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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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7    업데이트: 23-05-04 15:19

자유게시판

[매일춘추] 벌초 - 2014-09-02 - 매일신문
아트코리아 | 조회 1,222

“벌초 같이 갑시다.” 말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남편이 며칠 전부터 졸라댄다. “이젠 여자들 빼고 형제 오붓이 다녀올 때도 되지 않았나요." 어색한 애교로 들이대 보지만 영 막무가내다. 시댁 선산은 산세가 워낙 험준해서 생각만 해도 산에 오를 길이 막막해온다. 가시덤불과 잡풀로 덮여 있어 갈 때마다 어디로 어떻게 올라야 할지, 묵은 나뭇잎에 쭈르르 미끄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 년에 고작 두어 번 찾는 이방인의 발길이 미운 것인지 수풀이 떼를 지어 막아서는 데는 별도리가 없다. 처서 지난 후라서 그런지 풀벌레 울음소리만 여기저기서 안부를 묻는다.

 

이른 아침의 산속은 방금 세수 끝내고 물기 촉촉이 남아 있는 민낯의 신선함 그 자체다.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걸 눈치 챘는지 나의 발길 앞에

 

 노란 들국화가 등이 되어 환하게 밝혀준다. 꽃 한 송이 뚝 따서 아랫동서 머리에 꽂아준다. “아이 형님도 참”하며 돌발적인 나의 행동에 쑥스러워하지만 내심 싫지만은 않은가보다. 메밀꽃 같은 하얀 미소를 함박 짓는 걸 보면, 뒤에서 보니 형님, 동생, 동서 나란히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고 산을 오르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형제가 아니었다면 이 외로운 산길을 혼자 오르며 얼마나 더 힘이 빠졌을 것인가.

 

 

어릴 적부터 유달리 겁이 많은 나는 여태까지도, 밤톨 한 알 툭 떨어져도 엄마야! 라고 소리 지르고, 나뭇잎 약간의 몸 비비는 소리에도 뱀인가

 

하고 화들짝 놀란다. 시동생은 예초기로 봉분을 참하게 가다듬어가고 남편은 낫으로 소싯적 소 꼴 베던 실력을 발휘한다. 칡뿌리와 아카시 뿌리가 파고들어갈 수 있을 만큼 깊이 들어간 걸 보면, 사람이나 식물이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라든가 그 근성만큼은 잘 뽑히지 않는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제물을 정성껏 차려놓고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있을 때에 굽이굽이 고갯길을 밝게 넘어온 햇살이 잔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나란히 기대앉아 “사는 게 무에 그리 바빠 얼굴 보기가 이리 힘이 드나." 오랜만에 담소를 나누며 구슬 같은 땀을 닦는 형제가 안쓰러웠던지, 노송 한 그루가 그늘을 자꾸만 넓혀준다.

 

 

벌초의 의미는, 홍수의 사태나 산짐승들의 피해에 대한 보살핌도 물론 있지만 바쁜 삶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뿌리에 대해 공부도 하며 혈육의 정을 느끼고 우애를 더 돈독히 다질 수 있는 소중한 만남의 장이라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요즈음 어느 기업에서는 직원들의 인사고과를 관리할 때에 선산의 조상 벌초를 잘하는 직원의 고과점수를 후하게 준다고 한다. 가족사의 전통을 잘 지킨 자녀야말로 품성이 좋고 일의 능률 또한 뛰어나다고 한다. 조상과 부모를 잘 섬기는 사람은 직장에서의 원만한 관계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성숙한 인격의 깊이로 존경받음이 틀림없다.

 

 

박숙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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