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8    업데이트: 23-12-13 15:49

언론 평론

정제된 서정, 은유의 시학
아트코리아 | 조회 708
정제된 서정, 은유의 시학
―박희숙 시집 『새벽 두 시의 편의점』  

 

 
ⅰ) 박희숙의 시는 섬세하고 정제된 서정抒情에 분방하고 발랄한 언어의 옷을 입히고 날개를 달아 낯설지만 빠져들게 하는 세계로 이끄는 매력을 발산한다. 이 낯설게 하기의 안팎에는 은유隱喩 기법이 은밀하게 개입되고 있으며, 언어가 언어를 부르는 연상聯想의 묘미가 다채로운 양상으로 변주變奏된다.
신선하거나 기발한 발상과 상상력이 받들고 있는 그의 시는 이미지의 비약이나 전이轉移 때문에 때로는 문맥이 까다로워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첨예한 감성과 언어 감각의 결과 무늬들이 시적 개성을 그 늬앙스 만큼 강화해 준다.
시인은 어떤 사물에든 빈번하게 인격人格을 부여한다. 조우하는 사물들을 사람처럼 가까이 끌어당겨 교감하면서 거의 어김없이 화자의 감정을 이입移入한다. 이 때문에 그의 시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투영하거나 투사해 자아화自我化된 세계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인간을 향해 열리는 마음을 담은 시에는 한결 곡진曲盡하고 절절한 사랑과 연민憐憫이 스미고 번진다. 또한 토속적인 서정과 과거지향적인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편들에는 회귀의 정서가 두드러진다.
 
ⅱ) 시인은 어떤 사물에든 인격을 부여해 사람같이 가까이 끌어당기며 은밀하게 교감한다. 시인이 마주치는 사물에는 빈번히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다. 벚나무를 향해서도, 장미를 향해서도 시인은 그 대상을 나무나 꽃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서정적 자아가 개입되면서 내면을 투영하거나 투사해 다분히 자아화(주관화)된 세계(대상)를 떠올린다.
시인의 겨우살이를 했던 심정이 벚나무에 투사돼 “세한의 고비마다 / 눈 뜨고 못 볼 일 저 혼자 받아내느라 / 할 말을 잃은”(「풍등」) 것으로 들여다보며, 벚꽃이 활짝 피는 모습도 “봄바람에 봇물처럼 말문 터졌다”(같은 시)고 주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한다. 더구나 벚꽃의 개화開花를 말문을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보지 않는다.
 
천만 겹 날개 돋은 연분홍 은어들
풍등, 풍등 날아오르는
사월
 
벚꽃 그늘에 앉으면 무거운 생각들도
날아오르겠다
―「풍등」 부분
 
인용한 대목에서 읽게 되듯, 벚꽃의 개화는 연분홍 은어隱語들에 천만 겹 날개가 돋고, 벚꽃이 지는 모습마저 소원을 담아 하늘에 띄우는 풍등에 비유된다. 사월(봄)은 이같이 할 말을 잃은 채 세한歲寒의 온갖 고비를 이겨내고, 때가 되어 하지 못했던 말들을 터트릴 뿐 아니라 그 말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승上昇 이미지를 부여한다.
이 시에서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벚꽃 그늘에 앉으면 무거운 생각들도 / 날아오르겠다”는 구절과 흩날리는 벚꽃잎의 모습을 “풍등, 풍등 날아오르는” 동작으로 그리는 대목이다. 벚꽃 그늘에만 앉아도 무거운 생각들에 날개가 돋아 날아오르고, 그 동작들이 풍등風燈처럼 “풍등, 풍등” 큰 동작으로 상승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언어가 촉발하는 연상聯想의 묘미는 시인 특유의 감각이 발산될 경우 “풍등, 풍등”보다도 섬세하고 첨예하게 반짝인다. 봄에 새잎이 돋아나는 모습을 “연두야, 너는 / 새로 돋은 젖니를 반짝이며 / 봄 산 어루만지고 있니”(「다시, 봄」 )라든가 “널 보고 있으면 내 귀엔 / 대추나무 햇잎이 곰실곰실 돋아나 // 노랑턱멧새가 반으로 접은 / 휘파람을 퐁퐁 던지고 있어 / 분홍분홍한 시폰 원피스 날갯짓 같아”(같은 시)와 같은 참신한 발상發想과 연상적 상상력이 첨예한 감각의 옷을 입는다.
새잎이 돋는 나무를 여성(모성母性)으로 의인화擬人化해 바라보는 이 시에서는 연둣빛 햇잎을 갓난아기처럼 젖니를 반짝이며 어미인 봄 산을 어루만진다고 그린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자신의 귀에는 대추나무 햇잎이 돋아나고, 희귀稀貴한 멧새가 반으로 접은 휘파람을 던진다고도 한다. 게다가 그 동작과 소리와 빛깔을 ‘곰실곰실’, ‘퐁퐁’, ‘분홍분홍’이라고 수식해 감각적 묘사의 묘미가 한결 증폭된다. 연둣빛 햇잎을 “분홍분홍한 시폰 원피스 날갯짓 같아”라는 구절과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산등성이마다 찌르르 젖이 돌고 있어”라는 묘사는 특히 그렇다.
그런가 하면, “담장이 웃고 있었어”로 시작되는 「장미아파트」에서는 담장을 덩굴장미의 아파트로 여기기도 하지만, 담장이 가슴을 가지고 있으며, 감정을 떠올리는 그 웃음이 ‘애인의 꽃’에 비유되고, 화자가 장미처럼 웃는 것으로도 묘사된다. 사물과의 이 같은 교감은 역시 사람 사이의 감정 교환으로 전이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담장이 웃고 있었어
애인의 꽃처럼 한꺼번에 웃고 있었어
 
<중략>
 
가다가 돌아보는 담장
장미에서 나는 가마득히 멀어지고 있었어
 
아무도 없는데, 나는 장미처럼 웃고 있어
실눈 웃음에 기우뚱 넘어와 주던 그댈
불러내고 싶거든
지금
―「장미아파트」 부분
 
이 시에서 가슴(감정)을 가진 담장은 감정(웃음)을 장미로 드러내 보이며, 담장에 줄지어 일제히 핀 덩굴장미는 ‘애인의 꽃’처럼 한꺼번에 웃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화자는 아무도 없고 그 웃음에서 멀어지는 길을 간다. 그 길을 가면서 되돌아보며 ‘실눈 웃음’으로 장미처럼 웃는다. 이 같은 교감은 지난날의 되돌리고 싶은 기억과도 연계連繫돼 있다. 실눈 웃음에 화답해 주던 그대(애인)를 다시 만나고 싶은 감정(연정戀情)과 얽힌다. 담장 너머로 기우뚱 넘어오는 ‘장미’는 불러내면 아파트에서 바로 나와 주던 ‘그대’와 ‘그 웃음’(화답)으로도 읽힌다.
시인은 거의 모든 사물을 사람의 반열로 끌어당겨 바라보고 들여다보는 이면裏面에는 따뜻한 마음이 자리매김해 있다. “늦장마 빗속을 헤치고 / 굴뚝새 한 마리 집 안으로 날아들어 / 거실이 순간 탱탱해졌다”(「굴뚝새를 부탁하다」)는 구절에서 읽게 되듯, 새 한 마리가 비를 피해 거실로 날아드니 순간 거실이 탱탱해졌다는 생각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 새는 무리를 이탈離脫한 어린 새이며, 비를 피해 숨을 곳(굴뚝)을 찾다가 “숨을 만한 굴뚝은 보이지 않고 / 사방이 벽, / 천지가 낭떠러지”(같은 시) 같은 거실로 날아들게 되지 않았는가. 이 정황은 굴뚝새로서는 어려움을 피하려다 더 나쁜 상황에 갇힐 수밖에 없는 벽과 낭떠러지를 만나게 된 게 아닌가. 시인은 바로 그 점에 연민을 끼얹으며,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일은 “창문을 / 열어 두는 일”이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모과나무에게 / 어린 굴뚝새를 부탁하는 일”(같은 시)라고 따뜻한 마음을 열어 보인다. 이 같은 마음은 식탁 위에 놓인 ‘사과’를 향해서도 같은 빛깔로 투사된다.
 
사과는 사과를 좋아해
한밤중 사과는 오도카니 깨어 있어
사과는 사과를 불러 날밤을 새우지
목마른 사과는 자주 나를 지나쳐 버리기도 해
 
오늘의 사과는 둥근 식탁 위에 있어
껍질을 벗길 때, 사과는
칼을 보고 기겁하다가 기절할 뻔했지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심장이 쪼개질 뻔했지
―「사과」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은 사과와 사과의 관계, 사과와 화자(사람)와의 관계를 들여다보면서 그 관계를 사람의 문제로 환치換置한다. 사과를 향해 사과(잘못을 빔)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나 할까. 사과는 좋아하는 대상(사과)을 목말라 하며 날밤을 새우지만 화자가 먹기 위해 껍질을 벗기는 칼을 보고 기겁하다가 기절할 뻔했다고 보는 마음자리 또한 이 시인답다.
식탁 위의 사과가 자주 화자를 지나치려 했다든지,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심장이 쪼개질 뻔했지”라는 대목에는 서정적 자아의 순수한 감정이 오롯이 이입돼 있다. 뒤집어서 보면, 화자는 사과를 자주 먹고 싶어 하고 그 속살을 좋아한다. 사과와 화자의 관계는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심장”이 쪼개지지 않는 유보留保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ⅲ) 시인의 인간을 향한 마음은 더 곡진曲盡하고 절절하다. 어떤 빛깔을 띠든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보다 사랑과 연민을, 때로는 애증愛憎을 한결 짙게 풍긴다. 「당신, 미쳤어요?」 에서처럼 일에만 골몰하며 무심하기만 한 사람에게 카톡 문자를 보내도 대답이 없자 앙탈한다. “밥때도 모르고 일에 파묻혀 있는가? / 너무 미쳐 탈 / 때때로 기대에 못 미쳐”서다. 하지만 “외출 중 우리, 미치다와 마치다 사이 /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 걸까?”라고 ‘함께, 그러나 따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삶을 반어법反語法으로 떠올리며, 그 ‘당신’과 이별의 아픔을 짙게 절규하듯 토로한다.

샐비어가 왜 붉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얘진 시간이 커튼처럼 너울거려요
그럴 줄 알았으면 끄트머리에
진주 방울이라도 몇 개 달아 둘 걸 그랬어요
당신 목소리 꺼 두었는데
깨꽃에서 뎅그덩뎅그덩 종소리가 나요
하릴없이 나는, 붉고 흰 종소리를
뗐다 붙였다 해요
깨꽃의 반은 붉고 반은 이울어
발 없는 내가 물색없이 절룩거리면
당신 무릎도 흔들리는 종지같이 될까 봐
있는 힘 다해 이별을 끌어안아요
깨를 털듯 당신을 툭툭 털어 버리기 위해
어제도 그제도
당신 길이만큼 샐비어 꽃밭 늘였다는 걸
아실지 모르겠지만요
―「샐비어 붉은 저녁」 부분

깨꽃과 샐비어를 매개媒介로 붉은색과 흰색의 대비를 통해 마음의 음영을 떠올리는 이 시는 샐비어의 붉은빛과 하얀 시간을 교차시키면서 내면 풍경을 곡진하게 떠올린다. 샐비어가 왜 붉었는지 모르겠다지만, 하얘진 시간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느끼게 되고, 진주 방울을 달지 않았으며 ‘당신’ 목소리를 꺼 두었는데도 깨꽃에서 붉거나 흰 종소리(방울 소리가 아닌)를 듣게 되는 환청幻聽과 환상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이 같은 역설逆說은 “있는 힘 다해 이별을 끌어안아요”와 “깨를 털듯 당신을 툭툭 털어 버리기 위해”라는 구절에 이르러 절정絶頂을 이룬다. 하지만 “당신 길이만큼 샐비어 꽃밭 늘였다”는 대목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절절한 그리움을 다스리고 있다.
우리의 정서는 그 뿌리가 한恨, 더 구체적으로는 정한情恨이라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家父長制의 여성들에게는 말할 나위 없겠지만, 농경사회의 대가족 속에서 성장한 시인에게도 이 같은 정서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정은 애틋한 사랑과 연민을 동반한다.

눈 감고도 썰지 싶어서
무언가 자꾸 썰고 싶어서
밤중에 일어나
홑이불만큼 얇아진 도마를
이리 엎었다 저리 뒤집는다
 
일생 썰어 놓은 것들은
어디서 잠들었나?
 
<중략>
 
뱃속 다 들어내고
마침내 활이 된 등도마를
힘겹게 돌아 누이는 중이다
 
어머니,
―「도마」 부분
 
어머니가 그랬듯이, 도마질을 해 온 화자는 어머니와 도마를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여기서 하도 오래 온갖 것을 올려놓고 썰어서 얇아진 도마를 평생 희생을 감내한 노구老軀의 어머니로 바라보면서 연민을 끼얹는다. 한가운데가 움푹 파인 도마와 같이 활처럼 등이 휘어진 어머니를 힘겹게 돌아 누이는 심경이 오롯이 담겨 있다.
어머니는 또한 ‘가랑잎’이나 ‘시래기’에 비유되기도 한다. 「숨」이라는 시에서는 “가랑잎 같은 어머니 // <중략> // 목구멍 언저리에 뛰노는 / 어머니, / 뱉으려다 말고 나는 // 끊어질 듯 이어지는 / 아흔 너머 / 거룩한 숨을 / 물끄러미 들여다보네”라고 쓰고 있으며, 「시래기와 손잡다」에서는 어머니의 노후 여생餘生이 한 두름에 엮인 채 말라가는 시래기에 견주어 바라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시래기(어머니)를 닮아가는 비애를 비켜서지 못한다.

밑동 베어내고 남은 생이
한 두름에 엮인 채
뒷담 벼락 시시한 시래기로
말라가고 있었다
 
―엄마처럼 안 살아
 
서슬 퍼렜던 나
시간에 붙잡혀 뱅뱅이를 돌다가
시래기를 닮아간다
―「시래기와 손잡다」 부분
 
나아가 이 시의 후반부에서는 시를 쓰면서 느끼는 비감悲感을 “지어도 밥 안 되는 시를 안치고 / 시시콜콜 매만지며 뜸을 들이다가 // 돌아보면, / 어머니 혼자 시가 되어 있다”고 비관적인 자성自省에 다다른다. 사람의 삶이 결국은 ‘시시한 시래기’로 말라가듯이 생활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시에 대해서도 매만지며 뜸을 들여봤자 다를 바 없다는 비감을 묻히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시와 삶을 하나로 아울러 바라보면서 상승하고 싶은 열망을 은밀하게나마 내비친다고도 볼 수 있다.
살구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열리는 살구를 먹고 죽을 수 있을지 우려하던 할머니의 마당귀에 살구가 노랗게 익는 모습을 희화적戱畵的으로 그린 「살구나무 아래」, 배달된 늙은 오이를 보면서 “어린 새끼 끈 붙이겠다고 기어이 / 혼자 늙은 큰언니 외꽃 같은 얼굴”을 연상하며 ‘오래된 적막’과 ‘냉가슴’에 연민을 보내는 「노각」도 같은 궤에 놓이는 시이며, 빛깔이 다소 다른 「간이역」도 쓸쓸하기 그지없는 적막감의 변주다.
 
추풍 머무는 봉정역 대합실엔
영천장 보러 가는 아지매도
불콰하게 취한 관정리 아재도 보이지 않고
늙은 나무의자에 햇살만 뒹굴고 있었다
 
<중략>
 
폐역사의 적막은
가져가는 이 없어 벽시계 앞에 걸터앉았다
―「간이역」 부분
 
세월의 흐름과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이 시는 낡은 나무의자 위에 뒹구는 햇살과 가져가는 사람이 없어 벽시계에 걸터앉은 적막을 포착하는 시인의 상상력과 감각이 돋보인다.
이 같은 언어 감각은 양부모의 학대虐待로 숨진 아기 정인이를 애달파하는 「정인이 생각」에서는 슬픔의 극대화를 동반하면서 또 다르게 반짝인다. 일인칭 화법으로 “나는 알이에요 / 철없는 엄마가 슬어 놓은 말랑한 알이에요 / 뒤돌아보며 멈칫거리며 숲으로 숨어 버린 / 엄마의 부끄러운 알이에요”로 시작되며, “던지지 마세요, 두드리지 마세요 / 이제 막 눈부터 웃기 시작한 / 깨지기 쉬운 알이랍니다”로 이어지며 절절한 울림을 빚는가 하면, “난 이제 안데르센 마을로 가요 / 백조가 될 거예요”라고 맺고 있어 긴 여운餘韻을 안겨 준다.
 
ⅳ) 향토적인 서정과 과거지향적인 그리움의 정서(향수鄕愁)는 이 시인의 시에 관류貫流하는 주요 특징 중의 하나다. 「찔레꽃 편지」에서 시인은 산길에서 찔레꽃 편지를 받으며, 그 봉투 속에 초가지붕과 나비처럼 시간을 거스르며 날고 있는 박꽃이 듬성듬성 피어나 있고, 찔레순 먹은 계집아이 둘이 멋모르고 찔레꽃 웃음을 따라 웃는다. 눈길 닿는 산모롱이마다 찔레 향이 따라오기도 한다. 아릿한 옛 추억의 반추反芻로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경우에 다름 아니다. 「어린 우체국」에서는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아름답게 불러온다.
 
어릴 적 아버지의 편지 대부분은 내가 그의 눈에서 애지랑을 떨던 이야기였고 조금 자라선 어린 신부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같은 것이었다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때 가끔 산딸기 같은 선물도 따라왔는데 뻐꾸기 울음 하나에 산딸기 하날 섞어 먹는 아버지 사랑 맛이 새콤달콤했다
찔레 넝쿨이 대문 반쪽을 덮으며 피고 지는 동안 남은 이야기는 삐뚤빼뚤 어머니의 손으로 완성되어 도시 귀퉁이에 흩어져 일가를 이루었고 우체국은 문을 닫았다 비 오시는 날이면 어린 우체국을 거쳐 온 편지에서 개복숭아꽃이 피기도 했다
―「어린 우체국」 부분
 
어린 시절과 성장기의 기억들을 향토적인 서정의 옷으로 치장해 보여 주는 시다. 뻐꾸기 울음 하나에 산딸기 하나를 섞어 먹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든가, 찔레 넝쿨이 대문 반쪽을 덮으며 피고 지는 분위기, 어머니의 편지에서 개복숭아꽃이 피는 정서는 시인 특유의 감성이 빚어 보이는 추억의 아름다운 미화美化가 아닐 수 없다.
고향마을은 또한 “열두 살 계집아이 / 고들빼기꽃 징검다리 삼아 스물에 닿는 동안 / 낮은 물 울타리 그 집 뻔질나게 드나들”(「새몯안 이야기」)거나 “꽃배를 타고 물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 방울새가 어깰 스쳐도 좋을 / 물속 낮은 방 하날 가지는 게 좋았다”(같은 시)는 기억을 못 잊게 할 뿐 아니라 “초저녁별이 / 아이들처럼 평상에 뒹굴고 / 별똥별 꼬리에 매달려 꿈속을 날아다니던 / 그날의 슬하”(「바람의 기억」)라는 환상으로 타임머신을 타게 하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이기만 할까.
 
꼬맹이들 묏등에 올라
통통한 궁둥이 붙이고 조르르 미끄럼을 타는데
참았던 웃음이 옆구리로 터져 나올 뻔했지
 
꽃비 맞으며
아이들은 복사꽃 웃음 흩날리고, 나는
멧노랑나비 두어 마리 선물로 보냈어
―「나비의 비문」 부분
 
토속적土俗的인 정취가 물씬한 이 환상의 공간은 현대인들에게는 잃어버린 낙원樂園에도 비유될 수 있겠지만, 시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연과의 친화적 현실이지 않은가. 이같이 소중한 기억들은 시인에게 “산당화 울타리 넘어오던 햇살과 집으로 걸어가던 살피꽃밭 맨드라미와 조무래기들 뜀박질에 출렁거리던 바깥마당과 빨랫줄, 두레상에 어우러지는 높은 산과 정결한 골짜기의 취나물이며 산마늘과 어수리꽃이 재잘거리던 두레상과 손등을 간질이던 씀바귀 쌉싸래한 맛까지”(「소중한 것들」) 그리움 속에 불러 놓는다. 추억 속의 고향과 달리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찾아간 고향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안겨 주는 대상으로 비치고 있다.
 
산 아래 집들이 숨바꼭질하는 마을
모퉁이 돌면
아이들이 거미처럼 숨어 있는 곳
 
언덕배기 살구나무 집
모퉁이가 무너졌다

<중략>
 
벌판에 서 있는 바람의 아들
바람처럼 떠돌다
바위에 박혀 가라앉고 싶었다
 
사거리 잰걸음 돌아가는 모퉁이에
아버지의 바람이 분다
―「모퉁이」 부분
 
산촌山村의 고즈넉한 풍경이 예와 다르게 언덕배기 살구나무가 있는 집의 모퉁이가 무너지고, 바위에 박혀 가라앉고 싶게 하며, 잰걸음으로 돌아가는 사거리 모퉁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바람이 불 따름이다. 더구나 추억마저 반드시 아름다움으로 자리잡고 있지만도 않다. 「폭설」에서처럼 “옛집은 쓸쓸하지 않으려고 아그배나무 가까이 다가서고 새들은 잔가지가 휘도록 노래를 불러” 주는 때도 있었고 “그해 여름의 반은 / 개쉬땅나무에 마음을 붙이고 살았다”(「개쉬땅」)고 회상回想할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미의 족속
수수깡 같은 아저씨와
바람 빠진 일바지 같은 아주머니
여럿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칠월이 다 가도록
개쉬땅꽃은 눈부셨고
마음을 붙여 둔 담벼락에는
수수알 같은 수심이 무수히 지고 있었다
―「개쉬땅」 부분
 
나무 이름에 ‘참’이 아니라 ‘개’자가 붙어 있는 개쉬땅나무는 장미과에 속한다. 그러나 수수깡과 같이 비쩍 마른 아저씨와 바람 빠진 일바지 같은 아주머니를 연상케 하는가 하면, 수수알 같은 수심愁心이 무수히 지는 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미음이 아주 관능적官能的인 생각을 불러다 주기도 한다.
 
비탈밭 물복숭아는
절묘한 빛의 각도를 익혀
담홍색 관능의 테두리를 얻었겠지
 
<중략>
 
마돈나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수밀도, 벌들이 윙윙대는 외진 섬에서
입을 앙다문 채 너는
잠시 세상을 버리기로 한 거 맞지?
―「수밀도」 부분
 
과즙이 풍부하고 과육이 달콤한 수밀도水蜜桃는 비탈밭에서 절묘한 빛의 각도를 익혀 담홍색 관능의 모습을 갖추게 됐으며,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가수이자 배우인 마돈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상상한다. 그래서 “아찔한 네 사랑의 비밀”을 벌들이 윙윙대는 외진 섬에서 완강하게 안으로 간직하며 “잠시 세상을 버리기로 한 거 맞지?”라고 반문反問해 보는 것도 같다.
 
ⅴ) 은유隱喩를 축으로 언어가 언어를 부르는 묘미를 다채롭게 구사하고 변주하는 재치와 미묘한 언어 감각은 이 시인의 가장 두드러진 개성이다. 이미지의 비약이나 전이 때문에 문맥이 까다로워지고 난해성難解性이 따르기도 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시적 개성을 강화해 주는 덕목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한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시 「주머니 속 그림자는 어디로 갔을까?」에서는 “여행 가방 속에는 자잘한 주머니들이 아주 많아 / 기억을 잘 붙잡아 두지 않으면 / 아주머니들이 자꾸 집을 나가 버리지”라고 운을 뗀다. ‘주머니’와 ‘아주머니’는 아주 이질적異質的인데도 이 두 어휘를 연결시키면서 미묘한 의미망을 빚는다. 여행 가방 속의 많은 주머니에 든 물건들이 잘 알지 못하면 물건을 찾기 어렵다는 걸 아주머니들이 자주 집을 나가 버린다고 비약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여행지를 뒤돌아보는데 집들이 숨바꼭질을 하는 바람에 낯선 골목길이 번번이 엇갈린다고도 한다. 여행지의 낯선 골목에서는 집을 찾기 어렵다는 말을 뒤집어 표현하는 경우겠지만, 마지막 연에서도 “여행지에서 아직 / 데려오지 못한 나를 찾느라 / 안주머니와 바깥 주머니 사이를 헤매고 있”다고 마무리해 거듭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같은 언어 운용과 낯설게 하기는 상투성을 훌쩍 뛰어넘은 시적 묘미를 증폭시켜 주기도 한다.
 
은행 두 채를 털었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동명교회 목사님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구린내 나는 은행을 탈탈 털어 아예 껍질까지 벗겨버렸다는 이야기인데 돈 돌아가는 걸 마음에 두지 않는 목사님이 작심하고 은행을 턴 것이란다
 
<중략>
 
잔뜩 두들겨 맞은 은행나무 낯빛이 노랗다 심심해서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와르르 몸을 떠는데 목사님 얼굴은 늦가을 바람만큼 단호하다 아무 데나 끼어드는 물신의 구린내는 뿌리째 뽑아버리는 게 좋다고 운동화 밑바닥까지 탈탈 털었다
―「은행을 털다」 부분
 
발음이 같아도 의미가 사뭇 다른 ‘은행銀杏’과 ‘은행銀行’의 속성을 희화적으로 그리면서 날카로운 풍자諷刺로 나아가는 이 산문시는 이질적인 언어 뉘앙스를 충돌시키는 발상이 기발하다. 성직자인 목사牧師가 은행 두 채를 털었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 수신자로서는 당장은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치 건물처럼 두 채라고 하는 표현도, 교회 안의 ‘은행 구린내’와 돈이 갖는 ‘물신物神의 구린내’를 싸잡아 비판하는 풍자가 날카롭고 재미있다. 더구나 목사가 작심하고 은행을 탈탈 털고, 물신의 구린내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게 좋겠다며 운동화 밑바닥까지 탈탈 털었다는 대목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의 연출로 읽힌다.
 
내편이라 부르는 그 여자의 남편이
둥근 자세로 배부른 아내의 발톱을 다듬어요
손과 발이 맞잡은
그야말로 손발이 잘 맞는 부부예요
 
<중략>
 
오래 구부리다 보면
치솟고 싶을 때가 있을 거예요
내 편인지 남 편인지
가늠 안 될 때가 있어요
―「발톱 내미는 여자」 부분
 
남편이 임신해 거동이 불편한 아내의 발톱을 다듬어 주는 모습을 그린 이 시도 언어유희가 빚어내는 묘미가 상큼하다. 배부른 아내의 발톱을 다듬는 자세를 손과 발이 맞잡았다거나 손발이 잘 맞는 부부夫婦라는 표현이 그렇고, ‘남편’이라는 말에 ‘내 편’이 아닌 ‘남 편’이라는 의미를 적용해 “내 편인지 남 편인지” 가늠이 안 된다는 비아냥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삶의 방식 역시 다분히 희화화된다. “울음 앞에 잠잠히 기다리는 것은 / 오래 익혀 온 내 삶의 방식”이라든가 “운다고 달라질 것 없는 날들이 / 나를 지우며 건너가고 있어”(「울음의 방식」)서가 그렇다. “종점의 꽃들은 지기 위해 핀다”(「망초꽃 피는 종점」)고 보며 그 꽃밭에는 내남없이 모여들지만, “종점에 엎드린 망초는 / 스르르 풀리는 노구의 눈망울을 닮았다”(같은 시)고 그리는 어법도 그러하다. 감정이입을 해 대상을 바라보는 「허수아비」 역시 같은 맥락脈絡의 시다.
 
채우려 하면 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슬픈 몸뚱어리가 있어
낡은 모자, 빈 깡통 옆구리에 찼네
 
참새구이가 맛있다는 풍문이 있지만
그 사내, 한마당 무르익는 수다를 듣거나
깡통을 흔들어가며 큰 소리를 지를 뿐
참새를 잡아채 가두거나 기절시킨 일은 없네
 
뼛속까지 허공인 참새 몇 마리가
하늘 자락을 질질 끌고 와 깡통을 채웠네
 
아직 들판에 벗어나지 못한 그 사내
하늘로 가득해진 깡통을 흔들어 보이며
히죽히죽 웃고 있네
―「허수아비」 전문
 
‘채움’과 ‘비움’에 착안한 듯한 이 시는 낡은 모자를 쓰고 빈 깡통을 옆구리에 찬 ‘허수아비’의 공허空虛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허수아비를 빗대 허수아비 같은 사람(사내)를 풍자하는 이 시는 “뼛속까지 허공인 참새 몇 마리가 / 하늘 자락을 질질 끌고 와” 허수아비의 큰 소리만 내는 깡통을 채운다거나 허수아비가 “하늘로 가득해진 깡통을 흔들어 보이며 / 히죽히죽 웃고 있”다는 대목도 허망虛妄의 변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공허감은 다른 시들에서도 산견散見된다. “사람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구름 아래를 / 지나갈 뿐 / 공중은 그저, 구름이 한물이다”(「공중은 구름이 한물이다」)든지 “오늘도 계단이 심하게 출렁거렸어 / 살아 있는 제 숨을 힘껏 흔들어 보였던 게지”(「춤추는 계단」), “미리 도착한 막차를 놓치고 / 새벽을 기다리는 동안 / 나무들도 태양을 낳으려고 끙끙대고 있었다”(「막차를 놓치고」)는 묘사들이 그 예다. 하지만 희망은 어둠을 견디며 관통하는 새벽에 잉태孕胎되기도 한다.
 
고양이처럼 웅크린
새벽 두 시의 편의점

건성으로 켜 놓은 형광등 아래
메마른 눈꺼풀 견디는 미생이
두 시에서 네 시 모퉁이를 몽상인 듯
건너고 있어요
 
벽면 차지한 도시락 종류만큼
두근거리는 모서리, 바코드를 읽는 동안
초침이 척척 등뼈를 밟으며 지나가요
 
<중략>
 
출입문에 눈 디밀어 보는 회색 고양이가
저 닮은 눈동자에 화들짝 놀라는
새벽 네 시
 
한길 건너에는 편의점이 있고
새벽은 구부러진 골목을 돌아 천천히 도착해요
당신의 미명처럼 말이에요
―「두 시부터 네 시 사이」 부분
 
시인은 밤낮이 다르지 않게 가동되는 편의점의 새벽 두 시부터 네 시 사이의 풍경에 천착穿鑿한다. 초점은 고양이처럼 웅크린 상점 안의 신분이 불안정한 날품팔이(미생未生)에 맞춰져 있다. 웅크린 편의점의 형광등은 건성으로 켜져 있고, 일하는 사람도 그 모퉁이에서 졸음을 견디며 몽상夢想인듯 미명未明으로 다가간다.
다양한 종류의 도시락으로 대변되는 상품들도 팔릴 때를 기다리므로 막연하지만 두근거리고 그 모서리들도 두근거리며, 팔려나가는 동안에도 하염없는 두근거림의 시간은 간다. 시인은 이 시간의 흐름을 이같이 두근거린다면서도 초침이 척척 등뼈를 밟으며 지나간다는 과장법誇張法으로 그 분위기를 극대화極大化한다. 이 과장법은 고양이처럼 웅크린 편의점의 건성으로 켜져 있던 형광등이 미명 가까워진 새벽 네 시엔 눈동자가 반짝이는 회색 고양이가 자기 눈동자를 닮아 화들짝 놀란다는 표현도 낳는다.
시인은 또한 그 이전과는 달리 편의점을 한길 건너편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자신이 옮아서 깨어있는(기다리는) 구부러진 골목을 돌아 새벽이 천천히 도착한다고 그리는가 하면, 그 새벽을 ‘당신의 미명’으로 환치해 놓음으로써 이 시의 초점을 ‘당신’을 빗대 자신의 내면으로 비꾸어 미명(새로운 희망)을 기다리는 심경을 투사해 보인다.
시인은 어쩌면 언어 운용과 그 연금술鍊金術의 ‘여우’일는지도 모른다. 「시詩」라는 시에서 시인은 “우리 집 다락에 여우 한 마리 숨어 산다 / 나도 가끔 여우 짓을 한다 싶어 한통속이려니 했다”면서 “그녀는 부르기 전에 다가서고 / 순식간에 사라지는 묘한 꼬리를 가졌다”고 ‘시’를 ‘그녀’로 바꿔 그 묘한 시마詩魔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 시마는 “찔레꽃 덤불이나 / 아무도 오지 않는 운동장에 / 한나절 나를 묶어 두기도 하고 / 꽃무늬 원피스를 팔랑이며 빈 그네에 오르기도” 한다며, 시와 더불어 살아가는 심경과 그 마음자리를 다음과 같이 은유하고 있다.
 
그녀가 그넷줄을 밀었다가 당길 때
꼬리에서 아슴아슴한 바람이 일었는데
새벽을 싣고 오는 찔레 향 같다고 해야 할지
달밤에 길어 올린 서늘한 물내라 해야 할지
 
여우에게 단단히 홀린 나는
꼬리 어디쯤 감췄다는 진주를 찾으려고
밤나질레 안달이 나 있었다
―「시詩」 부분
 
시는 더 나은 삶과 그런 세계를 향한 꿈꾸기의 소산이며, 현실적인 삶과 맞물린 언어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변용하는 언어예술이다. 그 세계로 나아가는 길은 무명無明과 비의秘義 너머로 트여 있는지도 모르며, 이미 마련돼 있는 왕도王道도 없다. 박희숙은 여우와도 같은 시에 사로잡혀 안달이 난 시인이며, 새벽의 찔레 향이나 달밤의 서늘한 물내에 민감한 바와 같이 ‘여우’(시)가 은밀하게 품고 있는 ‘진주’(시세계)를 찾아내고 더 빛나게 할 재능과 끼를 지닌 시인이라는 느낌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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