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5    업데이트: 21-02-03 16:26

자유로운 이야기

등단 42년, 적막 너머 따뜻한 풍경 끌어안기
아트코리아 | 조회 1,151

 

등단 42, 적막 너머 따뜻한 풍경 끌어안기

겸허하고 신성한 마음의 그림들

마음 가난하고 적막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꿈

 

이태수 시집 따뜻한 적막

문학세계사 / 이태수 지음 / 신국판 변형 양장본 / 132/ 10,000/ 978-89-7075-820-6 03810

 

 

1. 자연과 어우러진 현실 너머의 따스한 풍경 그리기

 

중진시인 이태수의 열세 번째 시집 따뜻한 적막이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침묵이 중심 화두인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2012), 침묵의 결(2014)에 이어 2년 만에 출간된 것으로 적막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마음의 그림들을 진솔하게 보여 준다.

1974현대문학 등단 이후 오랜 세월 초월을 기본명제로 더 나은 세계 꿈꾸기를 일관되게 지향해 온 시인은 근년 들어 신과 자연, 자연이 함축하는 언어, 인간의 언어와 비인간의 언어 등 이 세계의 본질과 현상에 천착하면서 부단히 신성을 환기해 왔으며, 이번 시집은 그 연장선상에서 부드러운 서정적 언어로 한결 그윽하고 원숙한 경지를 펼쳐 보인다.

따뜻한 적막의 시편들은 자연과 어우러진 심상 풍경들을 겸허하고 신성한 언어로 감싸 안는가 하면, 적막한 현실 너머의 따스한 풍경에 다가가려 하거나 그 풍경들을 끌어당겨 깊이 그러안으려는 형이상학적인 꿈에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14년 겨울에서 지난해 가을까지 한 해 동안 쓴 시 가운데 69편을 골라 이번 시집에 4부로 나눠 실었다는 시인은,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노라면 적막마저 그윽해진다며 이 조촐한 시집을 마음 가난하고 적막한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김인환(고려대 명예교수)은 시집 해설을 통해 시인은 침묵과 적막 속에서 근거 자체에 대한 믿음을 확인한다. 궁극적 근거를 굳게 믿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적막은 따뜻한 적막이다.”라고 풀이하고, 시인에게 나무는 탁월한 모럴리스트라고도 밝혔다. “하루에도 몇 번 흐렸다 개였다/흐려지는 사람의 길을 내려다보며 나무들은 말 없는 말을 속 깊은 데 간직하고 등 구부린 채 하늘을 끌어안(등 굽은 소나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도 저 의젓한 회화나무처럼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자리에 서 있고 싶다

비바람이 아무리 흔들어대도, 눈보라 쳐도

모든 어둠과 그림자를 안으로 쟁이며

오직 제 자리에서 환한 아침을 맞고 싶다

환한 아침 부분

 

이같이 시인이 회화나무를 닮고 싶어 하듯이, 어둠 속에서그 사람의 말에 등장하는 그 또는 그분도 시인이 닮고 싶어 하는 삶의 모델로 부각되고 있으며, 때로는 체념과 자책이 사랑의 불길을 더욱 힘차게 북돋워 주게 되기도 한다.

 

 

2. 꺼지지 않는 사랑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길

 

시인에게는 이승의 한 생 내내 추억으로 미련으로 상처로 간직해온 사랑이 있다. 시인은 그 사람을 향한 가슴의 불을 끌 수 없어 밤이 이슥하도록 강가를 걸으면서 멀리 불빛 어리는 방들에는 모두 애타게 가슴 죄며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또 너 보고 싶어). 레테의 강에서 시인은 , 너를 좋아해라고 한 죽은 그 사람의 말이 갑자기 망각을 뚫고 머리에 떠올라 벼락 맞은 듯 전율하며 무정했던 자신을 자책하면서 한편으로 그 사랑은 끝내 건너서는 안 될 강이었다고 체념하는데, 바로 그 체념과 자책이 사랑의 불길을 더욱 힘차게 북돋운다. 시인은 너를 좋아한다는 그 말을 안으로 굳게 빗장 질러 놓고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한다(어떤 평행선).

 

서녘은 펼쳐 놓았던 놀을

이제 곧 거둬들이겠지만 아직은 너무 붉다

잊으려 애써도 눈에 선한 너의 모습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저녁놀보다 붉다

황혼의 비가 부분

 

사라지기 전의 노을이 더욱 붉듯 노년에 사랑의 추억은 생생하게 쇄신되는 마지막 정열이 되는 건 노인 속의 소년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창밖의 앞산 자락을,

그 응달의 나무들과 마른 풀들까지

앞마당으로, 다시 창 안으로

지그시 끌어당긴다

안으려 해보지만 품을 수는 없다

유리벽 부분

 

사랑의 주체와 객체 사이, 꿈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투명하지만 뚫고나갈 수 없는 유리벽이 있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과 꿈을 제 힘껏 공들여 끌어당겨 보지만, 사랑과 꿈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품을 수는 없음을 절감한다. 무한을 바라보려 할 때마다 무한의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유한성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눈을 가득 뒤집어쓴 보트 한 척이

호수 한 귀퉁이에 매인 채 나를 올려다본다

나도 나를 들여다본다

눈길 1 부분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를수록

계곡으로 굴러 내리는 마음, 이 공허

 

허공의 뜬 구름은 어디로 가는지,

구름 그림자 아래 주저앉아 있는 내가

땀에 절어 산꼭대기까지 오른 나를

되레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산길에서 부분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을 되비추는 거울이 된다. 상상력은 우리 자신을 천국에 올려놓았다가 지옥에 내쳤다가 하지만 시간은 끝내 우리 자신의 민낯을 우리 앞에 드러내고 만다. 시인은 자기의 내심을 들여다보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을 만큼 정직한 기록자이다.

나는 어디로,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는지,

 

더욱 막막해진다

 

막막한 마음의 갈피에 흩날리는 눈발,

 

길들을 죄다 지우며 내리는 눈은

 

오로지 제 홀로 환한 길을 낸다

눈길 2 부분

 

갈 길을 찾아가다 길이 너무 많아/길 위에서 가야할 길을 잃어버린 나(후렴)에게 눈은 세상의 길이 다 지워질 때 비로소 마음의 길이 드러난다. 우리의 존재 전체가 방황 속에서 과일처럼 성숙하여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문득 가던 길을 멈춰 선다

 

바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갔다가 되돌아오는지

길가의 풀과 나무들, 마음을 흔들어 댄다

 

흔들리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순간에도,

아무리 멀어도 가야할 길은 가고야 말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에도 바람은 나를 흔든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지?

 

바라보면 저만큼 내가 떠밀려 간다

떠밀려 가다가 다시 떠밀려 온다

멈춰서 있는 순간에도 떠밀려 간다

 

나는 다시 가던 길을 간다

떠밀려가다가 되돌아 오고

오다가 가지만

떠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바람과 나 전문

 

길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찾아 헤맨 모든 나의 안간힘과 내 의도를 무시하고 나를 어떤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게 떠밀어낸 세상의 몰아침이 과거를 만들었고 현재를 만들고 있고 미래를 만든다. 자기에게 내재하는 내밀한 욕망을 직시하는 영혼에게 세상은 위기와 동요의 연속이고 회상과 기대는 메마름을 견디는 운명의 형식이 된다.

 

 

3. 침묵과 적막 속에 자라나는 따뜻한 믿음

 

저녁 한때의 마을과 멀어지는

외딴길 언저리,

어둠살에 묻히는 소나무 등걸에 기대선다

낮달도 서산마루를 막 넘어가고

별들이 흩어져 앉는 동안

마냥 그대로 붙박인다

갈 길도 가야 할 길도 아예 다 내려놓고 싶다

 

여전히 어둠을 흔드는 풍경 소리,

마음을 안으로, 안으로 들여보낸다

 

안 보이는 어떤 부드럽고 커다란 손이

검은 구름 사이로 어른거린다

풍경 소리 부분

 

황혼녘에 시인은 산 중턱 소나무 등걸에 기대서서 별들이 흩어져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는 자신의 내심을 응시한다. 바로 그때 기적처럼 어떤 부드럽고 커다란 손이 시인의 눈앞에 나타난다. 내 삶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갈 길이 막혀 있다 하더라도 참은 참이고 선은 선이지 참이 거짓이 되거나 선이 악 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참을 참으로 규정해 주는 궁극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나 자신까지 나를 떠난다 하더라도 근거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한 나는 나의 현재를 보람 있게 가꾸고 나의 세상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침묵과 따뜻한 적막 속에서 그 근거 자체에 대한 믿음을 확인한다. 나아가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 감사의 기도가 환해지고 적막 속에 타오르는 따뜻한 불꽃을 끌어안게 된다.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가고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하루가 지나간다. , 여름,

가을도 지나가고

 

또 한해가 지나간다.

꿈 많던 시절이 지나가고

안 돌아올 것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물같이, 쏜살처럼, 떼 지어 지나간다.

 

떠나간다. 나뭇잎들이 나무를 떠나고

물고기들이 물을 떠난다.

사람들이 사람을 떠나고

강물이 강을 떠난다. 미련들이 미련을 떠나고

 

구름들이 하늘을 떠난다.

너도 기어이 나를 떠나고

못 돌아올 것들이 영영 떠나간다.

허공 깊숙이, 아득히, 죄다 떠나간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다.

나의 이 낮은 감사의 기도는

마침내 환하다.

적막 속에 따뜻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지나가고 떠나가고 전문

 

 

 

 

저자 소개

 

이태수

194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74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자유시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 그림자의 그늘(1979, 심상사), 우울한 비상의 꿈(1982, 문학과지성사), 물 속의 푸른 방(1986, 문학과지성사),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1990, 문학과지성사), 꿈속의 사닥다리(1993, 문학과지성사), 그의 집은 둥글다(1995, 문학과지성사), 안동 시편(1997, 문학과지성사), 내 마음의 풍란(1999, 문학과지성사),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 문학과지성사), 회화나무 그늘(2008, 문학과지성사), 침묵의 푸른 이랑(2012, 민음사), 침묵의 결(2014, 문학과지성사), 육필시집 유등 연지(2012, 지식을 만드는 지식), 시론집 여성시의 표정(2016, 그루),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2016, 만인사), 미술 산문집 분지의 아틀리에(1994, 나눔사), 저서 가톨릭문화예술(2011, 천주교 대구대교구) 등을 냈다. 매일신문 논설주간,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대구시인협회 회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으며, 대구시문화상(1986, 문학), 동서문학상(1996), 한국가톨릭문학상(2000), 천상병시문학상(2005), 대구예술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보도자료 문의 : 김요안 기획실장 02) 702-1800 / 010-4374-9874

이태수 선생님께

 

이번 시집따뜻한 적막(2016, 문학세계사)은 마음의 행로이자 황혼의 엘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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