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업데이트: 19-08-23 09:16

평론

노태웅의 작품전에 부쳐_ 김윤수(미술평론가)
관리자 | 조회 1,086
노태웅의 작품전에 부쳐

 
한 화가가 20대의 나이에 자기의 양식을 확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긴 회화의 역사에서, 특히 자연주의적 회화를 그리는 화가의 경우 앞선 대가들의 수법이나 양식의 어딘가를 닮기 일수이고, 이를 애써 피한다해도 자칫하면 인습적인 사실주의 아니면 진부한 정서주의에 떨어지는 화가가 허다함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사물을 보는 눈이 범상치 않아야하고 그 범상치 않는 눈을 실현하는 솜씨나 기법도 그래야함은 물론 남들과는 다 른 그림을 그리려는 집요한 노력이 뒤따라야만 한다. 독창성은 어느 의미에서 남과 다른 차별성의 양과 질의 문제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노태웅은 우선 이런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일찌기 자기의 양식을 만들어간, 흔치 않는 화가의 한사람이다. 맥향화랑 초대의 첫 작품전은 매우 인상깊은 전시회였다. 역풍경과 도시변두리 주거밀집지구를 그린 그림이 다수였던걸로 기억한다. 역 구내에 정차해 있는 열차들과 가지런히 뻗은 레일들 혹은 어지럽게 걸린 전선밑으로 대낮의 인적없는 역 풍경을 롱 쇼트의 시각 으로 그린 그 그림들은 화가의 냉정한 시선과 독특한 화면 질감으로 인해 인간소외의 차가움 보다는 오히려 여행자의 정서-설레임과 기대와 상실의 저 아른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한편 슬레이트와 판자와 시멘트로 지은 건물들이 빼곡히 무질서 하게 들어찬 주거지와 골목, 그 틈새로 보이는 좁은 안마당, 혹은 골목 한편에 세워져 있는 리어카들과 같이 '그림이 될것같지 않은' 너무도 하찮고 일상적인 장면들을 꼼꼼하고 끈기있게 그려놓기도 했었다. 이 그림들은 얼핏 보기에는 하찮은 대상들을 시각적으로 그린, 무미건조한 그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력을 기울여 들여다 보노라면 이상한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옴을 알 수 있다. 내가 이 그림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림이 될것 같지 않는' 하찮은 세계를 그렸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 하찮은 세계를 가차없는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그려놓고 있다는데에 있다. 노태웅은 도시변두리 주민들의 삶의 현장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 세계를 어떤 감정의 개입이나 판단을 유보한채 잔인하리만큼 객관적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시선은 그의 독특한 화면처리나 기법의 뒷받침없이는 불충분했을 것이다. 모래를 발라 칠한 까슬까슬 한 마티에르, 슬레이트와 시멘트의 저 비정하고 둔착한 물질감, 지붕과 건물들의 직선과 모난 형태들, 인적없는 좁은 골목, 그 위에 떨어지는 강한 햇살과 짙은 그림자의 대비, 이런것들이 만들어내는 살풍경이 보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의 그림은 바로 이 살풍 경이- 하찮은 것들의 즉물적 묘사에 대한 거부감이- 주는 역설적 호소력에 있다. 인적없는 골목, 대낮의 적요한 동네는 텅빈 공간 혹은 침묵의 공간이 아니라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담벼락 들이 말을 하는 공간이고 그것을 통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의 처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것은 풍경이 아니라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현재적 국면이며 7.80년대 경제개발 정책이 가져다 준 서민 경제의 수준과 한계를 보여주는 사회적 메세지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어떤 선동적 구호나 어슬픈 조사보고서 보다도 강한 호소력을 가지며, 그점에서 자신이 동의하건 않건 간에 그는 우리 시대의 드문 리얼리스트의 한사람이다.

노태웅은 도시 변두리 주거지역 말고도 농촌이나 어촌, 혹은 산하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어촌풍경의 경우 시원스레 펼쳐있는 바다와 바다를 끼고 돌아간 육지와 산, 앞쪽 어촌의 울긋 불긋한 지붕들로 하여 바다내음과 맑은 공기마저 느끼게 한다. 마치 소박주의 회화 처럼 그려진듯한 이 풍경들 역시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어촌의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건물들이 자연경관과 기묘한 불일치를 이루어 어딘가 낯설은 느낌을 준다. 그 낯설은 느낌은 근대화된 어촌의 막막한 현실과 메마른 삶의 어느 국면을 함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리는 풍경화가 모두 그런 함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관된 점은 자연풍경을 그릴때도 그의 시선은 늘 냉정하고 정직하다는 것이다.

최근에 그린 작품중 주목을 끄는 것은 폐광이 된 탄광촌 풍경이다. 에너지원이 석유로 대체되면서 석탄생산이 중단되거나 폐광이 속출함에 따라 탄광촌 사람들의 생활도 거들이 났다. 광부들이 떠나버린 탄전지대의 빈 집들위에 대낮의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 장면을 그린 이 그림들은 보는이로 하여금 막막함과 처절함을 더한다. 그런 장면을 그린 대형 캔버스앞에서면 그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이 작품들은 그가 도시 주거 밀집지구를 그릴때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과 꼼꼼한 묘사방식과는 다르게 다소 표현주의적 요소가 엿보이기는 하나, 여기서도 화가 자신은 결코 연민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 또는 어떤 판단을 드러내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현재의 상황을 정직한 시선으로 또 끈기있게 그려냄으로써 보는 이의 정서적 반응이나 판단에 맡기고 있다. 이 그림들도 한갖된 풍경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와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만들어낸 사회적 풍경이며 인적없는 상황은 더 많은 메세지를 전해준다.

노태웅이 도시변두리 지역에 이어 탄광지대를 그린 이유가 무엇이었건간에 그가 그림을 먼곳에서 찾지않고 일상적이고 하찮은 곳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을 그는 정직한 눈으로 보고 성실하게 그려냄으로써 우리시대의 꾸겨진 삶들을 하나하나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진정 리얼리스트이며 그의 그림이 리얼리즘의 원칙에 들어맞는가를 말할 계제는 아니다. 그는 그러한 이론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럼에도 그는 어딘가 사회성이 담긴 그림들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것이 없다면 그의 그림은 그저 평범하고 상투적인 구상화에 그칠것이다. 그러므로 이점은 더많이 주목되고 정당하게 평가 받아야 마땅하리라 본다.

 
- 김 윤 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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