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김씨 문주문중의 재사(齋舍) 경모재
명문 선산김씨는 연원(淵源)이 깊다. 시조는 순충공(順忠公) 선궁(宣弓, 904-946)으로 벼슬은 고려 정란보국 벽상공신 문하시중(靖難輔國 壁上功臣 門下侍中)이다.
아버지는 일선군사(一善郡事) 체의(體宜)로 신라 46대 문성왕의 7대손이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선산에 머물려 군사를 모집할 때 불과 15세라는 어린나이에 지원하니 태조가 기뻐서 활(弓)을 하사하며 이름도 선궁(宣弓)이라 지어주었다.
이러한 명문이 대구로 이거(移居)한 것은 전주 판관을 지내며 임란 중 창고를 열어 고을의 주민들을 구휼(救恤)한 24세 김안국(金安國)이 달성군 세천리(世川里)에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증손인 27세 통덕랑(通德郞조선 시대, 정오품 상의 문관 품계) 김자창(金自昌)이 금호강을 건너 문주(文朱, 현 북구 금호동(琴湖洞)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른다.
경모재(景慕齋)는 1993년 3월에 세워졌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많은 학자들이 改憲의 논리를 제공하고, 정계에 진출할 때 끝까지 교단을 지킨 헌법학자 김철수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도 통덕랑 김지창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