 싶다. 때로는
물거품처럼 부서지더라도
식어가는 가슴에 하나, 불을 달고
오랜 망설임도
주저앉아 기다리던 기다림도 박차버리고,
 
이마를 부딪고 싶다. 휘어지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맹렬하게
하지만 싸늘하게 눈 부릅뜨고
화살 되어 꽂히고 싶다.
어딘가 가 닿아 뜨겁게 불붙고 싶다.
 
지친 밤에는 하늘의 별들
하나씩 불러 모으고, 가혹한 꿈 돋우어내며
새우잠 속의 뒤척임,
이 아픔도 새벽 하늘에 내어다 걸고
어둠 가르며 번뜩이는
칼날이 되고 싶다. 별빛이 되고 싶다.
 
아아, 망아지가 되고 싶다.
울타리 뛰어넘어 혹은 불처럼
거침없이 치닫는 야생의
고삐 풀린 망아지,
망아지의 풋풋한 아침이 되고 싶다.
—「망아지의 풋풋한 아침이 되고 싶다」 전문

 
1983년 문학평론가들이 선정한 ‘시 베스트 5’(동아일보)에 김주연 교수(숙명여대), 박철희 교수(서강대) 등의 덕분으로 5위에 올라 얼떨떨했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 삽화의 하나다.
 
관념적인 세계의 천착(1970년대), 삐걱거리는 현실에 대한 고통과 그것의 초극을 향한 몸부림(1980년대 초반)을 거친 뒤 다다른 지점은 1986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물속의 푸른 방』의 역설적인 세계였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이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걸어가야 할 길이나 다시 찾아야 할 꿈이 설정되고, 그 이전보다는 다소 밝고 맑은 세계를 더듬는 방향감각을 찾게 됐다. 비록 현실은 추하고 불순하지만 그 바깥이나 그 깊숙이 어떤 순결하고 명징한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그것이었다.
이 무렵 『우울한 비상의 꿈』 시절의 ‘날아오르기의 꿈'을 ‘내려가기의 꿈', 또는 ‘낮은 꿈'으로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말하자면, 상승 이미지에서 하강 이미지로 궤도를 바꾸면서 궁극적으로는 초월에의 꿈에 불을 지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다 보면 추하고 뒤틀린 현실의 어딘가에, 어떤 깊숙한 곳에, 순결하고 명징한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소산이었다.
‘물속의 푸른 방’은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비현실적인 상황의 설정은 역설이라면 지독한 역설이라 할 수 있으며, 새로운 길 찾기의 형이상학적 추구에 다름 아니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교수(연세대)는 ‘분열된 자아의 꿈, 혹은 원의 위상학’이라는 해설을 통해 이 시집의 변모의 줄거리는 “본래 복잡하게 얽힌 전체-시인의 감정․앎․열망 등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를 시인이 의식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로 보기도 했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다.
서늘하고 둥근 물소리……
나는 한 참을 더 내려가서
집 한 채를 짓는다.
물소리 저 안켠에
날아갈 듯 서 있는 나의 집, 나의
푸른 방에는
얼굴 마끔이 씻은 실바람과
별빛이 술렁이고
등불이 하나 아득하게 걸리어 있다.
—「물 속의 푸른 방」 전문

 
# 그런 한편으로는 현실의 아픔을 초극하고 싶은 열망을 “나의 슬픔에게 /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불을 켜서 / 오래 꺼지지 않도록 / 유리벽 안에 아슬하게 매달아주고 싶다, / 나의 슬픔은 언제나 / 늪에서 허우적이는 한 마리 벌레이기 때문에, / 캄캄한 밤 /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거나 / 아득하게 흔들리는 희망이기 때문에,”(「나의 슬픔에게」 중에서)와 같이 낮게 읊조리기도 했다.
큰 문맥으로 보면 현실 초극과 초월 문제가 내 시의 일관된 명제요, 삶의 이상적 경지 탐색이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때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변화를 꿈꾸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개인적, 정서적인 꿈의 세계에 무게중심이 실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도 ‘지금/여기의 세계’라기보다 밝고 투명한 ‘다른 세계’, 또는 ‘이상 세계’에 대한 추구는 비루한 현실을 비켜서려는 게 아니라 그 극복을 위한 역설적 접근이라는 점도 밝혀두고 싶다.
“나의 상상력이나 환상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꿈꾸기에 고리를 달고 있으며, 그 꿈꾸기는 시의 뼈대, 또는 몸집을 만들어준다. 나의 시는 그러므로 꿈꾸기에 다름 아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만, 꿈꾸기의 반복이 현실 초극의, 조그마하지만 완강한, 초월에의 오솔길이며 마치 숙명과도 같은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너’와 ‘나’, 그리고 ‘그’
 
1980년대 후반부터는 여전히 하강 이미지를 집요한 초월의 길 찾기의 방법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새로운 꿈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다. 손상된 본래적 자아가 회복된, 맑고 순수한, 내면의 공간을 꿈꾸는 한편 보다 구체성을 띤 ‘너’와 ‘나’의 문제를 축으로 한 인간관계에 눈을 돌렸다. 신과 인간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으면서 초월에 다다른 존재로서의 ‘그’를 찾아 나서는 데 무게중심을 두게 됐던 것이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명제이기도 한 ‘그’에 대한 추구는 ‘너’와 ‘나’의 문제에 천착한 네 번째 시집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에서 시작됐으며, 다섯 번째 시집 『꿈속의 사닥다리』와 여섯 번째 시집 『그의 집은 둥글다』로 넘어오면서 더욱 본격화됐다.
네 번째 시집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는 ‘꿈을 뒤집어 꾸기', ‘꿈의 무화’라는 빛깔을 묻히거나 ‘꿈 버리기의 꿈’으로 풀이될 수 있는 마음의 그림들을 담아 보려 했다. 이 시집을 내면서 표사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 ‘지금․여기’에서의 삶보다는 ‘언젠가 가 닿고 싶은 곳’에 마음이 가곤 한다. 그 때문에 이즈음은 내려갈 수 있으면 더 내려갈 데가 안 보일 정도로 내려가서 마주치는 내 삶에 대한, 단조로우면서도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눈뜸과 아픔, 그리고 이윽고는 새로 꾸는 ‘낮은 꿈’에 관심이 주어질 때가 많다. 이 같은 ‘내려가기’는 어쩌면 ‘올라가기'의 또 다른 ‘길 찾기’일는지도 모른다.<이하 생략>"

조금은 역설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 같은 생각의 배경은 역시 꿈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이 무렵부터 더욱 ‘내려가기’와 ‘낮은 꿈’ 꾸기에 마음을 주곤 했다. 그러나 그런 길 찾기는 다시 구부러지기 시작해 ‘꿈을 뒤집어 꾸기’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비애로 연결됐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다시 이르게 된 지점이 ‘그’와 ‘너’를 그리워하며,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러면서도 절대자(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인 ‘그’를 목말라 하고 열망하는 길을 나서게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한 ‘나’를 찾아 헤매도 진정한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과 마주치면서, 언제까지나 ‘너’는 ‘너’일 뿐이어서 ‘길 밖의 길’을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의 적지 않은 시편들은 무기력하고 상투화된 현대인의 결핍을 충족시켜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줄 정신적 희구의 대상으로서의 ‘그’를 찾아가는 도정에 힘이 주어졌다고나 할까. 특히 그 과정의 험난함과 애틋함 속에서 섬광처럼 어둠 속에 묻힌 길들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그’라는 사실을 역설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 시집에는 ‘너’와 ‘나’는 언제나, 어디까지나, ‘타인’일 뿐이라는 비애를 그린 작품들도 다수 들어 있으며, 처음 써본 이 연시 연작에는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봄밤에는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개나리 노란 울타리 너머
손톱달 매달려 흔들리고 있네.
복사꽃 펴 있는 내 마음 길에
문득문득 켜지는 불, 이내 꺼지고
남몰래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네가 안 보이는
이 황량한 지상에서
너를 더듬어 하염없이 걸어가는
봄밤에는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봄밤에는」 전문(노랫말로 개작한 시)
 
이룰 수 없는 꿈은 아름답다.
팔을 뻗고 발을 구르는
이 목마름은 아름답다.
뜬눈으로 밤을 건너거나
입술 깨물며 돌아서도
가눌 수 없는 이 눈물은 아름답다.
저만큼 가고 있는 네 등뒤에
눈길을 주며, 강의 이쪽에서
돌이 되는 가슴은 아름답다.
지워도 지워도 되살아나는
아픔과 상처, 강의 저쪽과
이쪽, 그 사이의 하늘에 번지는
절망의 빛깔은 아름답다.
—「절망의 빛깔은 아름답다」 전문

 
이 시집의 해설에서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선생은 “상상력 쇠퇴의 고통을, 거의 태양 상실의 심정으로, 그것도 한두 편이 아니라 연작시 형태로 노래한 작품은 우리 시에서 찾기 힘든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묘사는 그 다음 시집에 더욱 본격화되므로, 극히 부분적으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잠이 돌아누울 때는
끌어안고, 달라붙을 때는 밀어내며
입술을 깨물 듯이,
나는 그와 만난다.

—「나는 그와 만난다」 부분

 
그가 다시 슬리퍼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뒷모습만 드러내던 그는 이내
발자국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는 다시 나에게」 부분

 
다섯 번째 시집 『꿈속의 사닥다리』는 상승과 하강 이미지를 교차시키면서 ‘무화된 꿈’을 다시 일으키고, 잃어버린 말과 길 찾기(초월)를 하는 ‘사닥다리 놓기의 꿈’을 통해 끊임없이 가위눌림을 강요당하는 황폐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따스하게 꿈꿀 수 있는 정신적 이상향을 구축하는 데 주로 주어졌다.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의 연장선상에서 무화된 꿈을 다시 일으키고 상승작용을 모색하는 ‘사닥다리 놓기의 꿈’, 잃어버린 말과 길 찾기에 나서면서 나의 꿈에는 ‘중심 잡기’의 여유가 어느 정도 개입되기도 했다. 안 보이던 길이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내고, 잃었던 말들이 차츰 되살아나는, 그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기교나 재주넘기보다는 수수하고 무덤덤한, 그러면서도 깊은 눈을 뜨는, 가급적 단순화되고, 잎과 가지를 떨구어버린, 그런 소우주를 만들고, 그 속에서 보다 맑은 시력을 찾아보려는 꿈에 연결고리를 달아 보려고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꿈속의 사닥다리』는 그런 열망의 묶음이었다. 종래와는 달리 상승 이미지와 하강 이미지의 복합적 구사에 의한 새 꿈에 불 지피기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쥐뿔이 보일 때까지
내려가고 또 내려가리, 내려가다가
길이 막히면 다시 올라오며
찾고 또 찾아보리. 설령 언제나
개구리 눈에 물 붓기, 기름에
기름을 타거나 물에 물 엎지르기
가 되더라도 끝까지 걸어가보리.
—「쥐뿔 찾기-시법」 부분

 
하강과 상승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구사하는 시도의 일단이지만, 이 같은 방법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명제인 ‘그’를 목말라 하는 모습은 다음에 예를 드는 바와 같이 도처에 그려지기도 했다.
 

그가 그리운 날은
줄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를 딛고
가물거리는 마음은
허공으로 뿌리를 흔들었다. 이따금
거꾸로 서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는 그대로 저만큼 있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는 듯, 아득하게 가고 있는
그가 그럴수록 그리웠다.
항간에 그는 신들과만 만난다고 하고,
이즈음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고도 한다.
—「그가 그리운 날은」 부분
 
대낮에 그를 만날 수는 없을까.
꿈길에서가 아니라,
눈감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이 눈부신 햇살 속에서
만날 수는 없을까.
—「대낮에 그를 만날 수는 없을까」 부분

 
이 시집의 해설에서 김주연(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선생은 “‘그’는 우리 현실에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결핍되어 있는, 신성에 가까운 어떤 추상적 가치”라며, “시인은 세속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도 어차피 더러울 수밖에 없다는, 더러움을 통하여 더러움을 극복하겠다는 저 유마힐식 세계관을 내세우지 않는다. 시인은 ‘유리알 같이 맑고 투명한’ 길을 만들어가고자 한다”고 풀이한 바 있다.
 
 
‘그’와 ‘둥굴음’에의 지향
 
그런 ‘꿈속의 사닥다리'를 오르내리고 난 다음, 그 사닥다리를 수없이 오르내리다가 마주친 초월에의 통로 트기와 ‘그’에 대한 천착, 보다 고양된 삶 더듬어가기 등이 주요 명제들로 떠오르고, ‘둥글음’에의 지향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세계가 여섯 번째 시집 『그의 집은 둥글다』였다. 예가 되는 시를 두 편만 옮겨본다.
 

그의 집은 둥글다. 하늘과 땅 사이
그의 집, 모든 방들은 둥글다.
모가 난 나의 집, 사각의 방에서
그를 향한 목마름으로 눈감으면
지금의 나와 언젠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검고 깊게 흐르는 강.
모가 난 마음으로는
언제까지나 건널 수 없는 강.
신과 인간의 중간 지점에서 그는 그윽하게,
먼지 풀풀 나는 여기 이 쳇바퀴에서 나는
침침하게, 눈을 뜬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의 집은 둥글다. 하늘과 땅 사이
그의 집, 모든 방들은 둥글다.
—「그의 집은 둥글다」 전문
 
둥근 방을 꿈꿉니다. 이즈음은
밤마다 마음에 푸른 이랑 일구고
푸르게 일렁이는 그 이랑들 디디며
꿈길을 걷습니다. 밤은, 그가 아득하게
둥근 집, 둥근 방에서
새로운 꿈을 꾸는 시간입니다.
그의 마을 별들도 어둠 속에서
이마 조아리며 꿈꾸고, 나는
그 꿈의 마을에 이르는 절벽에
사닥다리를 놓습니다. 이즈음은 밤마다
마음을 낮추거나 한없이 드높여
그 사닥다리를 오릅니다. 그의 집,
그의 방과 같이 둥근 집, 둥근 방을
꿈꿉니다. 둥근 마음을 꿈꿉니다.
—「둥근 마음을 꿈꿉니다」 전문

 
자서에서 “보다 맑고 아름다운 꿈의 공간으로서의 ‘마음의 집’을 빚고, 그 속에서 살고 싶어 해온 열망의 읊조림들"이라고도 적은 바 있듯이, 둥글고 푸르고 맑은 이데아로서의 ‘그’를 찾아 나서고,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이 그런 둥글음의 세계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구와 현실 초월에의 의지를 집중적으로 노래해보기도 했다.
 
“육체적 지각을 통하지 않고, 느낌으로만 다가오는 이미지도 소중하다. 상상력이나 환상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꿈꾸기에 연결고리를 달아주며, 그 꿈꾸기는 시의 뼈와 살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의 시 쓰기는 현실 초극의 꿈꾸기에 다름 아니다. 꿈은 삭막한 삶을 적시면서 보다 나은 삶을 올려다보게 한다. 그곳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놓아주고, 오르게도 한다. 좌절감이나 절망감을 흔들어 주곤 한다. 지금·여기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세계, 어쩌면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세계마저 꿈의 공간에서는 반짝인다. ‘꿈의 공간 만들기, 그 속에서 살기’는 뒤틀리고 추한 몰골을 한 현실을 뛰어넘기 위한 ‘조그마한 오솔길 트기’인지도 모른다."
 
시집 『그의 집은 둥글다』의 표사에 쓴 글이다. 당시의 생각을 요약한 이 글이 말하고 있듯, 당시에는 꿈꾸기의 반복이 현실 초극의, 조그마하지만 완강한 초월에의, 오솔길이며 마치 숙명과도 같은 길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오생근(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선생은 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태수에게는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고, 덧없는 삶에 갇혀 있지 않으려는, 끈질기면서도 부드럽게 지속되는 의식이 어떤 그리움이나 기다림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고, 그것이 바로 시를 쓰는 마음의 원동력이 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안동 시편과 세기말의 연민

한때는 유림의 고장으로 불리는 안동이 거느리고 있는 고즈넉한 정서, 그 안켠에 완강하게 자리 매김한 뿌리의식이나 도도한 선비정신과 마주치면서 빚어진 ‘정신의 그림들’을 담아내기도 했다.
이방인으로서의 안동 떠돌기, 잘 안 보이지만 높고 깊게 흐르는 듯한 선비정신 더듬기가 은밀한 밑그림을 이루고 있는 일곱 번째 시집 『안동 시편』의 시들은 뭇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풍경의 내밀한 깊이를 포착해보았지만, 내 심상의 발현을 포개어 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자연과 떨어져 살고 물질문명에 짓눌려 살아가는 삭막한 현실 속에서 보다 고양된 삶을 찾아 나서는 길 위에서 꿈꾸기와 중얼거림, 낮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세계를 향한 노래들이 주로 담겨 있으며,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안동을 돌아 대구로 다시 돌아오는 순서로 시를 배열하기도 했다. 이 시집의 앞날개에 실려 있는 다음의 단평은 그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시집 『안동 시편』은 언어로 그려낸 풍경화이다. 그의 붓은 시각보다 더 깊은 곳에 닿아 있어서 눈이 감지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섬세한 이미지로 담아낸다. 그래서 ‘안동’은 지리적․현실적인 안동을 넘어 ‘신화의 자리’ ‘시원의 자리’ ‘자연의 자리’로 재창조된다. 이 시집의 시들은 뭇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풍경의 내밀한 깊이를 시인이 포착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 자체가 시인의 심상의 발현이기도 하다. 시편 곳곳에 시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꿈같은 자연의 풍경 속에 인간의 숨통을 은밀하게 뚫어 놓는다.”
 
지난 세기말(1999년)에는 앞의 시집들이 안고 있는 명제들을 복합적으로 아우르면서 초월과 초극 의지를 부드럽지만 완강하게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여덟 번째 시집 『내 마음의 풍란』을 내놓았다. 각종 재앙과 세기말의 어둠,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조그맣고 따스한 ‘가슴 열기’로 이 세계나 세상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노래한 시들을 주로 담은 셈이다. 이 때문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들의 일천함, 현실의 비속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조용하지만 완강한 몸부림(때로는 비실재적인 현상에 대한 그리움)이 되풀이되기도 했다.
친숙한 어법과 쉬운 구문으로 낯익은 세계를 그리는 듯한 외양 속에 그 반대로 트인 오솔길을 보여주려 했으며, 안으로 다져 넣은 형이상학적 고뇌, 더 나은 삶에의 추구와 초월의지를 노래했다고 할 수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겸허의 미덕이 살아나도록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안 보이는 기교와 언어 운용의 비의를 각별히 염두에 두기도 했다.
이 때문에 쉬운 구문들이 쉽게 읽혀지지 않을 수 있으며, 미묘한 말들로 긴장감과 주의력을 요구한 면도 없지 않다. 낯익고 범상한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높고 깊은 정신의 이상향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1>
허공이 우주를 끌어안고 있듯이
그 무엇이 나를 떠받들고 있다.
무거운 땅덩어리가 허공에 달려 있듯이
내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매달려 있다.
허공은 부드럽고, 그 무엇은 모양도 없지만
완강하게 나를 부둥켜안고 있다.
 
우주가 모양도 없는 저 허공 안에 있듯이
나는 안 보이는 그 무엇 안에 들어 있다.
허공은 비어 있으므로 이 땅을 들어 올리듯이
그 무엇이 나를 일으켜 앉히거나 세운다.
그 무엇은 안 보이고 허공은 비어 있으므로
나를 이토록 깊숙이 품어 앓게 한다.
 
<2>
물이 마침내 쇠를 삭게 하고, 물방울이
한결같이 떨어져 돌을 뚫듯이, 나는 물이 되고
물방울이 되어 돌을 뚫고 쇠를 녹이리.
낮고 부드럽게 비어 있는 그 무엇이
마음을 가득 채우듯이, 비어 있지만
뭔가 가득 채워져 있는 허공이
나를 흔들어 눈뜨게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듯이,
일어나 바라보면 아득한 세상, 아득하므로
걷고 또 걷게 하는 세상이 눈물겨워
쇠를 녹이고 돌을 뚫으리. 나는 물방울이 되고
물이 되어 천천히, 오래오래
부드럽게, 낮게, 비워지고, 또 비워져서.
—「그 무엇, 또는 물에 대하여」 전문

 
시집 『내 마음의 풍란』에 실린 시로, 이 무렵의 정신적 지향을 나름으로 반영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세기말의 어둠과 어지러움 속에서 스스로도 위안을 찾으면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담으려 했으며, 낮고 부드러운 힘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되짚어보려 했던 것도 같다. 풍란처럼 허공에 뿌리를 뻗고 있는 우리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 무엇’과 ‘물’의 의미를 반추하면서 더 나은 세계에 이르려는 초극과 초월에의 꿈꾸기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새 세기의 밝음과 어둠
 
2000년 들어 새 세기를 맞은 기대감은 컸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 후유증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려움은 여전했다. 몸담고 있는 신문사의 사정은 아주 심각했다. 구조조정이 계속(1998년부터 사원이 무려 150명 이상 퇴출)되는 가운데 재정적인 어려움은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떠밀려서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맡은 1998년에는 편집국을 떠나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년 만에 다시 편집부국장(수석)으로 자리가 바뀌었으며, 그 이듬해(2000년) 다시 논설위원으로 복귀했다. 신문사 일에 쫒기면 시에 정진하기 어렵지만, 논설위원은 비교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자리였다.
문화와 관련된 각종 일에도 여전히 관여하는 한편 당시 대구에서는 유일한 금복문화재단의 이사(1999년부터)를 맡게 되기고 했다. 시집 『내 마음의 풍란』으로는 그 이듬해 전혀 예상하지 않은 제3회 한국가톨릭문학상을 받게 됐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 시인 신중신 선생에 이은 수상이었다. 상복이 없는 나로서는 뜻밖이었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어서 당황하기도 했다.
2001년부터는 비교적 시간을 내기 쉬운 오후 시간을 이용해 대구한의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2007년까지)로도 일하면서 한국현대문학사, 현대시론, 문학용어론, 문예창작지도 등을 강의했고,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이념제정위원회 소위원장과 문화행사 기획단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린 2003년까지는 이 행사에 적잖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대학 강의에도 충실하기 위해서는 늘 시간에 쫓기곤 했다. 게다가 2002년부터는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장, 대구가톨릭언론인회 회장을 맡는 등 봉사해야 할 일들도 점점 늘어나 시를 쓸 겨를이 없을 지경이었다.
음악, 미술 등 예술분야의 일들도 적지 않았다. 대구오페라하우스 개관, 대구시립미술관 건립과 관련해서도 일을 했으며, TBC 대구방송의 육사시문학상 제정에 관여하고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맡았다. 신문사에서는 논설실장을 거쳐 논설주간으로 발령이 난 뒤부터는 다시 더 바빠져 작심하지 않고는 시를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2004년부터는 2년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상화문학제(현재 추진위원장)를 비롯한 각종 문학 관련 일에 참여했으며, 신문사에서는 이사급으로 승급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아홉 번째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문학과지성사)을 간신히 낼 수 있었다. 이 시집으로 천상병시문학상을 받았는데 역시 뜻밖의 일이었지만, 천상병 선생처럼 무구한 세계를 꿈꾼다는 평가 때문에 사양하다가 수락했다.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은 바쁜 일상 속에서 틈틈이 쓴 작품들이라 그렇기도 하나, 마음이 만들어낸 자연과 그 시원 속에서 ‘이슬방울’이나 ‘얼음꽃’과 같이 조그마하고 투명하며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데 주로 주어졌다. 마음이 나무나 새, 이슬방울 속으로 들어가서 깃들이기도 하고, 그 바깥에서 바라보기도 하는 작은 세계가 주조를 이룬 건 그런 마음자리와 연계돼 있었다고나 할까. 그 무렵에는 그런 꿈꾸기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시집도 적잖은 세월 동안 천착해온 서정적 자아 탐구, 초월적 진리인 ‘그’에게로 다가가려는 간절한 몸짓, 그러나 거기에 가 닿지 못한 속세의 범부가 겪는 실존적인 불안과 우울 등이 주된 흐름이다. 혼탁한 ‘세상살이의 길’과 그 가운데서 꿈꾸어보는 ‘초월적인 길’ 사이에서 서정적인 자아는 비틀거리지만, 어둡게 ‘주저앉아’ 있는 현실에 대한 ‘반발의 정신’을 잊지 않으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름으로는 자연과 대상 앞에서 한없이 자세를 낮춰 겸손해진 시적 자아가 텅 비운 마음속을 ‘현재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 맑은 물이 흐르는 시원에 이르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으로 채우면서 ‘생명력’ 있는 서정시를 빚고 싶은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시 속의 적절한 여백과 가로놓인 긴장이 취한 시적 미학, 초월자를 향한 구도자의 자세는 ‘낯익음 속의 낯섦’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이 모를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평도 들었던 것 같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시인 최서림 교수(서울과학기술대)는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자연세계는 앞으로 이 땅에 회복되어질 낙원의 모습을 미리 예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며, “제유적 세계관으로 되어 있는 동양시학에서는 볼 수 없는 목적론적 세계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주연 교수(숙명여대)께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마음의 행로는 시작과 끝이 있다기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현재에서 시작해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가 하면, 과거의 추억이 환기되거나 미래적인 몽상의 전개가 주제일 경우라도, 시적인 시간은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았다고나 할까. 또한 그 마음의 행로는 이성적인 의식을 포함하되, 그것을 또한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기도 했다. 김주연 선생의 “그 마음이야말로, 창조의 가능성을 계속 이끌어낼 수 있는 상상력의 샘물이고, 육체의 유한성을 이길 수 있는 꿈의 자장”이라는 분석은 부끄러운 마음을 얼마간은 달래주기도 했다.
주제에 있어서도 혼탁한 세상살이에서의 ‘일상적인 길’과 그 혼탁한 세상살이 가운데서 꿈꾸어보는 ‘초월적인 길’이 주축이었다. 이 두 길 중 비본질적인 길이라 할 수 있는 ‘일상적인 길’을 벗어나고 뛰어넘어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초월의 길’을 추구하는 도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더구나 이 두 가지 상반된 길 사이의 이항 대립적 구도가 긴장의 중심축으로 떠올라 있을 뿐 아니라 시적 구조의 핵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튼 이 시집에는 비현실적인 공간 설정이 눈이 띄며, 그 속에 들 때 비로소 서정적 자아가 한없이 작고 낮아진 상태에서 맑고 투명하게 반짝이는가 하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신성성이 부여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 「이슬방울」 기타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을 내면서 자서를 통해 “세상은 크게 달라지고 있으나 ‘나’를 들여다보면 별로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은 게걸음질 치거나 지난날로 되레 되돌아가고 싶어 하니 어찌하랴. 하지만 이 느린 걸음으로, 때로는 거슬러 오르면서라도 꿈꿔온 길을 찾고, 이슬방울처럼 글썽이거나 얼음꽃으로 맺혀서라도 둥근 집에 깃들일 수 있을 때까지 가보기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적었듯이, 당시의 심정은 바로 그러했었다. 표사의 글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문화는-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듯이-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세월이 흐를수록 흐려지고 있는 걸까. 문학의 전망은 현실의 진단이며, 그것이 바탕이 된 우리 삶의 전망이라면, 그런 무거운 생각들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장래가 어둡다고 지금-여기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달라진 문화적 환경에 대한 ‘반발의 정신’을 동력으로 삼는 슬기가 필요하기라. 끊임없이 ‘비인간화’에 맞서면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 깊이 들여다보기와 끌어안기가 풀어야 할 매듭들이 아닐까 한다. 시대를 박차고 오르거나 거슬러 가더라도 ‘신성한 언어’와 ‘정신의 깊이와 높이’를 지키고 새롭게 이끌어내려는 시인들을 만나면 세삼 옷깃을 여미게 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시대가 안겨주는 아픔이 겹쳐 더욱 그랬겠지만, 그 무렵에는 ‘비인간화’에 맞서기와 뛰어넘기가 주요 명제였으며, ‘신성한 언어’ 회복과 ‘정신의 깊이와 높이’ 추구가 지향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마음자리에는 늘 비애가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
위에 뛰어내리는 햇살
위에 포개어지는 새소리, 위에
아득한 허공.
 
그 아래 구겨지는 구름 몇 조각
아래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
아래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 아래
자꾸만 작아지는 나.
 
허공에 떠도는 구름과
소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새소리,
햇살들이 곤두박질하는 바위 위 풀잎에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
—「이슬방울」 전문

 
문학평론가 이광호 교수(서울예술대학)가 조선일보에 쓴 길지 않은 평이 이 시를, 마치 내 마음을 꿰뚫듯이, 풀이해주고 있어 인용해본다.
 
“이태수는 이 시에서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작지만 아름다운 세계를 빚어 보인다. 종래의 시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던 물방울이나 이슬방울이 여기서는 더욱 애틋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거의 동시에 씌어진 다른 시「낮에 꾸는 꿈」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한없이 작고 낮아진 상태에서 물방울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둥글고 빈곳에서 투명해지는 말들을 만나는 세계를 떠올리면서 그 신성한 언어를 노래하고 있지만, 이 시에서는 그 신성한 언어의 발견이 삶의 비애와 마주치는 아픔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맺혀서 글썽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이슬방울은 최상의 상태를 스스로 만들고 있으면서도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새벽빛을 머금고 있는 이슬은 종교적인 성스러움과 생의 덧없음이라는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받기도 한다.
더구나 자연의 사물들이 상호 조응하는 세계 안에서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은 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의 그 ‘둥글음’의 다른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이슬방울과 ‘내’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데 그 비애는 커질 수 있다. 첫 연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이슬방울은 그 위에 햇살이 뛰어내리고 새소리가 포개어지며, 위에는 또 아득한 허공이 있다.
말하자면 ‘이슬방울―햇살―새소리―허공’이라는 사물과 그 무엇들이 ‘상승’의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깊은 함수관계를 가진다. 그 관계 속에서 이슬방울은 어쩌면 하잘것없는 존재라 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다음 연에서는 그 허공 아래 구겨지는 구름 조각이 있고,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과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가 있으며, 그 아래 작아지기만 하는 ‘나’가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구름 몇 조각-나무들-바위―나’는 ‘하강’의 질서를 만들면서 역시 상호 깊은 함수관계를 유지한다.
나아가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물의 수직적인 연계는 마지막 연에서 다시 ‘허공―구름’ ‘소나무―새소리’ ‘햇살―바위’ ‘나―이슬방울’의 수평적인 접속으로 완성되고 있으며, 이광호의 지적대로 ‘여기에는 자연 만물들의 상생적인 관계가 응축’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궁극적으로 마주치고 있는 것은 맑고 투명하지만 작게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이며, 그와 같은(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나’다.
이 시의 마지막 행,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에서의 ‘나’와 ‘이슬방울’은 하나가 되며, 시인도 그런 상태를 꿈꾸고 있음도 분명하다. 이 순간에 ‘이슬’은 마침내 이 시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주체로 변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슬방울은 소멸 앞에 놓인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 아름다움의 절정의 순간이 품고 있는 비애를 아프게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설령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지순하다고 하더라도, 절정의 순간은 바로 소멸 앞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 시는 그 찬연한 순간을 깊이 끌어안으면서도 그 유한성을 아프게 일깨우기도 한다.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에 실린 작품 가운데 당시의 마음을 잘 반영하고 있는 시 한 편만 더 소개한다.
 

<1>
물방울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투명해지는 말들.
 
물방울 안에서 바라보면, 길들이 되돌아와
구겨진다. 발바닥 부르트도록 걷던
그 길들 너머 또 다른 길이 열린다.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나날들. 아득한 곳에서
둥글게 그가 미소를 머금고 서 있다.
 
그렇게도 꿈꿔왔던 투명한 말들이
비로소 물방울 되어 글썽인다.
햇살은 그 위에 뒹굴다 굴러 떨어진다.
 
글썽이며 나는 자꾸만
남은 햇살을 끌어당긴다.
 
<2>
집을 짓는다. 남루한 세월이지만
마음만은 늘 푸른 하늘 자락을 끌어안는다.
새들이 어디론가 아득하게 날아가고
돌아올 것 같지도 않지만, 마음은 제 홀로
해종일 두리기둥을 만든다. 서까래들을 다듬고,
흙일도 하고, 방을 꾸며 도배를 한다.
사랑채도 짓는다.

자그마한 창틀로 뛰어내리는 햇살,
마음은 벌써 뒷마당을 한 바퀴 휘돌아
눈길을 멀리 창밖에 던져놓고 있다.
다시 그는 기척도 없지만, 어느새 걸어 왔는지,
앞산이 우두커니 앞마당에 서 있다.
해종일 걸어온 낯익은 길들도 문득 낯설어지고
나뭇잎들이 자꾸만 땅 위에 내리고 있다.
—「다시 낮에 꾸는 꿈」 전문
 

 
‘전업시인’으로 살아가기
 
2007년에는 신문사 퇴임과 함께 대구한의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도 그만두고 시인으로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일단 퇴임 후 5년간은 ‘아침에 출근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에 관련된 글 외에는 절대 쓰지 않는다.’(신문 칼럼 등은 물론이다), ‘현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등 다섯 가지 원칙을 세워놓고 올해 2012년까지 그 불문율을 어기지는 않았다.
유혹(?)과 권유도 있었지만 연봉 수준이 어떻든 출근하는 일자리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명예직 등으로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회사의 고문 자리도 10개월 만에 떠났다. 하지만 퇴임하면서 집 가까이 마련한 별도의 서재(글방)에 박혀 있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학 출강, 회사의 사외이사, 문화 예술 관련의 각종 위원이나 위원장 자리까지 다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수입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고, 그런 자리가 계속 생기기도 했다. 때로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프로젝트 같은 것을 맡아야 체면을 유지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불문율에 충실하면서도 마음먹은 문학의 길에 전념하기는 쉽지 않았다.
 
2008년에는 열 번째 시집 『화화나무 그늘』(문학과지성사)를 냈다. 생활 리듬이 달라져 조금은 방황하면서 쓴 작품들이기 때문에 그런 빛깔이나 무늬들이 도처에 묻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음속으로는 늘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아 아직도 아쉬움을 떨치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시집 『화화나무 그늘』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선학 교수(동국대)는 “그의 시적 행로가 내면의 어둠에서 자연 속의 그늘로 나오는 과정과 경위를 표출하고 있다. 시인 자신의 자아가 자연에 놓이는 자아로 이행하면서 원숙한 사유의 결정을 드러내고 있어 시적 세계 속으로 읽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강한 흡인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쓰기도 했으며, 시인 이진흥 선생은 “초월에의 꿈과 현실세계에 대한 애착 사이에서 ‘물 위의 기름방울’로 떠도는 시인의 실존적 고뇌를 노래한 것이 시집 『화화나무 그늘』이다.”라고 풀이한 데서도 그 사정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표제시 한 편만 소개한다.
 
길을 달리다가, 어디로 가려하기보다 그저 길을 따라 자동차로 달리다가, 낯선 산자락 마을 어귀에 멈춰 섰다. 그 순간, 내가 달려온 길들이 거꾸로 돌아가려 하자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그 길을 붙들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한 백 년 정도는 그랬을까. 마을 초입의 회화나무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오가는 길들을 끌어안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월 따라 사람들은 이 마을을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나처럼 뜬금없이 머뭇거리기도 했으련만, 두텁기 그지없는 회화나무 그늘.
 
그 그늘에 깃들어 바라보면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며 펄럭이는 바람의 옷자락. 갈 곳 잃은 마음은 그 위에 실릴 뿐, 눈앞이 자꾸만 흐리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할는지, 이름 모를 새들은 뭐라고 채근하듯 지저귀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여태 먼 길을 떠돌았으나 내가 걷거나 달려온 길들이 길 밖으로 쓰러져 뒹군다. 다시 가야 할 길도 저 회화나무가 품고 있는지, 이내 놓아줄 건지. 하늘을 끌어당기며 허공 향해 묵묵부답 서 있는 그 그늘 아래 내 몸도 마음도 붙잡혀 있다.
—「회화나무 그늘」 전문
 
한없는 자기 낮추기와 작아지기를 통해 불순하고 뒤틀린 세계를 뛰어넘으려는 초월에의 꿈과 오래 열망해온 ‘그’에게 다가서려는 몸짓은 낮으면서도 완강한 빛깔을 띠는 건 여전히 내 시가 끌어안고 있는 ‘밑그림’이라 할 수 있다.
 
 
침묵에 들기와 떠받들기
.
2010년대 들어서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늘어나 말에 대한 외경심이 한결 커지는 것 같다. 성서의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구절이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다.”라고 한 말은 시에 눈뜰 무렵부터 귀감으로 삼아왔지만, 그 뿌리까지 내려가 보고 싶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피카르트의 난해하지만 탁월한 말들에 겸허하게 다가가 보곤 했다. 다가간다기보다 깊이 들여다보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즘 시는 대체로 요설에 가까울 정도로 말이 너무 무성하다. 언어를 비틀거나 혹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산문화의 도도한 물결이 시를 비시적으로 몰고 가는 이 시대에 진정한 시를 쓴다는 것은 유행을 거슬러 오르는 일이며, 끊임없이 신성한 언어를 꿈꾸는 외로움을 자처하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지만, 침묵은 언제나 절대적인 말을 잉태한다. 시를 쓰는 일은 그 절대적인 말, 신성한 말 찾아 나서기에 다름 아니며, 침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런 말들을 끌어안고 나오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2012년에 낸 열한 번째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민음사)과 2014년에 낸 열두 번째 시집 『침묵의 결』(문학과지성사)은 ‘침묵’을 중심 화두로 쓴 시를 담고 있다. ‘침묵’에 들기와 떠받들기를 중심으로 ‘비우기’와 ‘지우기’, ‘내려놓기’가 그 화두다.
 

바람은 풍경을 흔들어 댑니다
풍경소리는 하늘 아래 퍼져 나갑니다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속마음의 그윽한 적막을 알 리 없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나를 흔듭니다
흔들릴수록 자꾸만 어두워져 버립니다

어둡고 아플수록 풍경은
맑고 밝은 소리를 길어 나릅니다
 
비워도 비워내도 채워지는 나는
아픔과 어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두워질수록 명징하게 울리는 풍경은
아마도 모든 걸 다 비워내서 그런가 봅니다
―「풍경風磬」 전문

 
세상의 말들이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수다’로 들리고, 그 소음들 속을 어쩔 수 없이 헤매면서,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형이상학에 관한 글들이 새삼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달빛이 침묵의 비단결 같다
우두커니 서 있는 벽오동나무 한 그루,
그 비단결에 감싸인 채
제 발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깊은 침묵에 빠져들어
마지막으로 지는 잎사귀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벗을 것 다 벗은 저 늙은 벽오동나무는
마치 먼 세상의 성자, 오로지
침묵으로 환해지는 성자 같다
말 없는 말들을 채우고 다지고 지우는 저 나무,
밤 이슥토록 달빛 비단옷 입고
이쪽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오랜 세월 봉황 품어보려는 꿈을 꿨는지,
그 이루지 못한 꿈속에 들어버렸는지,
제 몸을 다 내려놓으려는 자세로 서 있다
달빛 비단자락 가득히
비단결 같은 가야금 소리, 거문고 소리,
침묵 너머 깊숙이 머금고 있다
―「달빛 속의 벽오동」 전문


문학평론가 오생근 선생(서울대 명예교수)은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의 해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이태수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넘어선 침묵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성스러운 침묵의 언어를 탐구한다. 물론 그의 탐구는 절대적인 ‘무(無)’와 초월의 세계에 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시의 언어를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시의 언어로 귀환하기 위한 것이다. 시인이 바라는 말들의 자유와 해방에는 어떤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침묵의 한가운데서’, ‘또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서’ 태어나는 시의 언어는 ‘침묵만이 말의 깊은 메아리를 낳’기 때문에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언어는 언제나 침묵과의 긴장 관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의 언어를 동경하는 이태수의 시 세계는 화려한 ‘말잔치’와는 거리가 먼 침묵의 시학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시집 『침묵의 결』은 ‘침묵’으로써 언어조차 초월한 본질에 다가가려 애쓴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의 연장선상에서 신과 자연 앞에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어 세속을 뛰어넘으려는 의도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 표사에 이 무렵 시 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침묵은 말이 그치는 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침묵은 말이 그치기 때문에 시작되는 건 아니다. 그때야 비로소 분명해지므로 오늘날 은폐돼 있는 침묵의 세계는 말을 위해서라도 다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진정한 말이 눈뜨는 미지의 세계를 품고 있는 침묵은 그 속에 끌어안고 있는 사물들에 신성한 힘을 부여하며, 그 존재성이 침묵 속에서 강화되게 마련이다. 침묵은 늘 제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말은 침묵 없이 홀로 있을 수 없고, 그 배경 없이 깊이를 가질 수도 없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 다시 침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침묵은 언제나 절대적인 말을 잉태한다. 시 쓰기란 그 절대적인 말, 신성한 말을 찾아 나서는 일, 침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런 말들을 끌어안고 나오는 몸짓이 아닐는지…….
 
이 시집의 서시는 바로 그런 지향과 추구에 대한 압축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몇 년 동안 ‘침묵’을 중심 화두로 한 시를 쓰면서 그 명제에 ‘선택’과 ‘집중’을 했지만, 앞으로 더 나아간 세계에 이르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말은 온 길로 되돌아간다
신성한 말은 한결같이
먼 데서 희미하게 빛을 뿌린다
나는 그 말들을 더듬어
오늘도 안간힘으로 길을 나선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보아도
그 언저리까지도 이르지 못할 뿐
오로지 침묵이 그 말들을
깊이깊이 감싸 안고 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가 닿고 싶은 곳은
그 말들이 눈 뜨는 그 한가운데,
그런 말들과 함께 눈 떠보는 게
한결같은 꿈이다
내 시는 되돌아간 데서
다시 되돌아오는 말을 향한 꿈꾸기다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초월에의 꿈꾸기다
—「시법(詩法)—서시」 전문

 

시 「침묵의 벽」에서도 “침묵의 틈으로 앵초꽃 몇 송이/조심조심 얼굴을 내민다”고 쓰거나 “잃어버린 말, 새 말 들을 더듬으며/유리창 너머 풍경들을 끌어당긴다”고 한 것도, 「「눈〔雪〕」」에서 눈이 침묵에서 내린다고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신성한 말에 대한 목마름을 “빗장은 요지부동, 안으로 굳게 걸려/문을 두드릴수록 목이 마르다/새 말, 잃어버린 말들은 여전히/침묵의 벽 속에 가부좌 틀고 앉아 있다”(「침묵의 벽」)고 노래했던 것 같다.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랫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눈〔雪〕」 전문

 
이 시집에 대해 ‘예술과 자연, 하나 되다’라는 주제로 쓴 문학평론가 김주연 선생(숙명여대 명예교수)은 “현대사회에서 고립화∙원자화된 개인들의 소통과 그로 인한 언어의 무력화에 언어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보기도 했다. 김주연 선생의 해설 중 한 부분을 인용한다.
 
시력 40년의 중진시인 이태수의 근작 시집 『침묵의 결』은 신과 자연, 자연이 함축하고 있는 언어, 인간의 언어와 비인간의 언어 등 이 세계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불러 놓는다. <중략> 시인의 소망은 ‘신성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은 멀리서 희미한 빛을 보일 따름이어서 시인은 안간힘으로 그저 길을 나설 뿐이다. <중략> 자연/신성/ 침묵의 포괄항은 때로 시끄러운 인간 세상마저 뒤덮으면서 신성성의 세계를 준다. 인간의 언어로 조직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성을 환기시키는 이태수 시의 핵심은 결국 이러한 명제 둘레를 맴돈다. <중략> 그러나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그 풍경들을 “끌어당긴다.” 말을 잃었으나 자연 속의 신성을 기웃거리는 모습은 새로운 소망을 예감케 한다.

 
그윽한 적막, 역설적 자기성찰
 
2016년에 낸 열세 번째 시집 『따뜻한 적막』(문학세계사)은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 『침묵의 결』에 이어 내놓은 시집으로 ‘적막’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마음의 그림들을 진솔하게 담았다. 등단 이후 오랜 세월 ‘초월에의 꿈’을 기본명제로 더 나은 세계 꿈꾸기로 일관해온 것 같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신과 자연, 자연이 함축하는 언어, 인간의 언어와 비인간의 언어 등 이 세계의 본질과 현상에 천착하면서 신성 환기에 무게중심을 두어 왔던 것 같다.
『따뜻한 적막』은 자연과 어우러진 심상풍경들을 겸허하고 신성한 언어로 감싸 안고, 적막한 현실 너머의 따스한 풍경에 다가가거나 그 풍경들을 끌어당겨 깊이 그러안으려는 형이상학적인 꿈에 무게를 실어 보려 했다.
 

새벽에 창을 사납게 두드리던 비도 그치고
이른 아침, 햇살이 미친 듯 뛰어내린다
온몸이 다 젖은 회화나무가 나를 내려다본다
물끄러미 서서 조금씩 몸을 흔든다
간밤의 어둠과 바람소리는 제 몸에 다 쟁였는지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이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들을 떨쳐낸다
내 마음보다 훨씬 먼저 화답이라도 하듯이
햇살이 따스하게 그 온몸을 감싸 안는다
나도 저 의젓한 회화나무처럼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제자리에 서 있고 싶다
비바람이 아무리 흔들어대도, 눈보라쳐도
모든 어둠과 그림자를 안으로 쟁이며
오직 제자리에서 환한 아침을 맞고 싶다
―「환한 아침」 전문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노라면 적막마저 그윽해지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 해설을 통해 문학평론가 김인환 교수는 “시인은 침묵과 적막 속에서 근거 자체에 대한 믿음을 확인한다. 궁극적 근거를 굳게 믿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적막은 따뜻한 적막이다.”라고 했다,
마음 가난하고 적막한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 따뜻한 위안이라도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그 이후에도 무늬와 결을 다소 달리하면서 여전히 지속됐다. 외로움이나 쓸쓸함, 허무와 무명마저도 따뜻하게 끌어안으면서 ‘위무와 위안의 시’, 낮은 소리로 따뜻한 세계를 지향하는 ‘긍정의 시’를 빚어 보고 싶었다.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가고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하루가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도 지나가고
 
또 한해가 지나간다.
꿈 많던 시절이 지나가고
안 돌아올 것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물같이, 쏜살처럼, 떼 지어 지나간다.
 
떠나간다. 나뭇잎들이 나무를 떠나고
물고기들이 물을 떠난다.
사람들이 사람을 떠나고
강물이 강을 떠난다. 미련들이 미련을 떠나고
 
구름들이 하늘을 떠난다.
너도 기어이 나를 떠나고
못 돌아올 것들이 영영 떠나간다.
허공 깊숙이, 아득히, 죄다 떠나간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다.
나의 이 낮은 감사의 기도는
마침내 환하다.
적막 속에 따뜻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지나가고 떠나가고」 전문

 
『따뜻한 적막』에서와 같이 기본명제(중심 화두)가 ‘초월에의 꿈’인 열네 번째 시집 『거울이 나를 본다』(2018년, 문학세계사)는 완만한 역설의 자기성찰로 자연과 내면을 넘나들면서 빚어지는 심상 풍경들을 떠올리는 한편, 때로는 파토스와 에토스들을 비켜서지 않고 진솔하게 내비치는 빛깔을 띠고 있는 점도 조금 다르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으면
새들이 날아들고 나무들이 다가선다
그러나 다가가고 날아가는 건
정작 내 마음일 따름이다
 
마음의 빈터에 새들을 부르고
나무들을 끌어당겨도 부질없는 일일까
 
유리창은 투명하고 견고한 벽이므로,
견고한 만큼 투명하고 투명한 만큼
견고한 유리창은
이쪽과 저쪽을 투명하고 견고하게
갈라놓고 말 것이 너무나 분명하므로,
 
하지만 오늘도 창가에 앉아
유리창 너머 풍진세상을 끌어당긴다
 
분할된 안팎을 아우르는 꿈에
안간힘으로 날개를 달아 본다
유리창 이쪽 마음의 빈터에 나무를 심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불러 모은다
―「유리창」 전문

 
여전히 나의 삶은 초월에의 꿈꾸기이며, 시는 그 기록이자 자아실현의 길 찾기라 할 수 있다. 「유리창」에서는 완곡하게나마 그런 상승 지향 의지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 꿈꾸기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투명하면서도 완강한 ‘벽’이 가로막고 있어 비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하지만 꿈을 꾸며 살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시집의 서문(시인의 말)에서 “적막을 따뜻하게 끌어안으려는 마음에 조금은 금이 가 있는 듯도 하다. 삶의 비애는 아무래도 벗어나기 어렵고, 그 파토스들이 끊임없이 이랑져오기 때문이다. 삶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꿈꾸기이며, 시는 그 기록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꿈은 언제까지나 꿈으로만 남을는지 모른다. 오랜 세월 초월에의 지향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아 회복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하다. ‘나’를 찾아 헤매왔지만 ‘나’는 ‘내 허상의 허상’이라는 생각에서도 자유롭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다음의 시는 최근의 그런 심경을 드러낸 작품이다.
 

사는 게 꿈꾸기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젠 그 생각이 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꿈꾸어도 언제나 제자리걸음 같아서,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어서
그런 것일까요
꿈을 꾸다가 지칠 대로 지쳐서,
그 미련마저 떨쳐 버리고 싶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요즘은 꿈꾸듯 말 듯 길을 나섭니다
때로는 게걸음으로 느리게 걷습니다
 
지우고 비우고 내려놓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며
꿈밖에서 서성거리기도 합니다
멍하니 서 있거나
결가부좌 틀고 앉아 있다가도
이내 마음 바꿔 흐르는 물같이 가곤 합니다

비바람 불고 눈보라 몰아쳐도 꿈꾸듯 말 듯
한결같은 그 걸음으로 가려 합니다

(그런데 또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요……)
 
거울이 물끄러미 나를 본다
―「꿈꾸듯 말 듯」 전문

 
가파른 세파는 늘 상처를 덧나게 하고, 불면의 밤을 가져다준다. 눈을 떠도 감아도 내가 목마르게 찾고 있는 ‘내’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다. 애써 봐도 마냥 떠밀리고 떠내려가는 느낌마저 지워지지 않는다. 왠지 요즘은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게 된다. 물같이 가는 시간의 흐름에는 사방연속무늬의 얼룩들이 어른거리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처량해 보인다. 그런 나를 거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즈음의 비애는 역설적 자기성찰에 돌리게 하기도 한다.
인용하는 글은 시집 『거울이 나를 본다』에 대한 시인 이진흥 교수의 해설 ‘분별의 창을 닫고 관조하는 자아상’의 일부분(요약)이다.
 
그는 초기의 실존적 방황과 중기의 비속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길 찾기를 거쳐 후기의 침묵과 적막에 이르는 동안 시종일관 서정을 끌어안으며 초월을 꿈꾸어오고 있다. 그의 ‘꿈꾸기’는 이제 ‘꿈꾸듯 말 듯’으로 바뀌면서 주객의 대립과 분별을 사라지게 하고, 이 변화를 통하여 시인은 서구의 논리적 분별상을 동양의 초월적 통합상으로 이끌어오게 된다. 내가 거울을 보는 게 아니라 거울이 나를 본다는 전도된 진술을 통해서 시인은 즉자-대자의 위치를 바꾸어 보고 있다. 시인이 거울을 보는 게 아니라 거울이 시인을 본다는 역설적 표현은 이제 그가 기존의 분별과 판단의 창을 닫고 그냥 거기 그렇게 있는 즉자존재의 입장에 처해 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렇게 해서 시인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을 지양하고 즉자-대자의 종합을 지향하는 것이다.
.
이 시집의 표현 기법도 앞의 시집 『따뜻한 적막』과 마찬가지로 실내악이나 교향악처럼 처음과 끝이 같은 ‘A-B-A’ 형식이 거의 예외 없이 도입돼 있으며, 역시 같은 맥락의 회화적(시각적) 효과를 얻기 위해 시의 행과 연의 앞뒤 흐름이 대칭구조를 이루도록 구성하고, 형태미를 더 강화하기도 했다. 이 같은 시도는 술과 술잔의 함수관계가 그렇듯이, 형식이 내용의 맛과 분위기를 한결 돋우어 주리라는 생각 때문이며, 시의 특성을 온건하면서도 완강하게 유지하면서 더욱 단정하고 정결한 문체를 지향하고 선호하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기도 하다.
 
열네 권의 시집을 낸 뒤 잇달아 2018년 봄에 발간한 시선집 『먼 불빛』(문학세계사)에는 등단 작품을 포함해 열네 권의 시집에 실린 시들 가운데 100편을 자선해서 담았다. 이 시집의 서문(시인의 말)을 옮겨 본다.
 
꿈과 현실 사이를 떠돌고 헤매면서 예까지 왔다. 여전히 꿈은 현실 저 너머에 있는 것 같아 쓸쓸하고 목마르다.
지난날로 거슬러 올라가 되돌아오면서 지금까지 낸 14권의 시집을 차례로 들여다보았다. ‘초월에의 꿈꾸기’가 한결같은 기본명제(화두)였지만 시대와 세월의 흐름, 생각과 느낌의 변화와 맞물려 완만하게나마 변모를 거듭해온 듯하다.
이 선집은 시적 완성도보다는 그런 변모의 과정을 염두에 두면서 시집들에 실린 866편 가운데 100편을 골라 연대순으로 엮었으며, 2000년대 이후의 근작에 조금 더 무게가 주어져 있다.
이 매듭 하나를 짓고 나니 적잖이 허탈하다. 갈 수 있는 길이 이제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도 역시 이 걸음으로 가는 데까지 가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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