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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고사

[我] 자아존중감, 자존감 찾기
아트코리아 | 조회 951

 

2014/9/16

“我字 

 http://blog.daum.net/ttugi77/15711490

  

 

漢字의 옛이야기

 吳東平

 

 오동평의 <한자의 옛이야기>를 매일 번역을 합니다.

의미있는 삶을 위해 2010년에 이어 다시 매일 쉬지 않고 하기로 마음먹어 봅니다. 

<漢字의 故事(한자의 옛이야기)>는 음운학과 훈고학을 전공하신 중국 오동평 교수의 저작입니다.  

2006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에는 한자의 획의 순서에 따라 한자씩 이야기해 나갑니다.

<한자의 옛이야기>에서는 한 획안에 옛이야기 담고 한 획으로 세계를 펼칩니다.

 한 글자 속에 담긴 옛이야기를 통해 한자의 넓고 깊은 의미를 알려줍니다. 

오동평과 함께하는 한자 옛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민승준/     

   吳東平님의 漢字의 故事  http://data.book.hexun.com/book-368.shtml 

 

 

갑골문

금문

 

捍卫自己的尊严

자기의 존엄을 보호하다

“我”字

 

 

  第一人称代词“我”的本义是什么,历来众说纷纭,没有一个令人满意的答案。

自从20世纪初甲骨文被发现后,“我”的庐山真面目就逐步被人们所认识。

甲骨文的“我”为“”或“”,金文为“”或“”,上述的“我”的形体从直觉上告诉我们:

 제 1 인칭인 “我”의 본 뜻은 무엇일까?

역대로 학설이 분분하지만 우리를 만족시키는 정확한 답안은 없었다.

20세기 초 갑골문이 발견된 이후 비로서 “我”의 진면목이 우리에게 인식되어지기 시작했다.

갑골문의 “我”는 “ ”혹은 “ ”이고 금문은 “ ”혹은  “ ”가 된다.( " " 고문자가 컴퓨터 인식 불가능)

20세기 초에 드러난 이러한 갑골문과 금문의 모습들은 

 “我”에 대해 좀 더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我”是一种古代的兵器,像戈,却又比一般的“戈”上多几把像匕首形的锋利的小刀。

从整个字形来看,似乎又是一个不可分割的整体,即一个独体的象形字。

王国维先生早就指出“我”像兵器之形,郭沫若先生认为“我”是一种锯形的兵器。

 

“我”는 “戈”과 닮은 고대의 병기이다.

그런데 오히려 일반적인 “戈”보다 비수모양의 날카로운 칼날이 더 있다.

모든 글자 자형으로 보자면 나누어 질수 없는 독체적인 상형자이다.

왕국유 선생은 “我”가 병기 형상과 닮았다고 일찍부터 거론했고,

곽말약 선생은 “我”는 톱날 형태의 병기라고 생각했다.

 

푸펑현 서주묘 중 출토된 병기 [庄白村]

 

   说“我”是一种兵器,还可以从出土的文物中得到佐证。

1975年3月陕西扶风县一西周墓中出土了一种兵器[庄白村],其形状为“ ”,

其刃部为圆齿状,背部有两椭圆形的突出的供装柄用的环形孔。

如果将这种兵器装上木柄,就与甲骨文的“我”形状极其相似,

因此有的学者肯定这就是上古时的兵器“我”。

 

이렇게“我”가 일종의 병기라고 말하는 것은 출토된 문물에서 부터 증거를 얻을 수 있다.

1975년 3월 섬서성 푸펑현 씨죠우 무덤[庄白村]에서 위와 같은 형상의 병기가 출토되었다.

칼날 부분이 둥근 이빨 모양이고 등부분에는 타원형으로 돌출된 자루에 고리모양의 구멍이 있었다.

만약 이런 병기 위에 나무 자루를 장착한다면 갑골문 “我”의 형상과 아주 비슷하게 된다.

이로 인해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상고시대의 병기 “我”라고 단정지었다.

 

 

三戈戟 삼과극   具體名稱

 

1978年,湖北随州市曾侯乙墓中出土了一种类似三戈戟的兵器。

有的学者叫它多戈戟。学者们较一致地认为这种三戈戟就是“我”。

因此,学术界初步认定作为第一人称代词的“我”的本义,

实在是古代的一种三戈戟的象形字,而且认为这是一种杀伤力很强的武器。

 

1978년 호북성 쑤웨이쪼우시 증후을묘에서는 '삼과극'과 비슷한 병기가 출토되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다과극'이라도 부른다. 학자들은 이 '삼과극'이 바로 “我”라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학술계는 제 1 인칭 대명사의 “我”의 본뜻을 초보적으로 인정했다.

사실 고대의 삼과극이라는 상형자는 살상력이 강한 무기였다.

 

  “我”在甲骨文中虽然没有用作本义的例子,

但有不少地方将“我”用于动词,当“宰”、“割”、“切”等意思讲的不少。

如“廿牛不我”(甲二三八二),其意思是20头牛不用“我”(兵器)宰杀。

  “我”作为第一人称代词用,早见于殷商时代的甲骨文中。

甲骨文中的“我”作代词用时,均指“我们”(即指以商王为代表的国家军队,

或以商王为代表的一群狩猎者),而没有指代个人的“我”。

 

“我”는 갑골문 중에서 비록 본래 의미로 사용된 예가 없지만,

적지 않은 곳에서 “我”을 동사로 사용했다.

'잡다, 도살하다, 주관하다',  '나누다',  '가르다'등의 뜻으로 된 예가 적지 않다.

그 예로 <갑골문 2383>에 “廿牛不我”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20 마리의 소가 병기를 사용해 도살하지 않았다.

“我”가 일인칭 대명사로 사용되어진 것은 은상시대의 갑골문 중에서도 일찌기 보여진다.

갑골문 중의 “我”가 대명사로 사용될 때는 균일하게 “우리”를 가리킨다.

(상왕을 대표로 하는 국가군대를 가리킨다. 혹은 상왕이 대표가 되는 수렵무리이다.)

개인적인 “我”를 가리키는 뜻은 없다.

 

란서부의 명문

 

为什么会出现这种现象呢?

这是因为“我”字作为己称代词的出现,应在人的“自我”观念产生以后。

开始,人类的生活方式是以氏族为单位的共同生产、平均分配的共产生活方式,

没有私有财产,没有私人权益,没有家庭。这时以自身为中心的“我”的概念还不可能出现。

但是由于氏族是独立的单位,那种以氏族为中心(或说以氏族全体成员为范围)的

“大我”倒是出现了。这种“大我”,就是“我们”,即一个群体。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것은 “我”가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되어져 나왔기 때문에,

분명 사람의 '자아'관념이 나온 이후였을 것이다.

인류의 생활방식은 씨족을 단위로하는 공동생산, 평등한 분배의

재산을 함께 나누는 공산생활방식으로 사유재산, 개인적 권익, 가정이 없었다.

이 때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我”의 개념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씨족의 독립적인 단위로서 그 씨족을 중심으로 하는

(혹은 씨족 전체구성원을 범위로 삼는) '대아'가 출현하게 된다.

이 '대아'가 바로 우리이다. 즉 하나의 무리이다.

 

란서부 청동기 기물과 새겨진 명문의 실제모습

 http://blog.daum.net/ttugi77/12381069

 

这种语言习惯首先进入商人的书面语中。

随着私有制的出现,导致个人的私欲渐旺,占有性渐强,

代表个人的“我”的观念顺应这个历史潮流便出现了。

 

이러한 언어 습관은 우선 상나라 사람들의 문어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유재산이 출현함에 따라 개인적인 사사로운 욕망이

점점 왕성해져서 점유하고 싶은 성정이 점점 강해지게 되었다.

 개인적인 “我”를 대표하는 관념이 순조롭게 역사상의 조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因此,进入商代以后,

“我”指代个人的这种语言现象在商人的口头语中必然会出现,

只是没有进入书面语而已。

这就致使甲骨文中的“我”只代“我们”,不代个人。

这是“我”作为第一人称代词用时与后代不同的地方。

 

이로인해 상나라에 들어간 이후 는 개인을 대신하는 언어현상으로

상나라 사람의 습관적 언어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었고, 문어체에 들어가지 못했을 따름이다.

갑골문 중의 “我”는 다만 “우리”를 가리키고 개인을 대신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我”가 일인칭 대명사로 사용되어질 때 후대와 다른 부분이다.

 

 

 

란서부에 새겨진 명문

以祭我皇祖  세째줄 아래에서 세번째가 以

 

  到了西周时代,“我”便开始指代个人了。

如“以祭我皇祖”(见栾书缶)。从此,“我”在古代既指个人,也指集体。

这就是学术界所说的古汉语中人称代词单复数同形的现象,

也是古代汉语中人称代词发展不够完备的一种表现。

古汉语不像现代汉语单数为“我”,复数为“我们”,彼此区别十分清楚。

 

서주시대에 이르러 “我”는 개인을 대신하는 뜻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예가 <란서부>“以祭我皇祖”에 보인다.

이로부터 “我”는 개인을 지칭하기도 하며 단체나 무리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학술계에서 말하는 바의 고대중국어 중의 인칭대명사 단복수동형의 현상이다.

또한 고대 중국어 중의 인칭대명사 발전상 완비할 수 없는 현상이다.

고대 중국어는 현대중국어 처럼 단수형이 “我”이고 복수형이 “우리”가 되는 것이 이니다

서로간의 구분이 매우 정확하다.

 

以祭我皇祖

 

  有的学者认为“我”用于第一人称代词是一种假借现象。

对此有的学者提出了不同的看法。

他们认为,从“我”字来看,“我”是一种兵器,

说明作为表人的“我”与指兵器的“我”是有联系的。

 

어떤 학자는 “我”가 일인칭 대명사로 사용되는 것은 가차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들 생각에는 “我”를 보았을 때, “我”는 일종의 병기였다.

사람을 표시하는 “我”와 병기를 가리키는 “我”는 연관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私有制出现后,人与人,部族与部族之间的争夺便开始了,为了保卫部族“大我”的利益,

或个人的“小我”的权利与尊严,是要靠武力的。

由于古人要用兵器来捍卫个人的利益与尊严,于是“我”便引申为第一人称代词。

 

사유제가 출현한 후에 사람과 사람, 부족과 부족간의 다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족을 보호하는 '대아'의 권익이나 개인적인 '소아'의 권익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기에 의존했던 것이다.

고인들은 병기를 이용해 개인적인 이익과 존엄을 보호하고 지켜나왔다.

그래서 “我”는 1인칭 대명사의 의미로 파생된 것이다.

 

  还有的学者认为,“我”是由“戈”(兵器)和“禾”(禾谷)构成,

“禾”是古人最大的私有财产,用武器来保卫财产“禾”就是“我”。

(参见徐一青、张鹤仙著《姓名趣谈》第49页)

 

또 어떤 학자들은 “我”가 “戈”(병기)과 “禾”(벼곡식)의 구성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禾”는 옛 사람들의 제일 큰 사유재산이었다.

 “戈”(무기)로 큰 재산인 “禾”를 지키는 것이 바로 “我”인 것이다.

쉬이칭, 짱허씨엔<성명취담> p. 49 참조

  

安子介先生也有相同的说法,他认为“我”是由“禾”和“戈”来描述的。

因此他说,人们为了生存下去,禾谷可使人免受饥饿,有了武器后,

可以捍卫个人尊严,抗御强敌的侵犯,有了这两样东西才有“我”的存在。

(参见《解开汉字之谜》第112页)

 

안쯔지에 선생도 같은 견해가 있었다.

그는 “我”는 “禾”와 “戈”로 묘술되어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인해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생존해 나가기 위해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벼 곡식은 사람을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고

무기가 있으면 강한 적의 침범에 대항해 개인적인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이 두가지가 있고나서야 비로서 “我”가 존재하게 되었다.

<한자의 수수께끼를 밝히다> p. 112 참조

 

 

-------------------------------------< 주석 1 >------------------------------------

 

청동아에 대해서

 

曾经昙花一现 "我"是青铜兵器 

한순간 나타났다 금방 사라져버렸던 "我"는 청동기 병기였다. 

 

글: 张颂斌   번역:민승준

출처:齐鲁晚报 (산동성 제남시 일간지)

 

2014/09/16

 

 

 

 

 

 매일매일 사람과 책

 정윤수

 

  4월 1일, 오늘부터 '매일매일 사람과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365일, 1년 내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연재되는 이 코너를 '사람과 책과 역사'에 관한 흥미진진한 여행으로 꾸미려 합니다. 매일같이 누군가 태어나거나 사망합니다. 또 곳곳에서 의미있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모든 것이 엮여서 한 권의 책이 매일같이 탄생합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하여 풍요로운 인문의 숲이 만들어집니다. '매일매일 사람과 책'은 사람과 책과 역사가 빚어낸 아름다운 숲으로 산책하고자 합니다. 그날의 중요한 인물과 책을 선정하고 이로써 동서 문명의 근현대 시간대를 종횡무진하는, 매일마다 떠나는 풍요로운 인문 여행에 깊은 관심을 바랍니다.

/정윤수      

 

정윤수님의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booking/166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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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레오 시대에 접어들어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 한 것 중에 하나가 과거의 거장들이 남긴 모노 시대의 명반들이다. 50년대 중반 무렵까지의 이 명반들은 뛰어난 연주와 노래에도 불구하고 음질이 흡족하지 않아 명연의 일부만 맛볼 수밖에 없었다.

1982년 CD 기술이 개발되어 모노 시대의 음반도 비교적인 깨끗하게 복각되어 아쉬움이 줄기는 했지만 단지 그 당시의 기술 부족 때문에 거장들의 연주를 모노 녹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은 음악 유산의 손실에 다름 아니다. 거장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나 아르투르 토스카니니가 몇 년만 더 살았어도, 우리는 꼭 그렇게 몇 년을 더 산 덕분에 스테레오 녹음을 남긴 부르노 발터처럼 그들의 명연을 스테레오의 확실한 음장감으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아쉬움’이나 ‘결핍’이 저울로 측량할 수 없는 충일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성악계를 보면 그 아쉬움이 더욱 커진다. 첼로나 피아노는 비록 모노라 해도 그 음이 완전히 구겨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솔로 악기 연주일 때는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성악은 그렇지 않다. 오페라의 디바(여신), 또는 현대의 뮤즈라고 칭송받는 마리아 칼라스가 특히 그러하다. 비록 마리아 칼라스는 스테레오 초기 시절에도 녹음을 남겼지만 그녀의 전성기는 1950년대였고 그때는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표 아리아를 모은 콜렉션 음반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13살 때 그리스로 건너가 아테네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1947년 베로나에서 A.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지오콘다>에 출연하면서 널리 이름을 떨쳤다. 넓은 성역과 우아한 목소리, 풍부한 성량과 섬세한 기교로 오페라의 거의 모든 레퍼토리를 소화하였다. 신화 속에서 걸어나온 듯한 미려한 용모에 대스타로서의 신비로운 기품을 지닌 그녀는 현대 오페라의 진정한 디바로 수많은 화제를 낳았다. 그리스의 대부호 메네기니와 결혼했으나 선박왕 오나시스의 초청을 받았다가 결국 남편을 버렸다. 1965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하였으며 1975년에 오나시스가 사망하자 홀로 프랑스 파리에서 은둔하며 지내다가 1977년의 오늘, 9월 16일에 54살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녀는 1938년 15살 때 아테네 가극장에서 데뷔하면서부터 스타가 되었다. 1952년 영국의 코벤트가든 왕립가극장에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주역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어 그녀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공연 장면은 1959년 파리에서 가진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의 4악장 가운데 한 장면이다. 칼라스를 위해서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를 봐야 한다. 아니 그런 영상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바 없으므로, 그 음반을 들어야만 한다. 벨리니의 이 오페라는 그리스 비극적 요소를 응축시킨 당대의 걸작이거니와 20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의 음악과 그 생애를 은유한다. 칼라스는 수많은 공연을 하였고 그래서 수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우리에게 제대로 소개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개들 ‘베스트’ 혹은 ‘콜렉션’이라는 이름으로 편집된 상태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수준급의 녹음 상태로 전곡 앨범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며 그것도 그녀의 목소리가 절정의 상태에서 비극을 절창하는 앨범으로 이 <노르마>가 대표적이다. 대표작 <노르마>에서 열연하는 칼라스. 마리아 칼라스는 깔끔하게 정비된 스튜디오나 박수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갈라 쇼 같은 무대에서 유명 아리아 몇 곡을 잘 부른 ‘어여쁜’ 가수가 아니다. 그녀는 세계 곳곳의 무대에서 수백 수천의 관객을 앞에 놓고 두세 시간 동안 최고의 목소리와 연기, 그리고 그 시공간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로 흡수하여 이를 다시 엄청난 폭발력으로 연소시킨 가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성을 자랑하는 여느 가수와 달리 때때로 경직되어 있기도 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쇳소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칼라스 세계의 핵심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능란한 기교만으로 오페라 극장의 수천 명을 압도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배역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야만 느낄 수 있는 힘겨운 고통의 몸부림을 그윽한 목소리로 재현해냈던 것이다. 툴리오 세라핌,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등 최고의 지휘자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갈망하였는데 이는 그녀가 어떤 배역을 맡으면 그 배역 너머의 궁극적인 초월성까지 들려줬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일컬어 '신이 내린 목소리'라고 말하는데, 칼라스는 바로 그런 목소리를 내리는 여신이다. 마리아 칼라스를 추모하여 그리스에서 발행한 우표 선박왕 오나시스와 사랑을 나눴으나 그 결실을 제대로 맺어지지 못하여(그는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했다) 은퇴했다는 말이 퍼져 있으나, 글쎄, 내 생각에 칼라스는 모두가 열렬한 애호가이자 냉정한 심판관이 되는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최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게 되었을 때 미련없이 은퇴하고 또한 세상을 향한 창에 검은 커튼을 드리우고 은둔해 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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