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2    업데이트: 23-07-24 11:57

언론&평론

정선 박용국 교수, 고향 후학지도에 나서 밀양에 문인화의 ‘신선한’ 바람이 분다
관리자 | 조회 305

밀양 청구아파트에 특별한 개인 갤러리가 생겨났고, 현재 이곳에서 20여 명의 예술인들이 모여 문인화 수업에 열정적이다.

이 갤러리의 주인공은 대구 길상사의 주지 정선 스님이다.

아파트 내의 갤러리란 점이 특이하고 밀양에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문인화란 장르에 매료되어 그곳을 찾아 그 주인공을 만나보기로 했다.

밀양 청구아파트 203동 310호를 찾아가니 현관문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 만큼의 넓이로 열려있었다.

노크를 하고 들어서니 편안한 차림의 스님이 환한 표정으로 합장을 전해온다. 실내의 곳곳마다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작업대가 설치되어 있어 아파트의 실내와 묘한 조화로움으로 다가온다.

베란다에 마련된 자리에 마주앉아 찻잔을 나누는 스님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대화체는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정선 스님

출가와 동시에 세속의 연을 끊어내고 불도인(佛道人)의 생을 걸어가는 것이 스님의 길이니 차마 출가이전의 이야기를 소상히 나누기엔 조심스러웠다.

정선 스님은 상동면 안인리 신안마을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하여 안인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교사로 재직 중이던 부친의 부임지인 무안으로 옮겨 무안초등학교, 무안중학교를 거쳐 밀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어머니가 병고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후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이 엄습했고 마음속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사춘기시절 새어머니와의 이유 없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불교계와 연관이 많은 가정에서 자란 친구가 해인사로 공부하러 같이 가자고 권유해 왔다. 번민이 많았던 시절이라 쾌히 승낙하고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에 도착하고 그곳의 스님이 두 학생을 행자들이 수행하는 행자실로 안내하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부처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방학이 끝날 무렵 친구와 상의하여 그곳의 행자생활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하고 스님에게 고했다.

“출가는 장난삼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 신중하게 생각하여 깨달음을 얻을 생각이 있으면 공부를 마치고 다시 출가하라”는 스님의 권고를 받고 돌아왔다.

하산 후 학교공부를 마치고 수많은 불교서적을 읽으면서 깨달음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어느 날 표충사를 찾아가 한 스님으로부터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면서 입산을 준비하게 된다.

부처님이 출가했던 2월 8일을 출가일로 잡고 배낭을 걸머지고 전국에 있는 사찰과 큰스님을 참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종정을 지냈으며 시대의 선승(禪僧)으로 알려진 고암 스님을 찾아 범어사로 향했고 그곳에서 스님의 막내제자로 불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행의 길

1988년 비구계(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지하면서 정식 승려의 반열에 올랐다.

효원(도형) 큰스님으로부터 치문, 사교, 화엄, 법화경, 일대시교를 사사 받았으며 범어 승가대학,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였다.

1997년 고암대종사의 유지를 받들어 대구에 성취선원(成就禪院)을 창건하여 불교대학, 성취자비회, 성취장학회 등을 운영하며 기도와 법문을 통한 포교활동의 인고를 거쳤고 3년 후 해인사 도솔암을 창건했다.

2001년 해인사 용탑선원 주지를 거쳐 2002년 대구 용계동 도솔암 포교원을 개창한 후 불교대학, 다도교실, 서예교실 등을 운영하며 후학지도에 전념하다 2011년 대구 길상사로 안착했다.

스님은 고암 대종사, 백운 큰스님, 효원 큰스님으로부터 한문 및 경전을 사사 받았고, 심천 양시우 교수, 학정 정성근 교수, 야정 서근섭 교수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사사 받았다.

고행 중에서도 초심으로 가는 여행, 즐거운 신행 생활, 지장보살 찬탄경, 묵향의 묘용과 차 한 잔의 여유, 정선스님 법문 한자락, 선묵일여 일필휘지의 묘용 등 다양한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작품의 세계

“정선스님은 어디를 가나 붓을 매고 다니게나”라던 효원(도형) 큰스님의 말이 인연이 되어 붓을 잡은 지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 양시우 교수를 만나 배움을 가진 후 주왕산 대전사에서 기도할 당시 그곳의 주지인 혜승 스님이 필묵을 들어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재주가 아까우니 대구 도반 스님을 소개해 줄 테니 가서 대가를 만나 좀더 탁마하게”라는 권유를 받고 영남서화원을 찾아 난정 선생과 학정 선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부산의 심천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미술대전에 도전하였고 미술대전 우수상을 받을 무렵 야정 서근섭 교수를 만나 지도를 받으면서 작품세계의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었다.

그동안 대구 인터불고 호텔 스페인 갤러리, 밀양도서관 갤러리, 경주 에밀레 선면화 불교방송 초대전, 대구문화회관전을 비롯해 많은 개인전과 초대전을 가졌다.

또 프랑스 파리 몽플레르 초대전, 한국문인화협회전, 한·중 무석 교류전 등 단체, 협회, 해외전에도 200회가 넘게 출품을 했다.

그러는 동안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국제미술제 최우수 작가상, 대구미술인상, 대구미술초대작가상을 비롯한 수많은 수상경력을 갖게 된다.

다양한 분야의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제24대 한국미협 미술대전 선묵화 분과위원장 등의 활동은 물론 대구교육대학교 서예문인화 전담교수를 역임하였고 대학 및 여러 기관에 출강하며 후학지도에도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 제25대 한국미협 미술대전 문인화 교육진흥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12일까지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에서 ‘선묵일여 일필휘지의 묘용’을 주제로 제8회 정선 박용국 초대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 초대전과 더불어 육십년 세월의 인연을 뒤돌아보며 정리한 법문자료를 350여 페이지에 담아 전시·법문집을 출판하고 기념식을 가져 더욱 의미를 더 했다.

 

⊙고향을 향하여

스님의 명함엔 <서예, 문인화, 한국화 연구실 ‘靑邱(청구) Gallery’ 원장 정선 박용국 교수>로 되어 있고 청구아파트 203동 310호가 주소로 표기되어 있다.

즉 밀양청구아파트 203동 310호가 작품연구실이자 갤러리라는 것이며, 이곳에서 후학지도에 열정을 다 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스님은 예술의 거리인 서울 인사동에 진출하여 기라성 같은 예술인과 자웅을 겨루며 그곳에서 배우고 익히며 작품세계의 길로 향하기로 결정하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코로나19의 집중 공격으로 출강하던 곳이 휴강하게 되면서 생겨난 여유시간에 고향 밀양을 찾았고 지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아름다운 밀양을 품기 시작했다.

문인화의 장르가 그렇게 확장되어 있지 않은 밀양으로 생각을 전환하게 된 것은 부처님의 뜻이자 가피일 것이란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난해 12월 25일 밀양청구아파트에 갤러리를 오픈하고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20여 명의 문하생들이 매주 주말인 금·토요일에 강의를 받고 있지만 문인화의 매력이 알려지면 더 많은 문하생이 찾아와 함께하게 될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한다.

정선 스님은 “고향에서 후학을 지도한다는 것은 인연, 학연, 지연이 있다 보니 변수가 많겠지만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묵묵히 그리고 최선을 다 할 것이다”며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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