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    업데이트: 18-04-11 15:30

칠곡이야기

한강 정구 선생의 대구 칠곡에서의 6년
아트코리아 | 조회 1,071

한강 정구 선생의 대구 칠곡에서의 6년


Ⅰ, 들어가는 말


퇴계학을 근기지역으로 확산시키고 그들이 실학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조선 중기의 대 성리학자 한강 정구는 생애 마지막 6년을 대구 사수에서 보냈다. 원래 만년을 보내고자 한 곳은 산수가 아름답고 외진 수도산의 무흘정사(武屹精舍)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학문을 더 깊이 연구하고 그의 철학이 담긴 서적을 저술하며 참다운 선비의 모습으로 살고자 했다. 그러나 남명(南冥)의 같은 제자였던 정인홍과 스승의 문집간행을 두고 견해 차이가 있었고, 친구 동강 김우옹의 만사 “퇴도정맥종천모(退陶正脈終天慕, 퇴계의 정맥을 종신토록 사모했고) 산해고풍특지흠(山海高風特地欽, 남명의 높은 풍도를 특별히 흠모했네)” 라는 표현을 두고 갈등이 더욱 깊어져 마침내 절교에 이르렀다.

이어 동향인 박이립이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하는 일이 있었다. 관부에 나아가 석고대죄 했으며 그 후 무고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가 느꼈을 심리적 부담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그가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지었던 무흘정사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그가 태어나고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고향 성주는 더 이상 있기에 거북한 땅이 되었다. 무흘에서 보낸 8여 년 후 1613년(광해군 5) 제자들의 권유로 칠곡의 노곡정사(지금의 칠곡군 왜관읍 금곡리 노실, 가실성당 부근)로 옮겼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마련한 노곡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화재로 집이 소실된 것은 물론 보관하고 있던 서책, 집필 중인 글 등 100여 권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는 이 화재에 대해 “하늘이 나를 죽이는 구나(天喪余)”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614년(광해군 6) 72세 때 사수(대구시 북구 사수동)로 옮겨 1620년 (광해군 12) 78세의 일기로 타관 땅인 대구의 사양정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Ⅱ 한강과 대구

한강이 대구유학발전과 주민들의 교화에 끼친 영향은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과 “달성십현(達城十賢)”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전자에 의하면 대구지역의 한강 제자로 곽재겸, 서사원, 손처눌, 송원기, 정광천, 정기, 정수, 정천주, 이주, 채몽연, 채무, 채선수, 채선길, 채선견, 채선근, 류시번, 배경가, 도성유, 도여유, 도신수, 도응유, 도신휘, 도언유, 도경유, 최동립, 최동률, 최동집, 박종우, 전사헌, 구회신, 곽근, 곽준, 손처약, 손린, 곽주, 정선, 도신휘, 서시립, 서사선, 곽이창 등 40여 인으로 이들은 대구의 문풍 진작과 사회교화에 기여했고 후자 달성십현은 이들 제자 중에서 대구 사림으로부터 특별히 존경 받는 분이다.

 


 

남인 예학의 대가이자 퇴계학을 근기지역으로 확산시킨 한강 정구 선생상




달성십현은 1529년(중종 24)부터 1665년(숙종 6)까지 136년 동안 대구의 유학자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충의(忠義)로 일어나 의병활동을 주도하거나 인재양성과 민심순화에 이바지 한 분들이다

그 근거는 손단(孫湍, 1626~1713)의 <유현록>과 인천 채씨 <택고문서(宅古文書) 덕행록> 박종우(朴宗祐, 1587~1654)의 <도곡문집>에 있다. 이 세 자료를 종합하면 십현이라고 하여 열 분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모두 17명을 말한다. 




달성 십현을 기리는 달성 유현 숭모비


 

주신언, 채응린, 정사철, 곽재겸, 서사원, 채선각, 정광천, 손처눌, 채몽연, 류시번, 도성유, 박수춘, 정수, 도여유, 서시립, 서사원, 박종우 등이다. 이들 중 주신언, 채응린, 정사철 3명을 제외하고 집지 문인 동호 채선각을 포함하면 14명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제자들이다.

성씨별로는 신안주씨, 1명(주신언), 인천 채씨 3명(채응린, 채선각, 채몽연), 동래 정씨 3명(정사철, 정광천, 정수), 현풍 곽씨 1명(곽재겸), 달성 서씨 3명(서사원, 서시립, 서사선), 일직손씨 1명(손처눌), 문화류씨 1명(류시번), 성주도씨 2명(도성유, 도여유), 밀양박씨 1명(박수춘), 순천박씨 1명 (박종우) 등이다.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당시 대구사회의 공론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대구십현
 


 

 

번호

이름

본관

생몰연도

아호

행적

저서

제향서원

1

주신언

周愼言

신안

?

송재

松齋

유행, 덕행

 

 

2

채응린

蔡應麟

인천

1529~1584

송담

松潭

덕행. 교화

송담실기

서산서원

유호서원

3

정사철

鄭師哲

동래

1530~1593

임하

林下

의병장, 교화

임하문집

금암서원

4

곽재겸

郭再謙

현풍

1547~1615

괴헌

槐軒

의병장, 교화

괴헌집

유호서원

5

서사원

徐思遠

달성

1550~1615

낙재

樂齋

의병장, 교화, 덕행

낙재집

구계, 구암서원

6

채선각

蔡先覺

인천

1552~1598

동호

東湖

의병, 유행

 

 

7

정광천

鄭光天

동래

1553~1594

낙애

洛涯

의병, 효행

낙애집

금암서원

8

손처눌

孫處訥

일직

1553~1634

모당

慕堂

의병장, 교화

모당집

청호서원

9

채몽연

蔡夢硯

인천

1561~1638

투암

投巖

의병, 교화, 덕행

투암집

소암서원

10

류시번

柳時藩

문화

1569~1640

사월당

沙月堂

덕행, 교화

사월당집

청호서원

11

도성유

都聖兪

성주

1571~1649

양직당

養直堂

의병, 교화

양직당집

용호서원

12

박수춘

朴壽春

밀양

1572~1652

국담

菊潭

의병, 교화

국담집

남강서원

13

정수

鄭錘

동래

1573~1612

양졸재

養拙齋

유행

양졸재실기

오양서원

14

도여유

都汝兪

성주

1574~1640

서재

鋤齋

의병, 교화

서재집

용호서원

15

서시립

徐時立

달성

1578~1665

전귀당

全歸堂

효행, 덕행

전귀당집

백원서원

16

서사선

徐思選

달성

1579~1651

동고

東皐

의병, 교화, 덕행

동고집

옥천사

17

박종우

朴宗祐

순천

1587~1654

도곡

陶谷

의병, 문예

도곡집

 

 

 

<자료 : 달성유현숭모회>


또한 이들 중 낙재 서사원은 임란 시 초대의병장이고 대구의 서쪽 이천 선사재에서 180명의 제자를, 모당 손처눌은 낙재 다음 제2대 의병장으로 동쪽 황금동 영모당에서 202명의 인재를 길러 냈다. 이들의 제자들의 제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오늘날에도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대구사회의 주류로 활동하고 있다.




Ⅲ 한강 대구 사수에서의 6년

 노곡장사의 화재로부터 일부 타다 남은 서책을 수습한 한강은 곧바로 사수로 옮겨 왔다. 이때는 엄동설한이었다. 즉 노구로 추위로부터 모을 보전해야할 화급한 시기였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사수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할만 한 기록이 없다. 성주에서 노곡으로 올 때 그 땅이 경산인 이안(李晏)의 옛 집터였다는 점과 배중부, 이이직, 정덕우가 주간하고 송학무, 이군현, 이무백 등이 각기 몇 칸씩을 분담하여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수로 옮겨올 때는 이런 내용을 고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

아마 양졸재 정수의 아들 경한재 정천주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사수는 일찍이 임하 정사철과 그의 아들이자 한강의 문인이기도 한 낙애 정광천 등 동래정씨들이 세거했던 곳이고 실제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경한재는 아버지 정수와 함께 한강의 고제였다.

뿐만 아니라 양졸재는 청휘당 이승의 사위로 집이 부유했으며 한강이 아끼는 제자중의 매우 특별한 한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을 두고 한강은 “공자가 안연이 죽고 애통해 하는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고 했고 또한 한강의 아들 장(樟)은 제문에서 “평보(平甫, 양졸재의 자)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응당 내가 평보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해 매우 막역했던 사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양졸재의 아들 정천주의 자호 경한재(景寒齋)의 경한(景寒)은 한강(寒岡)의 덕망과 인격을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또 봉산욕행기간 내내 한강을 모셨으며 당시 일기가 있었다고 하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최근 도재욱(연경서원중건추진준비위원장)에 의해 발굴된 <사빈서재식기안 (泗濱書齋食記案)>을 보면 한강이 사수로 와서 사양정사를 짓기 전에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활동을 한 곳은 사빈서재(泗濱書齋)가 있었다. 이 서재는 양졸재, 경한재 부자 것이 아니면 동래정문이 경영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강연보>와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대구 사수에서의 한강의 마지막 6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강 선생이 손수 참여해 완공한 사양정사 LH 공사가 최근에 복원했다.

 

0, 1614년(광해군 6) 72세

 

-1월 노곡의 정사가 화재를 당했다.

-사수가로 터를 옮겨 정했다.

-사수 주산의 신령께 제를 올렸다.

*삼가 고합니다. 구(逑)는 일찍이 노곡 남산촌에 살적에 겨우 두 해는 넘기고 뜻밖에 화

재를 입어 서적이며 가재도구들이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나머 지 차마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 없기에 지금 본산의 기슭에 와서 새로 터를 잡아 사당을 세우고 살림집을 지어 노년을 마칠 계획을 하였습니다. 신령께서는 보호하고 도우시어 저 로 하여금 편안하게 생업을 영위하게 해 주신다면 아마도 큰 허물없이 평생의 뜻을 온전 히 이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술이며 과일로 신령께 호소하니 굽어 살피시고 흠향 하소서 삼가 고합니다.

-낙재 서사원이 선생을 찾았다.

-2월 (손처눌)사상(泗上, 사수를 말함)에 가서 정 선생을 뵈었다.

*선생이“내가 강을 건넘으로부터 마음의 산란함을 족히 말할 것 없고 오직 그대의 거처가 자못 가까우니 이것이 다행한 일일 뿐이다”라고 했다.

-3월(손처눌)이 정 선생께 가서 뵙다.

-7월(손처눌) 정 선생을 모시고 나지(羅池)의 연을 구경하고 돌아와 사상에 이르러 어려에 오르다.

-여름에 불타다 남은 것들을 수습하고 <오선생예설>을 다시 편찬하였다.

-10월에 아들 장(樟)을 잃었다. 12월에 창평 선영의 서쪽에 장사지냈다.

 

0, 1615년(광해군 7) 73세

 

-2월(손처눌) 사상에 가서 정 선생을 모시고 역학을 강론했다.

-3월 (서사원)한강 선생에 인사드렸다

-5월에 풍병에 걸려 오른쪽이 마비되었다.

-7월 (손처눌) 부사 이유경이 찾아와서 함께 사상에 가서 정 선생께 문후하다. 이공은 율곡 문인으로서 또 한강 문하에서 배웠다.

-<예기상례분류>를 편집하였다.

-가을에 박이립이 또 흉악한 소를 올려 선생에 대한 중벌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광해군도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불문에 붙였다.

 

0, 1616년(광해군 8) 74세

 

-(손처눌) 사상에 가서 정 선생을 모시고 문탄공이 박(朴)과 문답한 말을 이야기하다.

-7월에 영천(榮川) 초정(椒井, 현 봉화 오전약수)에 가서 목욕하고 8월에 돌아왔다.

-8월 (손처눌) 사상에 가서 정 선생을 뵈옵다.

 

0, 1617년(광해군 9) 75세

 

-2월 26일 사빈서재(泗濱書齋)에서 강학을 실시하다. 이때 재중식기규례(齋中食記規例)를 만들어 수강생들의 급식(給食)을 엄격히 했다.

*서재의 공량(公粮)을 먹는 자는 각기 그 이름 밑에 월일과 아침저녁으로 서명하라

*단체로 강학하는 이들은 오래 있을 여부와 타관을 논하지 말고 식사를 주어라.

*비록 강학 때가 아니라도 머물기를 원하여 탕약을 올릴 때에는 식사를 주어라.

*오늘 와서 내일 가는 이들은 식사를 주지 마라.

 

-(손처눌) 사상에 가서 정 선생을 뵙다. “그대의 얼굴을 모습이 지난날보다 자못 못하니 출입을 가벼이 말고 몸조리에 힘쓸지어다. --이제 따라 노니는 벗이 그대와 장덕회(장현광) 몇 사람뿐인데 각자 노쇠한 지경에 있어 전과 같이 자주 왕래할 수 한스럽다”했다.

-3월 (손처눌) 사상에서 정 선생을 뵙고 이무백의 부름을 받아 상지 수계하는 모임에 가다.

 

-7월에 동래 온천에 가서 8월에 돌아왔다.

*이윤우의 <봉산욕향록>에 의하면 7월 20일 새벽 다사읍 서재 지암에서 출발하여 현풍-고령-창녕-함안-영산-밀양-김해-양산을 거처 7일 만인 7월 26일 동래 온천에 도착하였다. 이는 물길 710리, 뭍길 20 리 도합 730 리에 이르고 그 곳에서 30일 동안 온천욕을 하고 8월 26일 다시 동래를 출발하여 양산-통도사-경주-영천-하양을 거쳐 45일 만인 9월 4일 사수로 돌아왔다.

욕행 기간 중 하행 길에는 136명, 상행 길에는 15명 도합 151명의 제자들의 영접을 받았다.

-, 9월 (손처눌) 사상에 정 선생을 모시고 이야기하다.

-, 10월에는 김학봉(김성일)의 행장을 지었다.

-학봉의 아들 김집(金潗), 정부인 장계향의 아버지 장흥효(張興孝)가 찾아왔다.

-, 11월 조정 대신이 또 자전(慈殿, 임금님의 어머니)이 안에서는 저주를 주도하고 밖으로는 역모에 호응하였다는 설을 꺼내 서로 번갈아가며 상소하여 폐위할 것을 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 초안을 얽다가 그만 두었다.

-,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짓고 자호를 사양병수(泗陽病叟)라 하였다. 세 칸의 집을 세웠다. 서 쪽의 두 칸은 서재로 하여 그 이름을 지경재 (持敬齋)와 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동쪽 한 칸은 대청으로 하여 이름을 경회당(景晦堂)이라 하였으며 남쪽 행랑채는 누각으로 이름을 망로헌(忘老軒)이라 하였다.이것을 모두 합쳐 사양정사라 하였다.

-,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가 완성되었다.

-, 일두 정 선생(정여창)의 실기를 지었다.

 

0, 1618년(광해군 10) 76세

 

-1월 7일, 11개월 지속해 온 사빈서재에서의 강학을 멈추다.

* 기간 중 수강생은 모두 85명으로 이중에 기존의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에 등재되어있는 분이 47명 그렇지 않는 분이 38명이었다.

특히, 이들 중 43명이 봉산욕행에 동참하거나 도중에 한강을 맞이한 분들이다.

-3월에 창평 선영을 둘러본 뒤에 판서공 묘갈을 세우고 돌아왔다.

-하락도(河洛圖)와 태극도(太極圖)를 그림 두 병풍을 만들었다.

-김동강(김우옹)의 행장을 지었다. 그러나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8월 (손처눌) 이이직과 사상에 가서 정 선생을 모시고 이야기하다




 

한강 선생 유허지에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한강공원

 

0, 1619년9광해군 11) 77세

 

-8월에 약수와 온천수로 목욕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 도동서원과 신산서원의 사당에 들러 참배하였다. 신산서원은 김해에 있는데 남명 조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다.

-7월 울산 초정과 동래 온천에서 목욕한 뒤 창원 관해정에서 머물러 몸조리하다가 10월에 돌아왔다.

-11월 (손처눌) 사상에 가서 정 선생을 뵈옵다.

-12월(손처눌) 사상에 가서 정 선생을 뵙다.

*--정 선생이 손을 잡고 “열흘을 보지 못했는데 1년이 된 것 같다. 내가 장차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데 자네의 병이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죽기 전에 서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으랴” 했다.

 

0, 1620년(광해군 12( 78세

-1월 1일 병세가 위급해졌다.

-5일 갑신일 아침에 <家禮會通(가례회통)>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예설>을 교정할 당시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둔 종이가 똑바르지 않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정돈하여 다시 붙이게 하였다. 유시(酉時)에 이르러 돗자리가 바르지 않다는 말을 세 번 연이어 말하였으나 기운이 약하고 말이 유창하지 않았다. 손으로 돗자리를 가리킨 뒤에야 곁에 있는 사람이 비로소 그 뜻을 알고 선생을 부축해 안고서 바르게 하였다. 조금 뒤에 지경재에서 운명하였다.

-(손처눌) 1월 5일 정 선생이 돌아 가셨다. 설위(設位)하고 곡하여 이르기를 “ 천한 병이 이렇게 심하여 죽기 전에 떨어지지 말자는 분부를 능히 지키지 못하니 이것이 평생의 한이다. ”

-4월 2일 기유일 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도내 , 경기, 관동, 호서로부터 와서 회장(會葬, 장례 지내는데 참여함)한 사류가 460여 인이었다.

 

*궁서체로 쓴 부분은 연보에 없는 내용을 보강한 것이다.

 

Ⅳ, 마무리

 

한강의 말년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오랜 친구이자 같은 문하에서 공부했던 정인홍과 절교하고, 동향의 박이립으로부터 모함을 당하고 그로인해 그가 스스로 만년을 보내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무흘정사 마저 포기해야할 만큼 상심이 컸었고 다음 노곡으로 와서도 애써 집필했던 문적과 보유하고 있던 많은 서책들이 불타 사라졌으며, 사수로 온 첫해 사랑하던 아들 장을 잃는 비운을 만났으며, 연이어 풍까지 와서 스스로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역경에도 꿋꿋하게 버텨내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장횡거, 정호, 정이, 사마광, 주희의 예학을 정리한 <오선생예설>, 상복의 연혁을 도표로 밝힌 책. <오복연혁도>을 저술하여 그의 예학을 완성해 남인 예학의 대가로 자리매김 되었다.

특히, 오복연혁도는 신하가 임금을 위해 입는 상복도, 신하가 임금을 좇아 입는 상복도, 공자에 입히는 상복도, 후손이 그 본종을 위해 입는 상복도, 본종이 후손을 위해 입는 상복도, 아내가 남편 일가를 위해 입는 상복도, 처가에서 자기를 위해 입는 상복도 등 12목(目) 35표(表)로 되어 있는데 이 시기 상복례(喪服禮)의 기준서로 영남지방에서 존중되었으며 훗날 예송논쟁(禮訟論爭)의 원인이 되어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결하여 서인의 거두 송실열이 잠시 실각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사빈서재를 열어 85명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또 고금을 통해 누구도 하지 못했던 물길 710리, 뭍길 20 리 도합 730 리의 봉산욕행을 실행했다.

이 봉산욕행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기 위해 떠났던 것이 아니라, 물길을 이용한 강학과 문학창작, 제자들과 소통을 수반한 우리나라 선유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또 문묘에 배향된 일두 정여창의 실기, 퇴계학의 계승자 학봉 김성일의 행장을 쓰셨으며 사양정사를 지었다.

그의 마지막 사수에서의 생활은 많은 고통 속에 이루어진 초인적인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수에서의 6년은 본인에게는 고통이었으나 대구로서는 큰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성주가 한강학의 발원지였다면 사수는 완성처로 자리 매김할 수 있다.

대구광역시 교육청이 근래 몇 년간의 교육성과를 토대로 “대한민국 교육수도 대구”를 선포했다. 그 먼 뿌리의 자양분은 한강 정구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사양정사 이전 사수에는 사빈서재가 있었으며 이 서재의 경영자는 동래인 정수와 정천주 부자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