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업데이트: 22-10-21 17:49

보도자료

수묵의 세계는 태고 무법(太古無法)이다.
아트코리아 | 조회 616
수묵의 세계는 태고 무법(太古無法)이다.

모든 사물의 근본은 하나이지만 저마다 생긴 모양이 다르다. 화법(畫法)은 어느 한 곳으로 귀일하나 그에 이르는 붓질은 천 갈래 만 갈래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요,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세계, 그것은 곧 화경(畫境)이다. 낮과 밤은 그 자체가 수묵의 세계다. 화가는 붓을 들고 천지에 나와 ‘한 번 그음’으로써, 자신의 법을 만든다. 일찍이 백천은 ‘하늘이 그에게 준 소명을 받들어, 점(點)을 찍고 선(線)을 치다 죽겠다’고 천명했다. 그에게 수묵은 법고(法古)에서 창신(創新)에 이르는 고행의 길이다. 서화가에게 ‘한 번 그음’은 억겁을 통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생기(生氣, 生起)의 비밀이다. 그런 먹짓을 백천은 이렇게 일갈한다. “화마(畵魔)에 잡히거나, 귀신도 반할 귀경(鬼景)을 펼치지 못할 바에, 화가는 아예 붓을 내동댕이쳐라.”
그의 수묵은 파격에 가깝다. 그런 만큼 모던한 데가 있다. 기존 소재와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 이미지를 창조한다. 즉 발묵 대신 대상을 겹쳐 바르는 한지의 적묵법을 취해, 윤곽의 생동성과 디테일을 추구한다. 매 전시회마다 백천이 보여준 오브제에 대한 놀라운 안목과 처리 방식으로서의 압축, 대담한 생략, 스케일 등은 그의 심미안을 약여하게 보여준다. 지난「松·古美殿」은 고금(古今)의 미와 조화가 함께 어우러진 수묵의 향연이었다. 적묵(積墨)과 초묵(焦墨)의 기법을 통한 노송의 품격과 자연의 형이상학이라든가, 묵선과 여백에 따른 미학적 공간 분할과 흐름은 가히 압권이었다. 이러한 묵화의 세계는 아닌게 아니라, 이가염(중국, 1907~1989년)에서 소산 박대성(1945~)으로 이어져 백천에 와서는 남종화 특유의 섬세하고 리드미컬한 돈오돈수의 필법을 연출한다.
 
이번 여섯 번째 전시회인「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에서, 백천은 또 한 번의 파격을 선보인다. 일획(一點) 속에 만점(萬點)을 품고, 그 만 개의 점과 획이 700년 가야사와 문화에 수렴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유년의 체험이 독특한 필선(筆線)을 낳고, 선은 면(面)을 낳고, 면은 체(體)와 용(用)을 버무려 놓고 있다. 하여 자신만의 수묵 속에 융해시키는 그는 기존의 화법을 안일하게 또는 적절하게 유지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젖힌다. 이 예술적 반(反)과 골(骨)의 정신, 그 경지는 백천 묵향의 출발점이자 근간이다. 전시된 작품 중 대작은 역시, 고령가야에서 출토된 지산동 32호분「금동관」(200×230cm)이다. 작품에 들인 공력과 탄탄한 구성의 짜임은 실로 장엄하다.「금동관」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 한지 위에 중첩하여 수백 번 붓질한 금빛은, 찬탄을 금치 못한다. 한지 작업에서만 볼 수 있는 터치의 섬세함, 결과 결 사이 금속 파임의 음영은 고졸하기까지 하다. 서구 그리스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고대 가야인은 왕관과 의복에 금빛을 휘감고 있다. 손바닥 크기만 한 입식판을 세운 형태와 입식의 좌우 대칭은, 선과 면의 미학적 질서를 부여 한다. 그림엔 생략되었지만, 입식판 표면에 그려진 ‘×’자 무늬의 아름다운 비밀은 황금분할(黃金分割)에 기인해 있다. 무엇보다 입식판의 앞면의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서 만든 목걸이)은, 서른 개를 일정한 수법과 방식으로 매달아 장식하였다. 원래는 있었을 곡옥(曲玉, 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꿰어서 장식으로 쓰던 구슬)과 함께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우아하다. 이와 같은 외형적 특징은, 신라 금관의 세움 장식이 계림의 신성한 숲을 상징한 반면, 가야의 금동관은 초화형(草花形)을 띠었으며, 신라의 그것에 비해 형태나 장식면에서 단순한 것이 매력적이다.
 
합천 지역(대가야)에서 출토된「말안장가리개」(140×70)와「금동장식투구」(140×70) 작품은, 가야가 철의 나라임을 다시금 목도케 한다. 전자의 말안장작품이 철의 강국임을 시사한다면, 후자는 함안(아라가야)에서 출토된「오리모양토기」와 함께 ‘중국 나시족 동파추상문자’를 함께 그려넣음으로써, 가야와 주변국들과의 국제무역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백천의 창작품인「아사달문양토기」작업은 많은 정보를 화폭 속에 담고 있다. 중국 산둥성 황하 유역 선사유적지 능양하에서 처음 발견되어, 훗날 고조선의 팽이형 토기양식으로 추정된(신용하, 전 서울대교수) 이 토기는, 태양을 상징하는 원과 달(양지바른 산)을 고조선 아사달의 신화를 기반으로 형상화하였다. 즉「아사달 문양토기」는 철기 시대를 꽃 피운 가야 토기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진 작품으로 승화된다. 한편,「소나무무늬토기」(130×165),「가지무늬토기」(사천 출토, 100×130)는 지금까지 백천이 작업해온 고예술(古藝術)에 대한 재발견이다. 특히「굽다리접시와 소나무」(김해 출토, 140×70) 작품은 굽다리접시에 소나무를 병치시킴으로써, 고대인들의 생활과 자연의 정신적 차원이 돌올하다.
이번「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展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획은, 한국 최고의 진사 사기장 운당 김용득과 공동 작업한「소나무분청도예」의 출품이다. 그 작업은 폭염 속에서 이뤄졌다. 나는 도예와 수묵의 놀라운 작업의 전 과정을, 수운 김정숙 서예가와 함께 현장에서 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도자의 곡선미학은 백천의 붓을 만나, 쌍학이 춤을 추었다. 여인의 허리 곡선을 연상시킨 초벌한 달항아리 위에, 노송의 휘어진 가지는 그야말로 풍류 그대로다. 세련된 도자의 목선 아래 피어나는 매화 꽃잎의 태점은, 설한풍에서도 생기를 얻었다. 오전 10시에 붓을 들어 캄캄한 한밤중이 되어서야 붓을 놓는 고된 작업에서, 나는 도자 위에 접신된 백천의 기운생동을 보았다. 그 시공(時空)의 노닒은 허정(虛靜)의 세계 그 자체이다.
 
이번 백천의「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시리즈는 크게 두 가지로 특징된다. 첫째는 가야 문화의 고귀한 재발견에 있다. 고대 역사 속에 파묻힌 가야인의 풍속과 정신을 21세기에 다시 불러내어, 현대인들의 정신문화를 새롭게 환기하는 것이다. 둘째는 고대 6가야인들 이야말로, 한반도의 원형 정서이자 겨레 문화의 출발점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하여, 백천은 나에게 언젠가 이렇게 반문한 적이 있다. “왜, 여태껏 가야를 몰랐을까. 그 웅숭깊고 높은 유년 시절의 예술의 보물을 왜, 나만 몰라보았을까” 이런 질문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자신의 수묵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향 가야에 대한 재발견이다. 환태평양 시대에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거점으로 한반도 6가야 문화의 중요성이 새롭게 주목받는 이 시기에, 백천의「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展은, 그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여, 백천은 가야의 다양한 생활의 기물(器物)을 화폭 위에, 자신만의 독창적 먹짓으로 그 신화를 풀어내고 있다. 가야인이 추구한 고대 한반도의 조화와 소통의 정신이 백천을 통해 마침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늘날 남북의 분단 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분열된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데,「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展은, 그 물음과 해답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 가야의 예술과 문화야말로, 신라인들에게 천년 통일의 꿈을 키워준 밑바탕이 아니던가! 백천은 가야의 화신이다. 검은 빛이다. 

식판의 앞면에는 지름 1㎝ 정도의 원형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서 만든 목걸이) 서른 개를 일정한 수법과 방식으로 매달아 장식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단순한 듯하면서도 세련되었고, 점열문으로 구획된 문양과 더불어 더욱 화려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은 외형적 특징은 신라의 금관과 분명히 다른 차별성을 보여주며,  가야문화의 독자성을 상징합니다. 

 나는「금동관」을 형상화하기 위해 전통 한지위에 수십 수백 번 붓질했습니다. 금동관의 표현미는 금빛의 발색과 그 속에 담긴 고대 정신의 광맥을 캐는 일입니다. 하여 나는,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오방색을, 번갈아 먹과 아크릴에 섞어 사용했습니다. 황(黃)은 우주의 중심 색이자 고귀한 색으로, 고대에는 임금의 옷과 왕관을 만들 때 쓰였습니다. 먹과 여타의 배색은 고대인들이 추구한 정신세계를 돌올하게 했습니다. 밤낮없이「금동관」에 매달린 작업은, 나에게 예술의 카타르시스를 한껏 맛보게 했습니다. 작업 때마다 느낀 일이지만, 한지야말로 수묵의 섬세한 붓의 숨결을 가장 완벽히 받아주었으며, 태점을 찍고 덧칠을 거듭하는 사이, 나는 마치 가야의 왕이라도 된 듯한 착각 속에 몰입했습니다. 이 영감(靈感)의 과정은, 천지기운을 다 쏟아 부어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동양 예술의 극치인 허정(虛靜)의 세계를 내게 안겨 주었습니다.

 이번「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展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획은, 한국 최고의 진사 사기장 운당 김용득과 공동 작업한,「소나무분청도예」작품입니다. 8점정도 출품될 예정이며, 그 작업은 7월 중복 날 이뤄졌습니다. 아침 10부터 붓을 들어 캄캄한 한밤중에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내내 나는, 초벌 도자기 위에 신들린 듯 노송(老松)과 학과 현대 수묵화를 번갈아 그려나갔습니다. 인접 예술과 함께 논 그 시간이야 말로, 화가에겐 심미안의 경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도였으며, 고귀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松·古美殿」과 이번 여섯 번째 전시회인「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와는 확연히 구분됩니다.「松·古美殿」시리즈는 적묵(積墨)과 때론 초묵(焦墨)의 기법을 통해 노송의 품격과 정신을 고스란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佛頭」작업을 통해, 불교의 진경에 한 발 내디뎠다고나 할까요. 물론 화폭 속에 백자철화포도문호, 백자진사매국문병 등의 국보급 도자(陶瓷)와 매화 그림과의 앙상블은, 평자들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반면, 이번「700년 가야 魂, 먹과 놀다」시리즈는, 가야 문화의 재발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고대 역사 속에 파묻힌 가야인의 아날로그적인 풍속과 정신을 21세기에 불러냄으로써, 디지털에 함몰된 현대인들의 정신문화를 새롭게 환기하는 것이, 그 궁극의 목적입니다.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고대 6가야인들 이야말로, 한반도의 원형정서이자 겨레 문화의 출발점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다양한 생활의 기물(器物)을 화폭 위에 먹짓 하면 할수록 그들이 추구한 조화와 소통의 정신이, 얼마나 질박한지도 알았습니다. 하여 나는, 오늘 날 남북의 분단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분열된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데, 700년 가야의 魂을 이 시대에 불러내고자 합니다. 결국 가야의 예술미는 신라인들에게 천년 통일의 꿈을 키워낸 밑바탕이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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