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서산인 금월헌 정인함과 합천 가남정 느티나무
아트코리아 | 조회 571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서산인 금월헌 정인함과 합천 가남정 느티나무
서산 정씨 영혼이 깃든 세 그루 나무 중 하나

 


컴퓨터를 열어 서산정씨대종회 홈페이지를 열람했다. 후손이 아니더라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서정의 영수(靈樹) 삼품도(三品圖)’와 서산 정씨 영혼이 깃든 세 그루의 나무 사진이었다.

경남 합천군 야로면 하림리 751(보호수 대장 상 753)번지에 있는 금월헌 정인함(鄭仁涵`1546~1613)이 심은 느티나무, 김천시 대덕면 추량리 1031-2(문화재 대장 상 298)에 있는 행촌(杏村)이 심은 은행나무,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447-1(문화재 대장 상 51외2필) 행정(杏亭) 정사용(鄭士鎔`1564~1608)이 심은 은행나무였다.

행촌과 행정이 심은 은행나무는 보았지만 금월헌이 심은 느티나무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김천 가는 것을 파기하고 합천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산 정씨는 본관지가 충청도 서산이나 본향은 중국 절강성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로 망명한 원외랑 신보(臣保)의 후예로 맏아들 양열(襄烈) 정인경(鄭仁卿`1241~1305)이 고려에 많은 공을 세워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지가 되었다.

서산정씨 가문이 경상도에 뿌리를 내린 것은 고려가 망하자 당시 절의파가 다 그랬듯이 부성부원군 정윤홍(鄭允弘)이 김천 봉계로 내려와 은거하고 그 후 무안현감을 지낸 정성검(鄭成儉)이 합천에 옮겨 살면서 비롯되었다.

금월헌은 훈도였던 아버지 건(健)과 어머니 성주 이씨 사이에 4형제 중 둘째로 1546년(명종 2년) 가야면 쇠촌리에서 태어났다. 형 인기와 함께 거유 남명 선생의 제자가 되어 오건, 김우옹, 최영경 등과 더불어 소위 ‘남명 48가(家)’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될 만큼 학문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조카 결, 재종 인준 등과 함께 종형 정인홍의 의병진에 들어가 성주, 고령과 낙동강 일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의주로 피란 가는 왕을 호종했다. 1601년(선조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병조 좌랑을 거쳐 호조`예조 정랑을 지내고 영덕현감으로 나아갔다. 1605년(선조 38년) 전란이 끝난 후 실시한 논공행상에서 선무원종1등공신과 호종원종3등공신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초 정쟁이 치열해지자 낙향했다. 1613년(광해군 5년)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였다. 이듬해 정운원종공신3등에 서훈되고 1626년(인조 4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 후 사람의 발의로 운계서원에 배향되었다.

88고속도로를 타고 합천 야로로 향했다. 자주 해인사를 가보았기에 현장을 쉽게 찾으려니 생각했지만 몇 번 물어서야 하림에 도착했다.

공과 더불어 인기, 인휘, 인지 4형제를 배향하여 일명 사우정(四友亭)이라고도 하는 가남정(伽南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0호)은 노송이 주변을 에워싸고 바로 앞은 가야산에서 흘러내리는 야천(倻川)의 맑은 물이 흘러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공이 심은 나무는 정자 바로 앞에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서 있었다. 수형도 아름답고 수세도 강건했다. 공교로운 것은 서정의 상징인 3영수(靈樹)를 남긴 행정, 행촌, 금월헌 모두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양열공의 11세손이다.

그런데도 행정이 심은 나무는 천연기념물(제300호)로, 행촌이 심은 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제91호)로, 금월헌이 심은 나무는 합천군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각기 품격이 달랐다. 나무를 문화재로 지정함에 있어 여러 가지 검토할 것이 있으나 수령이 가장 핵심인 것을 감안하면 아쉽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평가가 어떻든 이 세 그루는 명문 서정의 고귀한 자연유산인 만큼 잘 가꾸어야 할 것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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