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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희망으로 유영하는 숱한 픽셀, 심연에서의 250가지 그리드 콤포지션 / 월간인터뷰 2021 MARCH
아트코리아 | 조회 405
희망으로 유영하는 숱한 픽셀, 심연에서의 250가지 그리드 콤포지션

“책의 화석을 복원하는 종이만지기로 구현한 희망차고 푸른 ‘점’의 연속성”

출처 : 월간 인터뷰(INTERVIEW)(http://www.interviewm.com)


박종태 작가

파괴로부터의 창조, ‘심연(深淵)에서 유(遊)’ 테마의 박종태 작가는 오는 3월 9일부터 21일까지 개인 초대전을 연다. 쿤스트 취리히 아트페어의 동양작가 중 유일하게 3회 초청 경력이 있는 그는 이번 초대전에서도 대구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에서 2주 전시 일정을 승인받은 첫 아티스트가 되었다. 100호 대작도 17개 이상 수용할 수 있는 100여평 공간에서 설치작품을 보여주기로 결정되면서, ‘깊은 연못을 헤엄치는’ 그의 테마는 텍스트의 해체에서 시작된 미시적인 추상이자 유기세포의 구성을 넘어 창의적인 증식을 시작한다. 그의 블루는 색의 의미도 있지만 더 이상 심연 속에서 우울하지도, 창백하지도 않게 빛나는 푸른 점(픽셀)의 상징이기도 한다. 그가 활자 파편에서 찾아 키워 낸 점들은 문명의 상징이 파쇄 후 응집되며 ‘책의 화석’을 이루는 관성적 행위로부터 탄생한 숱한 메시지들의 위대한 연속성을 상징한다.

과학이 ‘픽셀’이라 말할 때, 미술은 인간군상을 유영하는 ‘점’을 찍는다

박종태 작가는 현실참여의식으로 사회과학이론을 배운 추상아티스트다.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설치미술가인 그의 추상을 뮤지션에 빗대자면 장, 줄, 마디를 활자, 책, 오브제, 그리고 더 큰 오브제로 확장해 가는 랩소디를 만드는 콤포지션(작곡) 전문가인 셈이며, 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시과학을 딥러닝으로 들여다보는 미시과학자의 눈을 가졌다. 수평과 수직의 선으로 면을 만들고 공간을 채우는 그리드의 추상성과 통일성에는 동의하되, 그리드의 비관계성을 해체하며 새로운 텍스트의 의미를 콤포지션해 가는 그의 기하학적 연속성은 현대음악의 시퀀스처럼 테마에 맞는 리듬패턴을 잡으면 유연하게 확장해 나가는 경향이 있다. 

인류 지식의 보고인 책을 찢고 으깨고 뭉쳐, 수성접착제로 중첩시키며 패널에 쌓아올려 앵글을 빽빽이 채우는 박 작가의 콘셉트는 액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픽셀 모음과도 같은 오브제들은 마치 베젤 없이 고해상도로 확장되어 가는 화면 구성처럼, 큰 규모에서 펼쳐질수록 진가를 발휘한다. ‘심연에서의 유’의 세포들은 지난 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여러 경로로 유영을 방해 받았지만, 문명의 상징을 재해석해 온 박 작가는 그러한 파괴 상황에서도 창조를 계속할 당위성을 찾아냈다. 지난 해 대구미술관에서 코로나를 테마로 100인 작가를 모았을 때 ‘코로나 블루’라는 창백하고 우울한 푸른색으로부터 반작용을 일으킨 ‘블루에서 희망을 찾다’라는 테마를 선택할 만큼, 그의 파쇄와 분해는 여전히 별들의 무덤이자 요람인 성운 같은 태도를 지녔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구도자의 자세로 끝없이 만들어 낸 책의 화석들이 물성을 얻으면서 자아를 갖게 됐듯, 관성과 반복이라는 행위에도 새로운 서사가 생겼다. 제작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종이만지기 작업의 결과물들도 규모와 공간으로 배치되면서 제각각의 메시지를 갖게 된 것이다. 우주 내의 지구, 그 안의 인간군상들은 점(픽셀)처럼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그들은 각자의 삶을 토대로 한 가지 오브제도 각기 다르게 보고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박 작가가 이번 ‘심연에서 유’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영법이며, 그는 A4크기의 세포에 들어 있는 DNA인 글자를 거대화되기로 한 오브제들의 씨눈으로 보고 새로운 블록들을 모은 것이다.
더 넓은 공간에서 유기체의 관계성 사이를 유영하는 250가지 오브제

호반갤러리의 넓은 공간에서, 박 작가는 에드 라인하르트의 미니멀적 무채색 구성을 연상케 하는 작품은 물론, 모노크롬에 컬러링을 덧댄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도날드 주드로 상징되는 스퀘어벽면조형 설치미술에 이르기까지 더욱 자유롭게 유영할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심해의 프러시안 블루 빛깔 잠수를 마치고 올라온 그는 20여 m의 공간에서 종이만지기에 담긴 메시지를 조형한다. 동일한 재료와 색상, 패턴으로 각각 다른 작품을 나타낸 A4사이즈 250개 오브제들은, 12m길이, 2.2m의 벽을 채운 유기체인 동시에 세부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점이자 각각의 조각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수천 개의 종잇조각이자 수 만, 수십 만 가지의 활자들이 세포처럼 뭉쳐 공동체와 국가 속의 인간들을 은유한다. 또한 4개의 작품이 400호의 한 작품으로 구성되는 콤포지션에서는 “전체적인 공간을 이 오브제들이 어떻게 흡수해서 서로가 경쟁하고 작품으로서 지배하는지, 그 공간과 작품 간의 관계성에 주목하면 더욱 흥미 있을 것이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반복과 관성으로 쌓아올린 그의 지배는 창작 권능보다 행여 작업장의 관상수가 말라죽을 까 독성이 강한 화공접착제 대신 무독성접착제로 대체한 사연처럼, 상호작용과 내재된 의미로부터 탄생의 이유를 부연 설명하는 보고에 가깝다. 그리고 이미 먹과 종이로 규모의 미시적 분석을 가능케 만든 그의 독창성을 유럽 현지에서 높이 산 이래, 박 작가는 유럽에서 한국 설치미술의 당위성을 보여주는 작가로도 꼽힌다. 

박 작가는 직접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성과를 거둔 K열풍보다 간접적이고 느린 매체라는 특성을 지닌 K아트의 전망을 밝게 본다. 접근이 어려울 뿐, 유럽 못지않은 수준을 지닌 K아트의 시대는 반드시 온다는 그의 확신에는 근거가 있다. 스위스는 물론 프랑스, 이탈리아의 아트페어 기획자들은 지난해부터 유럽 상황이 잠잠해지면 언제든 와 달라는 오퍼를 보내고 있기에, 박 작가는 “파괴된 산물로 재창조를 하면 하나의 작품이 되며, 이와 같은 프로세스와 매커니즘을 유지하면서 10년, 20년 후에도 창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나의 과제이며 이를 유럽 시장에서 다시금 입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150억 년 전 빅뱅은 모든 원소들을 향해 파쇄행위가 종말이 아닌 확산의 전제조건임을 알렸다. 그러니 종이와 텍스트를 해체 후 재구성해 넓게 펼치는 그의 작품들도 미니멀-그리드 설치미술 분야에서 규모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의할 것임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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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월간 인터뷰(INTERVIEW)(http://www.interview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