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8    업데이트: 23-12-13 15:49

언론 평론

자기동일성 혹은 내면의 빛 찾기 -이태수, 「무명無明 길」
아트코리아 | 조회 356
자기동일성 혹은 내면의 빛 찾기
-이태수, 「무명無明 길」
 
 
산 넘으면 산이,
강을 건너면 강이 기다린다
안개 마을 지나면 또 안개 마을이,
악몽 벗어나면 또 다른 악몽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잠자도 깨어나도 산 첩첩 물 중중,
아무리 가도 제자리걸음이다
 
눈을 들면 먼 허공,
 
그래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안개 헤치며 마을을 지나 마을로
악몽을 떨치면서 걸어간다
무명 길을 간다

무명無明의 소박한 의미는 빛이 없음, 즉 특정한 자연현상으로서의 어둠을 뜻한다. 그러나 시의 경우 이 무명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에서는 그것이 암울한 시대와 연관된 역사적 의미로, 혹은 시인의 의식의 빛을 받지 못한 채 인식의 그늘에 묻혀있는 존재자들과 관련된 현상학적 의미로, 또한 불가의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처럼 인간의 번뇌가 파생되어가는 인과론과 연관된 불교적 사유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같이 무명에 내재된 ‘빛’은 깊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빛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암흑의 상태, 혹은 ‘나’의 의식이 대상의 본질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 아니면 ‘나’의 아둔함으로 세상의 이치를 밝히 깨닫지 못하는 미혹의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무명은 이정표와 희망이 없는 세계, 사랑과 정의가 증발된 세계, 신과 신성성神聖性이 사라진 옹색한 세계, 편견과 아집으로 진실이 뒤틀려진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태수 시인의 이 시는 ‘무명’이라는 화두를 통해 철학적, 존재론적 사유를 깊이 있게 파헤쳐주고 있어 주목된다. 시인은 인생의 밑바탕에 운명적으로 깔린 실존의 업보와 미혹의 세계를 의미심장하게 통찰하고 있다. “산 넘으면 산이,/ 강을 건너면 강이 기다린다/ 안개 마을 지나면 또 안개 마을이,/ 악몽 벗어나면 또 다른 악몽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에서 보듯, ‘산·강·안개’는 실존을 에워싼 근원적 시련이나 혼돈 또는 암울한 시대적 표상들을 상징한다. 이 부정적인 파토스는 ‘악몽’과도 같은 개념으로 인식되어 시인의 마음속에 각인된다. 왜 악몽일까? 그 이유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잠자도 깨어나도 산 첩첩 물 중중,/ 아무리 가도 제자리걸음”에서처럼 시인이 비극적인 실존의 부조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 쓰라린 생의 모순율은 시인을 마치 시지포스나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적 운명에 처해진 존재처럼 느끼게 해준다. 빛이 보이지 않는 무명의 세계, 그것은 시대와 운명, ‘나’의 실존적 삶이 제 방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채, 바람 드센 생의 벌판에 던져져 있음을 뜻한다.
이 캄캄한 무명과 우울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존재 초월을 꿈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시인의 앞길엔 “눈을 들면 먼 허공”밖에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 거듭 나타난다. 하지만 이 비극의 한계상황에서 실존의 반란이 일어난다. 그 반란은 삶의 비극적 처지성과 니힐리즘에 대한 시인의 주체적 결단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그래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안개 헤치며 마을을 지나 마을로/ 악몽을 떨치면서 걸어간다”라는 행위”에서 선명히 포착된다.
시인에게 생은 어둠을 헤치고 가야 할 고단한 여정이며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안개 마을’이지만, 이 어두운 시대와 혼돈의 세계를 초극하기 위해서는 ‘현존재da sein’로서의 주체적 방향 찾기가 필요한 것이다. 빛이 부재하는 세계, 꿈이 멀어진 세상에서 각존覺存을 이루기 위한 실존적 전환 의지는 ‘그래도’ 라는 접속어에 압축되어 있다. 비록 세상은 어둡고 온갖 시련과 미혹이 앞길을 막고 있지만, 시인은 “안개 헤치며”, 그리고 “악몽을 떨치면서” 그 어둠에 맞서 홀로 “무명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시인의 이런 태도야말로 캄캄한 생의 벌판에서 끝없이 자기동일성 혹은 내면의 빛을 찾으려는 의지임이 분명하다.

(시 출전 : 시집 유리창 이쪽, 문학세계사, 2020) 이 진 엽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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