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업데이트: 19-08-23 09:16

평론

노태웅의 회화_김임수(계명대 미대교수)
관리자 | 조회 838

노태웅의 회화

 
노태웅의 회화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차분하고 조용하다 얼어붙은 듯한 화석처럼 굳어버린 듯한 정물에서부터 인물들의 최소한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의 회화는 운동과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침묵과 정적의 세계를 보여준다. 바다는 파도의 물거품 속에 멎어있고 하늘은 구름의 흐름속에 멈추어 있다. 백합과 목련은 때묻 지 않은 순결의 자태로 태고의 신화처럼 영원히 꽃피어 있다. 애기를 등에 업은 어머니는 애초부터 그러했듯이 지금도 눈덮인 골목길을 걷고 있고, 긴 벤취에 등을 기댄 노인네들의 휴식은 해가 져도 여전히 집으로 돌아갈 줄 모른다. 잠시 멈춘 듯한 시간의 틈을 통해 작가는 단지 사라져가는 한 순간 의 스냅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사라지는 것들의 건재함과 변화하는 것들의 불변성이 응축된 한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순간은 찰나인 동시에 영원이며, 시간인 동시에 공간인 것이다.

노태웅의 회화속에 자리잡은 공간은 그래서 시간을 포섭하는 동시에 또한 그것을 초월한다. 계절의 변화나 밤낮의 변화가 없다거나, 새벽의 싱그러움이나 황혼의 어스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도 물론 다른 작가들처럼 꽃피는 봄의 설레임과 뜨거운 한여름의 열정을, 그리고 늦가을의 완숙한 결실 과 특히 눈덮인 겨울의 정취를 즐긴다. 그러나 그의 회화공간 속에서 계절은 결코 흘러가는 시간으로 방치되지 않는다. 그것은 관조적인 자연공간인 동시에 또한 인간 삶의 구체적 실상과 그 정서적 의미 가 함께하는 현실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목련 꽃잎속에 한껏 부풀어 오른 봄기운이나 저 멀리 뭉게구름이 떠도는 짙푸른 하늘과 먼 산을 배경 으로 강이나 바다가 화면가득 하늘과 맞닿아 있는 그 특유의 대담한 구도속에 담겨있는 싱그러운 여름풍경이나 어촌풍경 또는 산과 들녘이 늦가을로 짙게 물든 한적한 시골풍경은 한껏 자연의 시적 (詩的) 정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겨울풍경은 사뭇 차가운 삶의 현실과 연결되어 그 계절의 의미를 묻는다. 80년대 후반 에서 90년대 전반에 걸쳐 그가 즐겨 다룬 소재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도시 빈민들의 삶에 애환이 숨막힐 듯 답답하게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판자집 슬레이트 지붕 가득히 눈은 [마을]과 [골목]을 뒤덮고 있는가 하면, 이미 광부들의 삶의 터전이 상실된 [탄광]에서도 눈은 그들의 검은 삶을 뒤덥고 있다. 저 먼 소실점을 향해서 가지런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레일들 위에 꼼짝없이 멈춰 서 있는 검은 열차들이 하얗게 눈을 맞고 있는 [역]의 풍경은 차라리 쇳덩어리처럼 차가워진 인간 정서의 회복을 촉구하는 듯 하다. 현실에 대한 작가적 관심의 반영에 있어서 그는 이미 관조적 자연주의자의 시야를 넘어 보다 적극 적인 사실주의자의 시야를 겸비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추구하는 풍경은 자연의 풍경인 동시에 현실의 풍경인 것이다.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는 노태웅의 시각은 냉정하고 엄격하다. 나즈막한 지붕들이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마을]의 짜임새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각도 그렇고, [골목] 입구에서 배를 뒤집고 하늘을 향한채 멈 춰 서 있는 리어카들의 행렬이나 어촌 풍경에서 흔히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이나 새마을 페인트 지붕마저도 그는 그것들을 굳이 미화하려 하지 않는다. 레일 위에 멈춰 선 열차들이 흰눈에 덮여있는 [역]의 풍경이나 잔설(殘雪)이 녹아내리는 검은 [탄광]의 풍경은 흑백의 대조를 통해 한층 현실적 박진감을 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풍경은 또한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의 마을 풍경은 비록 가난하지만 다정스러운 이웃들의 대화를 담고 있고, 골목 풍경은 그들의 분주했던 나날의 삶과 잠시의 휴식을 보여준다. 길게 꼬리 를 물고 하얗게 눈을 맞은채 멈춰 서 있는 열차들의 모습이나 잔설이 녹아내리는 폐탄광의 풍경은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삶의 현실과 그 애환을 보여준다.

삶의 실상과 그 의미를 캐묻는 노태웅의 회화는 보다 차갑게 현실에 접근하여 보다 따뜻하게 현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 정서적 공감대의 확산은 작가의 표현적 주관에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보다 진 지하고 성실한 객관적 설득력에서 나온다. 모래나 대리석 가루를 발라 까칠까칠하게 균질화된 캔바스 위에 구사되는 그 특유의 표면질감은 들뜨기 쉬운 작가의 표현적 주관을 적절하게 억제하는 동시에,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시야를 보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화면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객관적 설득력을 강화하는 강력한 흡입력을 갖고 있다. 그 흡입력을 통해 생활주변에서 흔히 보아왔던 일상적 대상들이 새삼스레 낯설 어 보이고 그 낯설은 느낌을 통해 소외된 삶과 현실은 거듭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그의 근작들은 자연과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여준다. 형태와 색조는 보다 간결하고 중후하게 완숙을 더하고 있고 표면질감은 보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다. 특히 지난 겨울 이래 경제위기의 한파 에 휩싸인 황량한 공단의 풍경이 새로운 소재로 등장하는가 하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의 소외된 삶이 거듭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굴뚝의 연기가 멈춘 생산현장의 현실이나 할 일을 잃어버린 노인 들의 삶은 굳이 비유적 이미지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모두가 꿈과 활력을 잃어버린 어둡고 우울한 현실의 그림 자를 보여준다. 그는 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중성색 토온을 통해 그 그림자를 밟는다. 그 어둠의 현실을 투시 하는 작가의 시각은 여전히 냉정하고 엄격하다. 그 폐허의 이미지에 접근하는 진지하고 성실한 작가적 안목을 통해 우리는 또한 결코 이대로는 방치될 수 없는 황폐한 현실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회복되어야 할 삶의 현실 인 동시에 되찾아야 할 삶의 활력임을 작가는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 그 희망과 구원의 의미가 함께하는 그의 회화는 그래서 여전히 포근하고 따뜻하다. 노태웅의 회화는 자연의 현실에 대한 관조와 명상을 통해 자연의 시적(詩的) 정취와 삶의 현실적 정서를 포괄함 으로써 차가운 리얼리즘의 회화를 따뜻한 휴머니즘의 회화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임수(계명대 미대교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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