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8    업데이트: 23-12-13 15:49

언론 평론

2019년 대구시인협회상 심사평
아트코리아 | 조회 283
2019년 대구시인협회상 심사평
고양된 존재를 향한 열망과 그 역설
 
 
대구시인협회 집행부가 올해 출간된 회원들의 서른 권이 넘는 시집 중 심사 대상 시집 열네 권을 간추려와 심사가 진행됐다. 이 가운데 첫 시집과 지난해 신입회원이 된 시인들의 시집은 일단 유보되고, 여덟 시인의 시집 가운데 다시 세 시인의 시집으로 후보가 압축됐다.
세 시인의 시집은 모두 뚜렷한 개성과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누구를 수상자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시인단체의 상인 데다 인화와 친목이라는 덕목을 고려해 등단 연조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박미란의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가 수상 시집으로 결정됐다.
이런 심사를 할 때마다 죄짓는 기분에서 자유롭지 않은 건 작품을 평가한다는 그 자체가 위험 요인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심사위원 구성과 평가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 질 수도 있어 ‘인맥과 친분에 의한 카르텔’이니, ‘누구를 밀어 주었느니’라는 구설수가 따르는 경우가 없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번 심사는 공정을 중시했으므로 해량을 바란다.
 
박미란의 두 번째 시집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문학과지성사)는 말을 극도로 절제하고 통어하면서 그런 상태를 오래 유지하거나 얼려서 갈무리하다가 조금씩 녹여 풀어낸 말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정황을 “누가(외부 상황이) 입을 데리고 갔”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 말을 유의해서 들여다보면, ‘나’와 ‘누군가’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나=타자’라는 사실도 은밀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박미란의 시는 내면에 쌓인 갈등과 불안, 아픔과 슬픔, 안타까움과 망설임 등이 “마음의 얼음덩어리”들(「저녁에서 밤으로 흘러들었다」)처럼 응고돼 있다가 풀려나오면서 발화되고, 그 발화에 의해 빚어지는 결정체들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등단(1995,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한 지 스무 해에 이르러 첫 시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2014, 시인동네)를 내고, 다시 다섯 해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점으로도 미루어 짐작해 보게 한다. 더구나 이번 시집의 표제를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고 달아놓고 있으면서도, 첫 시집 이후 그 인터벌이 반의반으로 줄어들었으며, 정진의 모습이 뚜렷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박미란은 주로 삶의 비애와 그 그늘들을 단아하고 정결한 서정적 언어로 그리면서 그 슬픔과 아픔들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정서를 담담하게 떠올리던 첫 시집에 비해 올해 나온 두 번째 시집은 그 깊이와 높이가 크게 달라져 있다. 비유(은유)와 상징 등 다양한 기법들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 진화의 모습은 시인의 시적 화자가 “발화되지 못한 채 흔적으로 남은 시간들”(「강둑에서」)을 그 자리에 두고 다독이거나 “물어도 답할 수 없는 풍경에 가만히 숨을 내쉬”(같은 시)면서도 “안간힘 쓰며 // 제 몸 지키는 일”(「밤마다 나는」)에 더 몰두하고 “보이지 않거나 / 여기 없는 것들을 그리워”(같은 시)하는 농도가 더욱 짙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말은 비참해서 입술에서 나가는 순간 얼음이 되어요 어느 때부턴가 차가움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소음이 심한 냉장고의 커다란 얼음덩어리에 힘들었던 적 있어요 어떻게 그걸 안고 살아왔는지 몸속의 종양 덩어리를 뱉어놓은 듯 냉장고는 멈추었어요 이제 당신을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차가운 당신, 당신이라는 환상을, 견디기 싫어졌어요 마음의 얼음덩어리를 들어내면 또 후회하겠지만 녹는 순간을 지켜보던 마지막 천사처럼 우리의 느닷없는 밤도 흘러갔어요
—「저녁에서 밤으로 흘러들었다」 부분
 
이 시가 말해주듯, 발화되지 않은 말들을 차갑게 식혀 얼려도 시간의 흐름은 그 얼음덩어리(당신 또는 환상)를 녹여서 밖으로 흘려보내게 하지만, 그 흘려보낸 말들도 발화(시화)되는 순간 다시 “얼음”이 되고, 그 모든 과정마저 “시시한 일”(「겨울」)된다는 비애를 깊이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말(존재)에 대한 지독한 비관이며, 시에 대한 자학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시적 화자는 말 못 한 것들이 마음에 쌓여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이 자리에 머문다고 해도 “아무렴 어떠냐”고, “너무 애태우지” 말라고도 한다. 그러나 시인이 ‘나’인 ‘누군가’가 “입을 데리고 갔다”고 하는 발언은 그만큼 자신의 진정하고 고양된 말(존재)과 시(존재의 집)에 대한 열망이 절실하고 뜨겁다는 역설로 본다면 잘못 짚은 것일까. “참, 시시하기도 하지 / 이 모든 뒤척임”(시인의 말)이라는 말이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박미란의 이 ‘작은 격려’의 수상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정진해 큰 바다로 나아가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심사위원: 박정남, 이태수(글), 이하석, 장옥관, 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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