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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거창인 요수 신권 선생과 수승대 강숲 - 2013년 08월 01일 -
아트코리아 | 조회 450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거창인 요수 신권 선생과 수승대 강숲
유생들의 시야가 산만하지 않도록 만든 숲

 


거창의 명소 수승대(명승 제53호)는 원래 원학동(猿鶴洞)이라 하여 조선시대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으로 불렸던 화림동(안의계곡), 심진동(용추계곡)과 함께 ‘안의삼동’(安義三洞)의 한 곳으로 불리던 곳이다.

수승대는 울창한 숲과 넓적한 바위, 맑은 물이 어우러지고 요수정과 관수루, 구연서원 등 문화유적이 잘 남아 있어 옛 선비들의 풍류문화를 이해하기 좋은 곳이다.

수승대는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사신이 신라로 갈 때 혹 있을 불상사로 돌아오지 못할까 하여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보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43년(중종 38년) 퇴계 이황이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수승으로 이름을 바꾸니/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겠네/ 멀리 숲 속의 꽃들은 피어나려 하고/ 응달의 눈은 녹으려 하는데/ 수승대를 찾고 구경하지 못했으니/ 속으로 상상만 늘어 가누나/ 뒷날 한 동이 술을 마련하여/ 커다란 붓으로 구름벼랑에 쓰리라’라고 한 편의 시를 보내주어 수승대(搜勝臺)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에 지역의 선비 갈천 임훈(林薰`1500~1584)과 요수 신권(愼權`1501~1573) 각기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갈천은 ‘꽃은 강 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술통에 가득한데/ 유람하던 이들이 분주히 오가는구나/ 봄날은 가려 하고 길손도 떠나려 하네/ 봄날을 보내는 시름만이 아니라/ 그대를 보내는 시름도 있네.’

요수는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하여 가는데/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구름 같은 근심을 붓으로 묻읍시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속세에 노닐며 쫓지 못하고/ 홀로 벼랑 노송에 기대 봅니다’라고 했다.

일원은 거창 신씨의 원림이었던 것 같다. ‘요수신선생장수지지’(樂水愼先生藏修之地)라는 현판과 관수루(경남 유형문화재 제422호), 요수정(경남 유형문화재 제423호)과 구연서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특히, 1694년(인조 23년) 세워진 구연서원(龜淵書院)은 벼슬을 마다한 요수공이 후학들을 강학하기 위해 지었던 구주서당 자리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요수공과 석고 성팽년(成彭年)을 배향했다가 1808년(순조 8년) 황고 신수이(愼守彛)를 추향한 유서 깊은 곳이다.

본관을 거창으로 한 신(愼)씨의 시조 수(修)는 본래 중국 송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으로 1068년(고려 문종 22년)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5대 왕조에 걸쳐 34년간 나라에 봉사했으며 벼슬이 정일품에 이르렀다.

고려 고종 때 대장군을 지낸 7세손 집평(執平)이 몽골군의 침입 때 죽도에서 순절하자 검교군기감사를 지낸 아들 성(成)이 친몽파가 득세하는 개경을 떠나 오지인 거창에 뿌리를 내리고 본관을 거창(居昌)으로 삼았다고 한다.

관수루 앞 위수 가운데 작은 섬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 그냥 강숲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 줄기가 붉고 잎의 때깔이 유난히 푸르다. 요수가 강학할 때 유생들의 시야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 2013년 08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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