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8    업데이트: 23-12-13 15:49

언론 평론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96) - 조선일보 / 2020년 1월 6일 월요일
아트코리아 | 조회 356
조선일보ㅡ-----2020년 1월 6일 월요일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96)


옛 우물

 
나무 그림자 일렁이는 우물에
작은 새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간다
희미한 낮달도 얼굴 비쳐보다 간다
 
이제 아무도 두레박질을 하지 않는 우물을
하늘이 언제나 내려다본다
내가 들여다보면
나무 그림자와 안 보이는
새 그림자와 지워진 낮달이 나를 쳐다본다
 
흐르는 구름에 내 얼굴이 포개진다
옛날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던 물맛이
괸 물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이태수(1947~ )
 
 
한 우물을 먹으면 이웃이라고 했다던가요. 우물가에 모이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도 낮달도 밤의 별자리도 다 자막을 이루어 그 안에서 속삭였습니다. 그 문장의 의미를 질문하며 두레박을 넣었습니다. 긷는 것은 물만이 아닙니다. '나무'와 '새'의 그림자, 우주의 빛도 다 물통으로 들어가는 셈이지요. 우리 갈증의 삶에도 그것들은 동참하여 이웃임을 알았습니다. 그 이치의 공부를 지금 어느 책자가, 어느 선생이 입으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간혹 옛 우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걷던 걸음이 더뎌집니다. '흐르는 구름'에 포개진 '나'의 본래 모습이 붙잡고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센 강추위도 깊은 우물은 얼리지 못합니다. 얕은 물이나 얼리다 맙니다. 또 한 해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아름다운 '학교'인, 어떤 계절에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깊은 '옛 우물'을 청소해야겠습니다. 그 우물은, 지금, 내 안에, 버려져 있습니다. 

시인 한양여대교수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