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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속 예술가들 .46] 박희욱 화가 - 김수영기자 이지용기자 - 2013-09-03
아트코리아 | 조회 712


 

   잘나가던 미술학원 접고 전원행…풍경 그리며 生의 가치에 눈떠

   작업에 대한 열망으로 도시의 삶 버려…아내는 그림 그리는 남편만 봐도 행복

   올 연말, 주변 풍경 담은 5년 만의 개인전

   잇단 개발로 변해가는 모습 안타까워…끊임없이 품어주는 대자연 화폭에 담아

 

 

박희욱 화가가 2층 작업실 난간에 기대 고령에서 사는 느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작업실에서 최근 그리던 그림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박희욱 작가.

 

박희욱 작가가 집에서 키우는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다. 그는 닭을 키우는 것은 물론,

 집에서 먹을 채소 대부분을 기를 정도로 철저히 시골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박희욱의 작품

박희욱의 작품

1952년 청도에서 태어났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1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대구·밀라노교류전, 한국전업작가회 대구지회 창립전, 한국·러시아 현대작가전 등 다수의 단체전에도 참여했다.

대구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미술세계공모전, 경북미술대전 등에서 입상했다. 한유미술대전, 대구미술대전 등의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현재 한국미술협회 이사, 대구전업작가회 회원, 대구시전 초대작가 등으로 활동 중이다.

박희욱 화가는 한때 대구지역 입시미술시장의 대부로 불렸다. 입시 중심의 미술학원을 운영해 많은 학생들을 대학에 보냈기 때문이다. 현재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작가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쳐간 이들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교직에 몸담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입시미술학원을 운영하게 됐다. 성실한 지도 덕분에 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안정된 생활을 했다. 남들이 보면 복에 겨워 그런다고 말하겠지만 그 즈음 그는 계속 결핍의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가 늘 부족한 듯, 그의 가슴을 공허하게 만든 것이다.

무엇일까. 바로 작업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학원을 운영하다 보니 작업할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급한 일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 왔으니 말이다. 학원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홀연히 학원을 그만두고, 오랫동안의 도시생활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갔다. 그가 찾아들어 간 곳은 고령이었다. 아직 자녀 둘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하지만 이것조차 시골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모든 생활을 일시에 바꿔버렸지요. 2000년, 이곳에 집을 지어 들어왔으니 13년이 흘렀네요. 지금이야 그래도 집 주변에 전원주택, 식당, 공장 등이 좀 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향인 청도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가진 돈을 털어서 먹고살 궁리까지 해 가며 작업할 곳을 찾으려니 땅값이 비교적 저렴한 이곳을 택하게 됐지요.”

시골에 들어가서도 한 집의 가장이다 보니 생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자녀가 아직 학생이라 정기적으로 들어가야 할 돈이 있었고 물감, 캔버스 등 그림을 그리는 재료도 구입해야 하는데, 이것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의 1층은 레스토랑으로 만들고, 2층에 작업실과 살림집을 마련했다. 1층의 경우 레스토랑을 6~7년 하다가 닭백숙 등을 파는 식당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종업원이 서너 명이나 되었지만 지금은 박 작가와 그의 아내, 두 사람이 식당을 운영한다.

“그림 그리는 것도 쉽지 않지만 돈을 버는 일도 만만찮더군요. 그림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결국 아내만 지금까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려고 열심히 주방과 취재하는 곳을 왔다 갔다 하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다. 이곳에 들어와 아내를 저렇게 고생시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박 작가의 말에 아내는 손사래를 친다. “제가 무슨 고생을…. 전 따문따문 오는 손님들 밥상이나 차려주면 되는데, 박 선생님이 너무 고생이 많습니다.”

아내는 박 작가를 남편이라 부르지 않고 꼭 ‘박 선생님’이라 했다. 그만큼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배어있는 듯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닭 모이 주고 집 옆에 기르는 채소에 물 주고, 잡초 뽑고 하는 일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닙니다. 올해 이렇게 무더웠는데, 바깥일 하는 박 선생님을 보면 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전 시원한 식당 안에서 일하잖아요.”

미대 졸업 후 미술학원을 운영하다가 작업을 하기 위해 전원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전원생활을 하고 보니 먹고살기 위해 텃밭을 가꾸는 등의 바쁜 생활을 해야 했다. 식당에 쓸 요리의 재료인 채소, 닭 등을 박 작가가 모두 기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 일대에서 박 작가가 운영하는 집은 가정에서 먹는 것과 같은 맛의 음식을 주는 식당으로 소문나 단골이 제법 있다.

하지만 아내는 식당일 때문에 늘 시간에 쫓겨 남편이 미술작업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2008년 11번째 개인전을 연 후 5년간 개인전을 열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로 작업을 제대로 못해 그런 것은 아닌지 하는 아내의 걱정이다. 아내는 남편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아내에게 최근 새로운 기쁨이 생겼다.

지난해부터 남편이 그림작업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순을 넘어선 나이에다 농사일에 시달려 몸이 고달플 텐데도 새벽까지 작업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이, 혹시 남편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한없이 좋기도 하다.

“5년 만에 올 연말, 개인전을 할 생각입니다. 아직 화랑을 정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작업한 것을 보여주고 정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지요.”

오랜만에 여는 전시에서 그는 집 주변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집 주변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어디를 화폭에 담아도 정겹고, 예쁜 풍경화가 될 수 있지요.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집 주변 풍경이 많이 변했습니다. 4대강 사업 등의 개발로 옛날 모습들이 사라지고 있지요. 오랫동안 여기에 산 사람으로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습니다. 화가이다 보니 이런 사라져 가는 풍경을 그림으로 담고 싶었지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집 주변 풍경은 화려한 절경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적인 소박미, 단순미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잇단 개발공사 때문에 외국풍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특히 집 앞에 있는 낙동강에서 요트강습이 이뤄지는 등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취재를 위해 작업실을 둘러보니 그리다 만 그림부터 완성된 작품까지 대부분이 풍경화다. 상당수가 집 주변 풍경이란다. 그림 속 풍경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 친근감이 넘치는데, 이 풍경들이 최근 확 바뀌어버려 안타깝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곳에 들어온 후 자신이 계획한 만큼 충분히 그림을 그리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을 그는 그냥 허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풍경화를 그렸지만 도시에서 그린 그림과 여기 들어와서 그린 그림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자연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연의 속살을 제대로 봤다고 한다. 자연풍경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피상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과 호흡하며 그 속에서 채소를 기르고, 동물 등을 키워 봤을 때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자연은 늘 인간에게 베풀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이용만 한다. 하지만 인간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자연은 끊임없이 인간을 품어주고 용서한다. 고령에 들어와 살면서 인간이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의 순리를 뒤바꿔 버리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봐 왔기에 그는 자연에 늘 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화풍에 변화를 주고 싶어도 계속 자연풍경만 그려지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자연의 너그러운 모습을 알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렸지만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밝고 맑은 웃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인터뷰 중 단 한순간도 웃음을 놓지 않는 모습이 보는 이들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자연이 그에게 남긴 또 하나의 흔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에게 박 작가는 수줍은 듯이 까만 봉지를 들려줬다. “멀리서 왔는데, 이런 것을 줘도 되는지…. 시골이라 줄 것이 이것밖에 없네요. 그래도 농약 안 치고 정성껏 기른 것이니 모양은 못났지만 먹을 만은 할 겁니다.”

그가 준 까만 봉지에는 이제 겨우 형태를 갖춰 가는 어린 고추와 작고 비틀어진 가지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아직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것들마저 손님에게 주려 한 그의 따뜻한 마음이 취재하고 돌아오는 길을 기분 좋게 만들어줬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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