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    업데이트: 17-08-31 09:17

청재번역

[서법보 번역] 석개가 말하는 전
아트코리아 | 조회 1,594

石開
 
그의 원래 성씨는 劉이다.
 
 
1951년 福州에서 태어났다. 1998년부터 북경에서 살고있다.
현재 중국예술연구원 중국서법원, 중국전각예술원 연구원이다.
10여차례 전국서예전각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한국의 국전과 맞먹는다)
<石開印存>, <石開書法集>등 개인작품전문집을 출간했다.
 

 
2009년 2월 18일, 중국서예 주간지 ‘書法報’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중국작가 10명을 엄선하여 소개하는 칼럼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첫 번째 소개할 중국작가는 전서(篆書)로 유명한 석개(石開) 입니다. 전서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금문 창작에서 좋아하는 시에 나오는 옛 글자를 찾지 못해 어려워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석개 선생의 글을 읽고 금문을 좋아하는 다른 분들께 도움이 될 듯해서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石開가 말하는 篆

기자 : 蘭干武 란깐우
오늘 석개선생이 취재에 응해 주셔서, 전서와 전각을 위주로 심도있는 대담을 가졌다.
 
기자: 우리 書法報에서는 당대 서예가 50인을 엄선하였습니다.
‘五體十家’라는 칼럼제목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는데 신문을 보셨습니까?

 
몇 차례 보았습니다. 서체와 서예가 연령순으로 배열된 것 같던데요. 저는 전서에 속해 있더군요. 조금 의외였지만, 매우 기뻤습니다. 사실 제 서력으로 보면 행초서를 연구한 세월이 전서에 비해 훨씬 오래되었답니다. 또한 제 전서는 표준형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서에 가깝기까지 합니다. 이런 전문적인 미디어매체에서 저를 긍정적으로 봐 주셔서 매우 기쁩니다.
 
기자:  전서를 연구하신 경력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서를 배우는 데 있어서 몇 가지 계통이 있습니다. 갑골문계, 금문계열, 秦漢전서체계통(그중 소전과 漢篆의 구분이 있다), 청나라 전서유파(그중 등석여파와 전점파의 영향이 컸다)가 그 계통입니다. 저는 갑골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매우 깊이 있게 연구했습니다. 청나라 전서는 등석여, 오양지, 조지겸, 오창석 임서를 많이 했습니다. 17살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금문과 등석여 전서를 제일 열심히 연마했습니다. 28세 이후로는 더 이상 서첩 임서에 머무르지 않고 첩을 읽고 집자하는데 비중을 두었습니다.
 
기자: 재미있군요. 임서하는 방법을 벗어났다니! 이 방법은 이전에도 들어봤지만,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임서는 정상적이고, 임서를 하지 않는 것은 비정상적인 방법입니다.제가 알아 본 바로는 늙을 때까지 줄곧 임서를 해온 서예가는 翁同和, 하소기, 왕탁과 당대의 趙冷月등이 있습니다. 한편 중년에 이르러 더 이상 임서를 하지 않은 서예가도 많이 있었습니다. 늙을 때까지 쭉 임서의 방법을 놓치 않은 서예가들인 일반적으로 모두 그 작품들이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임서를 하지 않은 작가는 널리 소문이 나지 못합니다. 이는 임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부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생각 때문인데, 右任中의 老年集<표준초서천자문>에서 그는 결코 임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손짓하거나 시늉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기자 :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集字를 하십니까?
 
전서로 예를 들자면, 40년 전각을 새겨왔고, 지금까지 작품이 4000방에 달합니다. 한 방의 인장에 4글자로 잡으면, 글자를 찾기 위해 10000번이 넘게 사전을 뒤적이며 집자를 한 셈입니다. 매 글자를 찾은 후 글자들을 어울리게 대비, 대조, 선별하면서 또 뒤적입니다. 이 과정 중에서 전서의 각종 자형이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게 됩니다. 이렇게 전서의 공력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갑골문을 다루지 못했으니 제 공력에도 결함투성이랍니다. 정말 배움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기자: 저는 선생님의 금문작품을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갑골문작품도 어렵게 한 번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현재 전서는 어느 계통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종정문으로도 불리는 금문은 전서를 배울 때 반드시 익혀야 하는 서체입니다. 제 금문작품이 잘 보여 지지 않는 원인은 제가 쓰는 금문이 개성적인 모습을 담고 있지 못한 모방의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술작품이 개성적으로 세워지지 않고, 대중에게 보여주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갑골문은 독립적인 학문영역입니다. 하지만 쉽게 인식되지 않는 단점으로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또한 예술창작의 매체로 쓰기에 국한성이 너무 큽니다. 글자 결구도 변화시킬 여지가 많이 없어서 예술적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창작하기 위험하고 두렵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저의 전서는 秦漢계통의 전서에 속합니다. 秦權, 漢鏡, 漢印, 封泥등이 모두 제가 법을 취하는 대상입니다. 이외에도 금문과 갑골문의 세부적 조형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이런 다양한 조형 요소들을 만두 속처럼 잘 섞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색다른 맛을 내게 합니다. 제가 ‘역식(易識)’(=알고 있는 것을 바꾸다)이라는 엔드라인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겉보기에 漢篆체계와 비슷하지만 다른 맛을 내는 것이죠.
 
기자: 林健 선생님도 이런 유형 같은데,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陳子奮이라는 같은 선생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임건 선생은 저보다 10살이 더 연배이십니다. 임건 선생은 그가 30세 전후에 이미 지금과 같은 그만의 전서풍격를 이루어 냈습니다. 저도 자주 임건 선생을 찾아가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도 뒤섞는 혼합형이라서 저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하는 재료가 서로 다르기에 작품으로 나타나는 맛과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기자 : 어떻게 전서를 창작하면 심미적 가치가 드러나게 되는지요?
 
예술의 심미의 그 첫째는 독립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가 복잡함입니다. 우선 정확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서예는 예술의 측면 상에서 모방을 통해 사물을 가리키고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소기와 비슷하게 썼지만, 닮기만 했지 돌이나 나무를 둘러서 만든 성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이치로 근대시기 금문을 창작한 많은 선인들이 있었지만 닮기만 했지, 심미적으로는 가치가 없었습니다. 독립, 즉 홀로 선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심미성을 담은 개성적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 힘든 일이죠.
심미적 자격을 갖출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감각기관, 미학개념, 명확한 것, 모호한 것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현대 예술미학으로 보면, 예술작품의 심미내용은 다원하고 복잡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손과정이 말한 ‘消息多方’ (=정보가 많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기자: 모 언론에서 보도한 선생님의 전서창작의 몇 가지 패턴에 대해 본 기억이 납니다. 그 패턴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청나라부터 지금까지 전서창작의 패턴은 아래의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의양모사(依樣摹寫)로 모양에 의거해 모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의양변형(依樣變形)입니다. 모양에 근거해 형태 바꾸는 것입니다. 셋째, 해구중조(解構重組)으로 구성을 이해하고 결구를 풀어 다시 조합하는 것입니다. 依樣摹寫는 명칭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정확하고 흡사하게 창작하는데 목표를 둔 패턴입니다. 대표적인 작가로 오대징과 장유송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공력이라고 부릅니다. 依樣變形은 어떤 고대의 조형을 근거로 삼아 그것을 적당히 바꾸는데  최종적으로는 개성적인 면모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조지겸이 등석여를 근거한 것, 오창석이 석고문을 근거해 창작한 것이 그 예가 됩니다. 解構重組는 현대의 미술개념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조형결구를 깨뜨리고 새롭게 조합한 후 개성적인 면모를 형성하는 창작법입니다. 이러한 패턴은 보기에 매우 현대적이지만, 제백석과 황빈홍의 전서작품에서 이미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이런 표현이 보입니다. 또한 이런 비정식적인 조합은 말하기엔 쉽지만 실제로 매우 어려운 창작법입니다. 창작하기도 어렵겠지만 잘못했다가 남들에게 조롱받기 쉽습니다.
 
기자: 이 세 가지 패턴의 전망을 어떠합니까? 선생님은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에서 얘기 한 것 같습니다. 예술 창작으로 보면, 의양모사(依樣摹寫)는 심미적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서를 배우는 기본이 됩니다. 반드시 이 창작법으로 착실하게 연마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몇 일 이 방법으로 쓰고는 다 터득했다가 여기고 더 이상 이 방법을 연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서예창작은 현묘한 것이어서, 여러분이 얼마나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느냐가 작품 속에 드러납니다. 의양변형(依樣變形)와 해구중조(解構重組)는 ‘度’를 장악해야 합니다. 비록 ‘度’는 명확한 잣대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서의 高下, 進退, 存亡을 다루는 키워드입니다. 고품격예술을 생각하거나 이미 격이 높은 예술가라면 이 ‘度’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술의 경지는 끝이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중 구체적인 해석으로 예술의 형식 자체가 바로 끝이 없다고 합니다. 전서라는 형식은 앞으로도 변화무쌍한 개성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다양하게 변화발전할 것입니다. 아마 이런 패턴도 이에 따라 변할 테지만,  최근의 이 세 가지의 패턴은 비교적 항구불변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저는 解構重組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전서 창작에 있어서 늘 매우 다양한 문제들에 봉착하게 됩니다. 만약 고대 혹은 전인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글자가 있다면 어떻게 합니까? 謝雲 선생은 ‘呆’자를 찾지 못해 골치아팠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시는지요?
 
갑골문으로 창작을 하고자 한다면, 정말 이건 큰 문제입니다. 금문도 역시 문제입니다. 하지만 진한전서계통은 개별자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방법을 썼습니다. 하나는 통용과 가차의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景’으로 ‘影’을 통용, 가차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방법은 아예 쓰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부수를 끌어다 모아 사용하는 방법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쓰면 심한 논쟁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예 쓰지 않고 기피한다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방법이라 여깁니다. 부수를 끌어모으는 것은 학술상으로 보면, 그 엄격한 문제지만 예술상으로 보면 특히 21세기 예술로는 무방하며 쓸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어지러이 통용하거나 가차하는 것 보다 덜 진부하여 오히려 더 상쾌한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전인들이 이미 널리 사용한 바있는 통용자는 쓰도록 엄별해야 합니다. ‘呆’자에 관해서는 <辭源>에서는 ‘呆’는 고대에 ‘保’로 쓰였다라 하였고, <설문해자>를 찾아보면 과연 ‘保’자의 항목 내에 고대 ‘呆’자로 쓰여진 것이 보인다. 만약 이런 근거가 충분치 않다고 여긴다면 <설문해자>에서 번체자 태(豈+犬)를 더 찾아보길 권한다. 만약 이 글자가 없다면, 제일 마지막으로는 부수를 끌어모으는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기자: 선생님께서는 관용을 주장하시는 것이 분명하군요.
 
꼭 그런 것은 아니죠. 반드시 관용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모든 글자를 반드시 엄밀하게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자를 찾아본 후 예를 들어 ‘住’가 고대에 ‘駐’로 쓰여진 것처럼 고금의 모순이 드러난다면, 고찰을 통하여 통속적으로 약속된 ‘駐’를 쓰는게 아니라 부수를 모은 ‘住’를 쓰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도리가 있습니다. ‘住’가 고대에 ‘駐’로 쓰여진 것을 모르면 무지이고, ‘駐’를 알고 ‘住’를 쓰면 선택입니다.선택은 당대의 보편적이고 중요한 적절하면서도 유용한 방법입니다. 만약 이 주를 사용하여 남들에게 질타를 받는다면 부끄러워하거나 반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술은 귀족 같은 마음과 태도를 양성하는 것이니, 이런 소질과 수양을 배양하는 걸 잘 안다면 남들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에 동요될 필요가 없습니다.
 
기자: 선생님의 서예의 이상경지는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전통적 보편성과 신선한 개성의 결합된 풍격의 경지입니다. 이러한 풍격 중에는 작가의 생명, 사상, 처세에 대한 상황을 자세히 엿볼 수 있으니까요. 8자의 통속적인 말로 이야기하자면, ‘個人面目, 書如其人’ 입니다.
 
기자: 선생님은 이미 여러 차례 서예는 생명의 상태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전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서예가 표현하는 생명상태는 결코 주관적 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술수준이 자리 잡히고 걸어가는 길이 정확하기만 하면 서예는 사람과 같아서 빠르고 느림은 필연적입니다. 이것 역시 서예본체가 결정되어지는 것이죠. 만약 여러분이 좀 더 일찍 의식하고, 일찍 기술을 조정한다면  이 경지에도 아마 조금 빨리 도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전서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자면 ‘識篆(=전서를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식전’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은 꽤 오래 걸립니다. 이 외에도 전서의 점획이 다른 서체들과 차이가 큰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서체에 조예가 깊은 단계라면, 전서도 상대적으로 잘 쓸 수 있다고 봅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조금 난처로울 수 있는 문제를 여쭈어 보겠습니다. 고금을 통틀어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서예가는 누구입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맞겠죠. 자신만의 개성적인 풍격을 개척한 고금의 서예가 모두에게 저는 존경을 표합니다. 굳이 들추어낸다면 제가 좋아하는 고대 서예가는 세네명이 있고, 당대 서예가는 두세명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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