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    업데이트: 24-04-15 09:16

작가노트

2024 작가노트
관리자 | 조회 19
존재의 움직임에 접근한 작은 성(城) : 옥지난


 양준호 (미술사박사)


 눈에 선한 것을 마주하려고 꿈꾸던 예술 특성을 화면에 담았다. 실제로 나타나기를 바라며 상상력을 발휘한다. 작가가 눈을 감는다. 어두운 곳 내부에서 일어나는 형상, 간추려진 더 뚜렷한 형상을 느낀다. 형상은 구체적이지 않지만, 경쾌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삶의 경험에서 얻은 것이 갈무리되고 종합한 형태를 쌓아 작가만의 압축한 세계이다. 그렇게 온전한 세계를 펼치려 준비한 어렴풋한 형태의 정화를 작품으로 옮긴다. 작품 내용은 일반적 규정을 즐겁게 넘어 작가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바뀐다. 조합이 바탕이 되어 순수함을 나타내는 형태로 마주한다. 보이지 않던 순수한 형태로 작품에 마주하면 그 대상을 이리저리 옮겨도 수월하게 관계 맺어진다. 작업 형식도 수채화 기법의 장점을 토대로 한 간결한 이미지다. 수채화 형식은 사물들의 의미를 경쾌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옥지난의 작업을 마주하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있을 때의 감정과 비슷하다. 순수함을 저버리고 획일화된 사회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를 보여준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다. 감정에 공감할 사람은 있다. 생각의 방향이 다르다고 외로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도시의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외로울 수 있다는 공허한 사막처럼, 대화할 능력을 준비해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남을 이해하기는 본인의 자신감만큼 상대의 존엄을 인정할 수 있다. 특히 애정 같은 관계에서 품위로 작동한다. 까탈스러움과 새침함, 그리고 고고함 등은 인간 이해 방식을 넓히는 감성들의 하나임도 보여준다. 작품은 접근하는 과정에 대한 애정을 화면에 보여준다. 어쩌면 인간이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너무 서둘러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 어리고 순수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갈망도 못 하는 것이 아닌가를 염려 하지 말고 그냥 접근하라고 화면은 지시한다.

 회화는 침묵의 언어이다. 그리고 물감은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더 밝게 만들지 못하고 어둡게만 칠해지는 재료의 한계가 있다. 작업은 침묵과 어두움을 고요하고 밝게 표현하여 고요함에서 일어나는 즐거움과 밝음으로 드러나는 온기를 찾게 한다. 특히 수채화 형식을 지닌 요즘 작업은 형상을 넘어 있다. 작은 성, 꽃 한 송이, 사이프러스 나무, 초승달의 조형 언어로 나타나서 시각 세계를 넘어 내부를 향해 있다. 대상으로 보이는 것과 표현 의미는 포용하는 능력과 맞닿아 있음을 조형 언어로 제시한다. 작가가 제시한 조형은 삶에서 체득한 내적 형상화이다. 이국적인 성처럼 생긴 저택이나 거주지가 화면의 주요 구성요소이다. 작은 창문으로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벽이 있으면 벽을 지나야만 한다. 문으로 들어가든, 옆으로 돌아가던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이나 틀이 있다. 그 벽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건물을 지탱하는 지지대이고 보호막이다. 그 벽을 작가는 화면에 하나의 쉼터로 도입한다. 닫힌 공간을 지향하는 하나의 틀이다.

인식론으로 접근하면 작가의 언어 방식은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은 서로 관련이 있고 이를 한 쌍의 관계로 설정하는 특징도 있다. 성벽과 함께 풀밭이 펼쳐져 있고 시간은 대략 어두운 한 밤을 가리킨다. 그믐을 지난 초승달이 하늘에 떠 있다. 음력 3일 정도, 초승달이 화면에 보이는 것으로 서쪽을 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주변을 밝힐 수 있는 한두 개의 가로등이 있다. 그리고 그 성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는 작품도 있고 성을 둘러싼 녹지가 성 쪽에 있다. 잘 가꾸어진 조형미를 이룬 농지나 꽃밭, 사이프러스를 닮은 나무가 몇 그루 성만큼 키가 크다. 하늘은 어두움을 예시하지만 침울하지 않고 포근한 색조다. 몇 점의 작품은 성 바로 앞까지 접근해 계단을 올라가면 입구가 보이는 구성도 있다. 비교적 밝은 하늘을 처리했어도 낯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그리고 그 통로를 지나가면 발걸음 소리에 문을 열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창문을 통해 빛이 스며 나온다. 벽들은 별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성이나 저택은 아주 간결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길을 넘어서면 다가설 수 있는 거리이다. 여기를 지나칠 수는 없는 목적지 앞까지 다가왔다는 설정이다. 

먼 거리를 여행하고 늦게 도착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정도의 사이거나, 새로운 목적지라서 생각 밖의 이동 경로로 어쩔 수 없이 늦게 도착했을 때를 추론할 수 있다. 지금 상황 그다음이 기대되는 화면이다. 작가의 작업은 짧은 이야기를 장식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길든 뒤의 여우가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는 행복한 시간을 느끼고 그 시간이 다가왔을 때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다가가는 시간은 서로의 존재가 기쁨으로 가득하고 환하게 밝아진 그 시간이 저 저택 안에는 누가 오는지 발걸음 소리로 구분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정겨운 상상을 느끼게 한다.

 “어린이의 순수함이 있으면 누구나 예술가”라고 피카소가 말했다. 순수함을 바탕으로 그림을 구현한 구성과 요소로 제작하면 삶을 순수하게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순수한 고민이 있다. 순수함은 용기가 필요하다. 삶 속에서 꿈꾸게 하고, 관계를 즐겁게 이해하고, 그 즐거운 관계로 소통하는 일이다. 그 소통으로 전해진 행위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의 조형 언어가 가진 본질에 다가서는 즐거움이 있다 하겠다.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본질을 눈앞에 드러내려는 노력은 의사소통이 언제나 필요하고 아름다움이 그렇고, 존중이 그러하고, 배려가 그러하다. 그렇지만 회화 예술은 시각으로 본질적인 모습을 상상하게 담을 수가 있다. 그러한 면에서 작가의 작업은 원론적인 모습의 접근은 어쩌면 훈련된 조형적 상투성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훈련된 표현 방식의 결합으로써 의미를 바꾼 것이 작가의 미덕이다. 따뜻한 관계를 향한 부드러운 작품이 많은 이와 소통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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