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    업데이트: 23-01-17 17:35

작가노트

평론
관리자 |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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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주 1.hwp]
토포필리아(Topophilia)적 대상으로
화가 박인주가 바라본 풍경
 

‘화가 박인주의 작품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밭이며 녹음이 짙어가는 가로수, 자작나무숲 등 얼핏 보아 자연을 배경으로 삼은 단순한 풍경화다. 그러나 요모조모 살펴보면 토포필리아(Topophilia)’적 기법이 자연의 향기처럼 묻어나고 한 편의 시(詩)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토포필리아란 사회적 공감이나 교감을 이루는 인류애의 표상(表象)이다. 어원(語源)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주장한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에서 나왔다.
인류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고 불평등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유토피아, 즉 이상향(理想鄕)으로 복귀하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흔히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나 공간을 토포필리아라고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작가가 헌팅하고 선택한 작품의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 박인주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의 풍광(風光)을 한결같이 작품의 소재로 삼아온 작가다. 변화무쌍한 자연은 인간 삶의 원초적 터전이며, 인간은 자연의 영향으로 살아가는 그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유와 정서적 여유를 제공하는 무한한 힐링의 공간이며 편안한 휴식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어머니의 아늑한 품속과도 같다. 그래서일까,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이나 조울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취미 삼아 풍경화를 그리도록 권유하는 정신의학과의 처방도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의 풍광에 취할 때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젖어 들며 안정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정신질환 치료의 한 방법이다.
화단에 등단할 때부터 풍경화만 고집스럽게 그려온 작가 박인주는 자연의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그가 자연을 대상으로 토포필리아적 기법을 작업에 천착해온 이유다. 자연은 그에게 풍부한 미의식과 예술 활동의 공간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었고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오롯이 작품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다.
작가 박인주는 한때 활엽 관목 자작나무에 매료돼 작품 대상으로 삼았으나 현재는 하나의 대상에 국한하지 않고 만휘군상(萬彙群象)이 스스로 존재하는 다양한 자연을 모두 작품의 소재이자 대상으로 삼아 다양하게 작업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 삼아 자연이 펼치는 신비로운 파노라마를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는 작업에 열정을 쏟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연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요람이기 때문이다.
좀 더 폭넓게 말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주고 삶을 지탱해주는 흙(지구촌)의 배경이기도 하다. 인류의 생사관(生死觀)을 두고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런 자연은 인간에게 베푸는 토포필리아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토포필리아를 달리 해석하면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소유하고 싶은 장소와 공간에 대한 정서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tops'와 ‘사랑을 뜻하는 ‘philia’의 합성어다.
대체로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생활환경에서 생리본능으로 애착을 갖는 것이 장소와 공간이다. 특히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는 개인적 공간에 대한 애착은 유별나다. 그곳이 바로 자신의 인식‧정서‧상징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박인주가 각별히 애착을 가지는 천혜(天惠)의 땅 자연에 대한 장소와 공간은 자신만이 소유하는 토포필리아적 대상으로 아무도 근접을 못 한다. 오직 작가 자신만의 창작 영역인 것이다.
지리학에서 정의하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의 개념도 결코 동일시해서는 안 될 변별적인 개념이라고 한다. 특히 공간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텅 비어 있다. 하지만 장소는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가 아닌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영역으로 활용된다. 인간 공동체의 직·간접적인 체험이 작동하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는 영역으로 공동체의 소통과 화합의 장(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장소에 애착을 가지며 그중 공간은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추상적인 장소 일부가 된다.
.작가 박인주 역시 이러한 장소와 공간의 영역에서 평소 자연의 풍경을 관찰하고 사실(寫實)과 추상(抽象)을 넘나들며 작품을 시작하고 완성했다. 자연의 대상을 오랜 시간 관찰하며 캔버스에 지속적으로 붓을 옮길 때 또 다른 환희와 인식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기법과 묘미(妙味)도 경험했다. 작가로서 일종의 자기 성찰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흔히 보이는 주변의 풍경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듯 작가 박인주가 대상을 자주 접하다 보면 눈에 익지 않은 새로운 장면을 목격하게 될 때도 많다고 했다.
전혀 새롭고 신비로운 자연의 풍경! 어쩌면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인지도 몰랐다. 멀리 펼쳐진 자연의 풍광(風光)에서 찾는 것이 아닌 가까운 곳의 대상. 그래서 그는 이 대상을 관찰하며 새로운 작품의 모티브로 삼고 인식의 변화에 집중해왔다. 특히 그는 남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일상적인 풍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그곳 그 자리에 붙박혀 있는 풍경이지만 눈여겨보면 볼수록 새삼 변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습과 빛의 유무에 따라 달리 보이는 풍경,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일상적인 자연 현상, 멀리 바라볼 필요도 없이 마당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에 따라 피는 꽃, 지는 잎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평소 무심히 봐온 마당의 한 공간이지만 이따금씩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했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결국 작가 자신의 체험과 경험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 박인주는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변화한 개념에서 자연의 풍경을 끊임없이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자연은 일상에서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에 불과하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자연은 결코 무심히 지나치는 그런 풍경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새로운 모습과 의미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하여 작가 박인주는 뜨거운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 하나하나, 어두운 땅에 뿌리를 박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와 줄기 등 모든 것을 내적 욕망과 갈등과 환상으로 버무려 캔버스에 재조명한다. 바라볼수록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박인주는 유별나게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자연은 소소한 일상에서도 아낌없이 그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고 창작 의욕을 북돋워 주기 때문이다. 그가 캔버스와 붓을 놓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추구하고 탐구해야 할 대상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진 무한한 자연이다.*
*글. 이미애 (미술학 박사/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