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    업데이트: 23-04-1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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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함께 – 존재의 소리, 경청과 호소 - 평론가 남인숙
아트코리아 | 조회 820

종이와 함께 존재의 소리, 경청과 호소

; 송광익 작품에 대하여.

종이의 빛바랜 역사성의 냄새가 좋고

찢고 이개고 두들기고 걸러서 얻어 낸 그 색깔이 좋다.

-송광익

1. 작품

존재의 기록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모더니즘. 이는 단적으로 존재의 기록을 위한 목숨 건 분투라고 말할 수 있겠다. 뒤샹이 레디메이드로 공산품을 죽이면서 그 자리를 비워둘 때, 초현실주의자들이 객관적 우연으로 오브제를 발견할 때, 그리고 미니멀리즘이 침묵으로 돌아설 때, 이 모든 지점에서 자신의 존재조건의 실현은 그야말로 모더니즘 전체를 관통하는 존재의 외침 그 자체라 하겠다. 그러나 비장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존재의 기록 속에는 농담과 헛짓도 있으며 엇길로 가는 여유와 무모한 중단도 모두 포함된다. 송광익은 8-90대 한창 뜨거웠던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실험과 도전에 응전하며 현재 종이작업에 이르고 있다. 김영세는 송광익의 작품을 두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질문과 답을 함께 담고 있다고 말한다. 송작가에 대한 그의 소회에서 가공되었으되 절제되었고 하나이면서 수백 개이고, 찢어지면서 집적되는 작품이 양상이 그러하고, 거칠게 찢은 면이 부드럽고 풍성한 질감으로 돌아오고 쉼 없는 반복은 인간적이고 고졸한 맛을 선사한다고, 그 맛 또한 그러하다고 짧은 글로 요약하고 있다. 김영세의 말처럼, 송광익의 작품은 <환대>와 같은 따뜻함이 있다. 송광익 작품이 드러내는 환대는 인간적인 해석의 결과라기보다는 송광익이 경청한 사물의 물성, 그것의 몸짓이다. ‘그것의 몸짓은 구체적인 몸의 언어로, 우리를 촉각적 욕망으로 끌어 들인다.

우리가 환대하는 그의 작품과 마주할 때까지, 작품이 완성되는 시간은 길고도 치밀하며 무수한 반복의 시간을 경유한다. 송광익이 활용하는 종이는 안동지와 신문지이다. 속에 심이 든 테이프에 안동지를 붙이고 테이프 위로 올라온 종이를 다시 일정간격으로 거칠게 자르거나 핑킹가위로 손질해서 거친 단면을 만든다. 잘린 면은 사각으로 눕기도 하고 삼각으로 눕기도 하며 지그재그의 어지러운 선들이 물결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의 표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성한 숲길이 되고 빛과 바람, 소리에 반응하며 그때그때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런 표면은 테이프에 붙인 종이를 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화폭이 될 판넬에 배접하듯 종이를 붙이고 그 위에 일정 간격의 나무판을 붙인 다음, 나무판 사이의 골을 만들어서 그 골에 테이프에 붙인 종이를 세우는 것이다. 2미터가 넘는 규모의 작업을 할 경우, 한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이 과정은 수천 번의 반복이 잇따른다. ‘반복은 미니멀리즘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이기는 하나 송광익의 반복은 회화의 자율성을 보증하려는 반복이 아니다. 작품이 건네는 말은 반복 속에 각인되는 흔적과 그 흔적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확장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조형요소로서의 반복에만 집중하는 것은 곤란하다.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반복이란 언어로 등록될 수 없는 생생한 체험들의 각인작업이며 이 속에서 진정한 창조적 도약이 일어난다고 한다. 도약의 순간들이 우리가 마주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송광익도 무수한 반복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변주의 멜로디를 구상하며 이것은 곧장 작품에 반영되어 자유로운 작품의 변형을 구사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반복은 구체적인 물리적 작용을 통해서아주 깊숙한 우리 내면과 나누는 대화이며, 의식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생생한 경험들이 모여 있는 창조의 보고로 나있는 길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광익의 작품은 인간적인 해석을 넘어서서 사물, ‘그것의 경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이차원과 삼차원의 교차로에서 먹과 같은 현묘한 색으로 우리를 응대한다. 그러니 송작가의 작품은 <타자>의 진정한 환대로 있게 되는 것이다.

신문지로 한 작업은 광고가 실린 면만을 이용하여 거기에 선염하듯 먹물을 입힌 후, 그 끝을 핑킹가위로 거칠게 손질한다. 작품은 대단히 감각적이며 화과자처럼 화려하고 매혹적이다. 또한 연필로 칠한 종이를 활용하거나, 테이프에 붙인 종이면을 세우지 않고 종이를 말아서 작은 원통형을 세워나가면서 찬 듯, 빈 듯한 화면을 만들기도 한다. 송작가 작품의 유연성은 종이라는 재료 때문에 그리고 종이의 찢김이나 구멍남 때문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와 같은 양극단의 운전과 반복 속에서 실리게 되는 사물, 그것의 소리때문인 듯하다. 종이 숲의 소리, 촉각을 일깨우는 존재의 결, 이 모두에 관여하는 작가의 노동과 노동 속에 각인되는 존재감.

 

2. 작가

송광익은 구상작업을 하였다. 그의 구상작업은(실제 작품은 이번에 처음 보았고 그것도 한 점을 보았으며 나머지는 팜플렛을 통해서 보았다.), 화면에 운영되는 조형공간이 대단히 대범하다. 구상작업에서 그는 인간의 실존문제 혹은 존재 조건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가 실존을 다루는 구성방식에서 진지함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의 세련됨은 주제를 다루는 조형공간의 조탁 솜씨와 실질적인 기예(솜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좋은 기회에 그의 구상작업도 한번 모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송광익이 구상작업을 할 시기는 냉전시대로 인간의 자유문제가 긴급했던 만큼 실존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렇다고 송광익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흐름에 동참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개인적 특수로서 어떤 내면의 감지를 작품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므로 작가에게 시대의식 운운은 성급하다. 무엇보다 작가들이란 예민한 안테나로 무의식적인 감지에 능할 뿐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자연스럽게 현대미술의 실험과 도전에 매혹되어 구상작업으로부터 실험적 미술로 전향한다. 그것이 바로 테이프를 다루는 작업하는 작업들이다. 통상 스카치테이프라고 말해지는 공산품 테이프로서, 이 재료를 중심으로 평면 위에서 재료, 물성, 형태실험을 하였으며 이러한 테이프 작업은 신문지에 테이프를 붙이고 이를 다시 물로 씻어내어 테이프에 남아 있는 흔적만을 평면에 옮겨 작업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2000<책쇼>에서는 욕조 안에 테이프를 층층이 설치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개념적 요소와 팝적인 측면을 보인다. 그는 잠시 침잠의 시기를 가지면서 테이프를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작업으로부터 테이프가 종이의 매개역할을 하게 하는 현재 종이작업으로 이동한다. 현재 그의 종이작업은 10여년 지속되었던 작업으로 이는 팝적이며 개념적인 작품에서 등장했던 재료들의 새로운 전용이라 하겠다.

이제 송광익의 애초 실존의 문제와 재료 테이프가 만나, 현재 종이작업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겠다. 송광익은 현재 작업에서 다양한 변화의 기획을 세우고 있다. 이는 종이라는 재료가 지니는 무한한 탄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또한 브리꼴뢰르(bricoleur-주변의 사물로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재주꾼.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의 주저 <야생적 사유>에서 사용한 용어)로서의 작가 재능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의 사물을 놀이로 바꾸고, 놀이로 환경을 통합해가는 재주꾼 브리꼴뢰르는 다음 작업을 위해 이미 여러 개의 방책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러한 실험은 모두 그의 반복 속에서 얻어낸 수확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 작업의 원천은 반복 반복 반복 그 속에 있는 것이며, 이러한 반복의 철학이 체득될 때까지는 우리 모두 상실의 경험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진정한 <환대>일 수 있는 것이다.

남인숙(전시기획 및 평론/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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