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2    업데이트: 23-07-24 11:57

언론&평론

[특집] 스님이자 작가인 정선을 만나다 - 경북신문
관리자 | 조회 136

작업 중인 정선 스님.


경북신문이 영남 중견 작가들을 만나 작가의 성향과 그림의 대상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살펴보고 있다. 

스님이자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정선 스님은 포교 활동은 물론 작품 활동에도 정진하고 있다. 즉, 작품 활동으로 포교 활동을, 포교 활동으로 작품을 게을리하지 않고 매사에 매진하고 있다.



경북신문은 스님이자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정선 스님의 어린 시절과 출가, 작품 활동을 하게 된 동기 등을 살펴본다.




정선의 소나무.

◆작가의 어린시절과 출가는 언제, 왜?

경상남도 밀양에서 아버지 박문기(朴文基), 어머니 손옥숙(孫玉淑)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육자였기에 집안은 시골의 다른 어떤 집보다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가 5학년 때 어머니의 죽음으로 속세의 인연을 끊게 됐다. 어머니와 이 세상에서 인연을 맺은 시간이 짧았기에 출가에 영향을 받았다.

1978년 고등학교 2학년이던 해 여름방학에 친구가 공부하러 해인사에 들어가자고 해 들어갔다가 뜻하지 않게 행자방(行者房)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됐다.


정선의 능소화.

낯설고 어려웠던 행자방 생활을 마치고 해인사를 내려왔다. 그가 살던 동네가 반갑고 사람들 목소리가 정겨웠다. 당장은 죄수복을 벗고 군복을 벗은 것 같은 해방감과 자유로움에 하늘로 날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시간이 지나면서 해인사의 행자 생활이 어제인 듯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부처님이 출가하신 2월 8일을 출가 날로 잡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전국에 있는 사찰과 큰스님을 참배하기 시작했다. 처절한 고행과 역경 속에서 여러 스님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도 범어사의 고암(古巖) 큰스님을 찾아뵙고 상좌로 인가받았다.


정선의 작품.

◆ 예술을 접하게 된 동기는?

학창시절 그림 그리며 붓 들기를 좋아했고 그 마음을 늘 가슴속에 간직하다 보니 출가해 범어사 강원에서 경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그에게 사형격인 강주 스님은 글을 아주 잘 쓰시는 근대의 명필이었고 경에도 밝을 뿐 아니라 염불 또한 심금을 울리는 재주가 있어 마음으로 늘 흠모했다.

경전 강의를 마치면 항상 강주 스님의 방에서 지필묵으로 글을 쓰시고 후학이나 신심 있는 보살님께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데 언제나 그는 강주 스님을 시봉하고 묵을 갈아 드리는 게 일이었다.

오전에는 경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강원에서 글을 늘 쓰곤 했는데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정선 스님은 어디를 가나 붓을 매고 다니게나. 붓만 놓지 않으면 앞날은 걱정이 없고 대가가 될 것이네”한 말이 인연이 돼 평생을 붓을 놓아 본 일이 없다.


정선의 매화.

◆ 정선 스님의 작품성향과 예술이란?

서예는 고절(高節)을 지키는 문인고사(文人高士) 화가의 전신전력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모든 예술의 근본이 된다고 본다. 한 자루의 붓에 자기의 온 힘을 다해 글씨를 쓰거나 사군자를 칠 때 미(美)란 어떤 것인가? 서법과 화법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생각과 마음과 손에 따라 자연스럽게 쓰고 그린다.

무기교(無技巧)의 기교(技巧), 천진무구(天眞無垢), 우직(愚直)과 성실(誠實). 이것이 사념망상(邪念妄想)을 잊고 무아무심(無我無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지난해 밀양 출향작가 초대전과 대구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에서 선묵일여 일필휘지(禪墨一如 一筆揮之)의 묘용(妙用)이란 제목으로 초대전을 가졌다.

이 전시회에서 그는 “이번 초대전은 무념, 무상, 무아의 마음에서 깊은 마음, 짧은 순간을 화폭에 담아 여백의 운치를 살려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다”며 “전시된 작품 한 점 한 점은 일필휘지로 내 마음을 표현한 내 마음의 농담(濃淡)이며 내 마음을 전하는 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78년에 출가한 정선 스님이 붓을 잡은 지 37년 정도 됐고 취미로 시작한 그림은 자연스럽게 수행과 포교 방편으로 확장됐다. 대학이나 문화센터와 절에서 포교하는데 요긴하게 쓰고 있다.


정선의 대나무.

◆ 작가의 이력과 활동은?

1997년 성취선원과 해인사 도솔암을 창건하고 용탑선원 주지를 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고 취미로 하던 중 부산에 계신 심천 선생님을 다시 재회하고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도전했으며 미술대전 우수상 받을 무렵 그토록 존경하던 야정 서근섭 교수님을 만나 지도를 받으면서 서화가 더욱 거듭나며 빛을 보기 시작했다.

대구미술대전 입선 9번, 특선 1번으로 18년만에 졸업(초대작가)한 뒤 여러 대회에서 50여 차례의 상과 임원, 심사 등 위촉장 50여 차례, 서울 중앙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입·특·우수상으로 초대작가가 됐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현재는 한국미협 총괄수석부이사장님의 추천으로 25대 한국미협 문인화 진흥위원장으로 위촉되는 등 달서구청 청소년 수련원을 시작으로 수성구청 소속 기관, 한국마사회 대구지사, 영남 이공대학 평생교육원, 대구교육대학 평생교육원에 출강하게 됐다.

또 대구미술인상, 대구미술초대작가상, 대한민국 미술협회 이사장상 등 큰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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