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    업데이트: 18-04-11 15:30

칠곡이야기

한강공원 내 사양정사(泗陽精舍)복원
아트코리아 | 조회 829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조성한 대구시 북구 사수동의 한강공원

한강조성과 함께일부  복원된 사양정사


사양정사 중건기


택지를 개발하기 전 한강 선생의 후손 당시 문목공 대종회 회장 정건용씨와 달구벌 얼첮는 모임 회원, 마을 주민 대표 박만규 등이 유허지를 둘러보고 있다
 

한강공원 내 사양정사(泗陽精舍)복원

 

한강(寒岡)이 성주를 벗어나 칠곡 노곡정사로 거처를 옮겨 저술과 후학 양성에 몰두하던 중 뜻하지 않게 화재로 많은 작품이 불타고 훼손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마침내 선생은 사수(현 북구 관문동 사수)로 다시 옮겨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짓기 시작했다.

서쪽 두 칸은 서재로 하여 그 이름을 지경재(持敬齋)와 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동쪽 한 칸은 대청으로 하여 이름을 경회당(景晦堂)이라 하였으며, 남쪽 행랑채는 누각으로 하여 이름을 망노헌(忘老軒)이라 하였다.

주산(主山)에 제문을 올리고 사수경영에 강한 의욕을 보였지만 자재와 일손부족 등으로 어떤 날은 몸소 일을 하며 몇 달씩이나 골몰해 몸과 마음이 축날 정도로 고충이 많았다. 그나마 풍병(風病)이 와서 오른 쪽 몸이 불편했다. 공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생애의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봉산욕행(蓬山浴行)을 즉 동래 온천 행을 실행했다.

1617년 7월 20일 새벽 지암(달성군 다사읍 서재리로 추정)을 출발해 7월 26일 목적지 동래에 닿으니 물길 710리 뭍길 20 리 도합 730 리의 먼 여행이었다. 돌아온 지 몇 달 후인 1617년(광해군 9) 겨울 사양정사가 완성 되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노곡정사(蘆谷精舍)에서 불타다 남은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오 선생 : 송(宋)나라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사마광(司馬光), 주희(朱熹)”를 다시 편찬하고, 1620년(광해군) 78세에 지경재(持敬齋)에서운명(殞命) 하였다.

이곳에서 2년 남짓 생활하는 동안 선생은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를 완성하고 ,정여창의 실기, 김우홍의 행장, 김성일행장 및 묘포를 탈고 하는 등 저작활동에 힘을 기우렸다, 특히, 김성일의 학봉행장과 학봉묘포는 수정을 거듭한 끝에 완성한 만년의 역작이었다.

사 후 70여 년이 지난 1694년(숙종 20) 칠곡군 지천면 신동 웃갓마을로 이건했다.

그 후 칠곡향교와 문목공대종회, 달구벌얼찾는모임 등 시민, 사회단체가 발의하여 대구시 북구 관문동 사수리 한강공원 섬뫼숲 언덕에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일부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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