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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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46    업데이트: 21-11-04 13:00

<오늘의 자작추천시> 박숙이, 바다여인숙에서
아트코리아 | 조회 581
바다여인숙에서
                          박 숙 이


나를 바다여인숙까지 끌고 간 것은 그래, 그건 순전히 몰락이었다 내가 몰락을 순순히 수락한 것도 바로 그 바다여인숙의 첫 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몰락과 한 몸이 된 셈이다 수락하고 보니 이렇게 편할 수 있는 걸, 내 자신을 왜? 짐승처럼 피해 다니기만 했을까 허름한 불빛이 허름한 生을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은, 천 날 만 날 물안개에 싸여 나처럼 글썽이는 바다여인숙, 썰물에 쓸려쓸려 눈치 하나는 빨랐다 무엇보다 나는 늙수레한 숙박계의 뱃고동 같은 퉁명한 친절이 덥석,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 된다 귀가 늙은 숙박계는 귀신 같이 갈매기들의 몸부림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다는 대충 몇 시부터 잠에 곯아떨어지는가에 대하여, 몇 시쯤이면 동해가 해를 머리에 이고 일어서는가를, 그리고 나는 열쇠 없이도 드나들 수 있는 창이 있는 바다 한 칸을 부탁하기도 했다 내가 바다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동안은 몰락은 잠시 나를 피해 어디론가 꼭꼭 숨어버렸다 새벽까지도 내 가슴에, 등대처럼 환히 불이 켜져 있었던 걸 보면, 밤새도록 파도소리가 나의 살갗을 파먹도록 다만 나는 몰락하는 달빛만 아름답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랬으면 하고, 바다여인숙처럼 홀랑 벗은 채.

* 작가노트


   
▲ 박숙이 시인

그 해에 몰락을 데리고 바다 앞에 섰었다. 바다라는 큰 여인숙 방에 나의 절망을 던져 버리기로 한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그 캄캄한 바다 속에는 등대의 불빛이 살아있었고 아름답게 몰락했다가 아름답게 승화하는 달빛이 찡하게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그날 밤 바다는 모든 주권을 나한테 맡기고는 저 여자가 어떻게 하나 행동반경을 주시하고 있었지 않았나 라는 착각을 제대로 한 번 해보면서, 그 여인숙은 열쇠 없이도 드나들 수 있다는 게 큰 매력 포인트라서 언제든지 마음먹으면 광활한 바다로 달려가 파도소리에게 살갗이 파 먹혀도 참 좋았었다.

 

* 박숙이 시인은 매일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었고, <시안>으로 등단하였다. 한국문협, 한국시협 및 시산맥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활짝』을 펴냈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에서 활동하는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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